미꾸라지, 부활을 꿈꾸다

[달내일기 96] 바짝 마른 연못에서 넉 달을 버틴 미꾸라지

등록 2007.02.23 11:10수정 2007.02.2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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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작년 여름 만든 뒤 한 달쯤 지났을 때의 연못 모습

작년 여름 만든 뒤 한 달쯤 지났을 때의 연못 모습 ⓒ 정판수

기온이 완연히 봄 날씨로 돌아서면서 우리 집에도 할 일이 많아졌다. 겨우내 하지 못하여 밀린 일들이 제법 널려 있어서다. 굳이 하나하나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다만 오늘(23일)은 연못 깊게 파는 일을 하기로 했다.


작년 여름, 연못을 만들기로 작정했을 때 바닥을 어떻게 할까가 가장 신경 쓰였다. 즉 물 빠짐을 막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는. 내가 돌아다녀 본 집의 연못 바닥은 대부분 시멘트로 발랐거나 심지어 두꺼운 비닐을 깔아 놓았었다.

@BRI@그러면 연못에서 자랄 수생식물과 물고기는 죽은 물(썩어가는 물)을 먹고 자랄 게 아닌가. 그게 썩 내키지 않아 이틀에 한 번씩 물을 대주는 일이 좀 귀찮더라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늘 새 물을 먹고 자라는 것과 죽은 물을 먹고 자라는 게 다를 거라는 판단 아래.

수생식물은 생각대로 잘 자라주었다. 연꽃, 수련, 생이가래, 물채송화 등이 매우 잘 자라 이웃에 분양하기도 했으니.

그러는 중에 물고기가 없으면 허전한 듯싶어 가까운 개울로 가 피라미를 잡아넣었고, 미꾸라지도 시장에 가서 1만원어치 사다 넣었다. 그런데 얼마 뒤 뱀이 드나들면서 피라미도 미꾸라지도 보이지 않아 다 잡아먹었거니 했다.

그러던 차 작년 10월 중순쯤 집을 한 열흘 비울 일이 있어 나갈 때 연못에 물 대주는 일 부탁하는 걸 그만 깜빡 잊고 말았다. 돌아왔더니 바닥이 바싹 말라 수생식물은 다 죽어가고 있었고, 물론 미꾸라지와 피라미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을 다시 넣으려다 어차피 살아날 것 같지도 않은데 심정에 그만 그대로 두었다.


오늘 아침, 연못을 그대로 버려두자니 오히려 보기 흉할 것 같아 다시 제대로 만들기로 했다. 새로 만들기보다는 작년 걸 그대로 이용하되 다만 연못의 깊이만 좀 더 깊게 하기로. 속이 깊으면 이틀에 한 번씩 물을 보충해주는 대신 사흘이나 나흘에 한 번씩이면 되니 사나흘 집을 비워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였다.

a 오늘 바짝 마른 연못 모습. 살아남은 미꾸라지 때문에 물을 대고 있다.

오늘 바짝 마른 연못 모습. 살아남은 미꾸라지 때문에 물을 대고 있다. ⓒ 정판수

그런데…, 무심코 괭이로 판 뒤 삽으로 흙을 퍼내려는데 뭔가 꼬물꼬물 하는 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들어올려 봤더니 세상에! 미꾸라지였다. 새끼를 갓 벗어난 크기의 미꾸라지였다.


이미 물을 안 넣은 지, 다시 말하면 연못 바닥이 마른 지 넉 달이나 지났다. 그렇다고 바닥이 습하지도 않은데 거기서 살아 있었던 거였다.

믿기지 않아 다시 삽으로 떴더니 또 한 마리가 보였다. 더 있는지 파헤쳐 보려다 자칫 삽에 찍히면 여태까지 버티어 온 그 끈질긴 생명력을 해칠 것 같아 얼른 덮어버렸다. 그러니 땅 속에 몇 마리 더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바짝 마른 땅 속에서 여태껏 살아 있었을까?

미꾸라지는 온도가 낮아지거나 가뭄이 들면 흙 속으로 들어가 휴면을 취한다는 얘긴 들은 적 있다. 또 물 속에 산소가 부족한 경우에는 장으로 공기호흡을 하기도 한다는 말도. 그래도 바닥이 마른 지 넉 달이 지났는데…. 더욱이 지난 10월부터는 가뭄이 들어 며칠 전 비가 오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비를 구경하기 힘들었는데. 그 속에서 살아남았다니….

a 도무지 살아날 수 없는 환경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 두 마리의 미꾸라지

도무지 살아날 수 없는 환경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 두 마리의 미꾸라지 ⓒ 정판수

우리 달내마을에서 한 십여 분쯤 동쪽으로 차를 몰고 가면 바다가 나오는데, 거기 갯바위 꼭대기에 소나무 한 그루 휑뎅그레 자라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걸 볼 때마다 경이감에 잠긴다. 적어도 소나무가 뿌리를 내리려면 일정한 흙이 있어야 하는데 달랑 바위 하나밖에 없는 거기에 뿌리를 내리다니….

오늘 나는 또 하나의 다른 경이감을 맛보았다. 도무지 살아 있을 수 없는 그런 환경에서 미꾸라지는 꿋꿋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바짝 마른 연못 속의 미꾸라지는 비정한 주인의 무관심 속에서 언제나 비가 오면 부활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어쩌면 비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까지도.

보잘것없어 보이는 정말 하찮은 미꾸라지가 보여준 끈질긴 생명력이 참으로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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