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군악대가 1904년 5월 6일 창덕궁에서 열린 '러일전쟁 승전 기념식'(공식 행사명은 '황군 전승 축하회')에서 연주하는 모습. 고종을 비롯해 내각 대신들까지 참석했다. 행사 직전, 일본군은 만주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압록강 너머에 있는 구연성을 점령했다(1904.5.1).<러일전쟁사진화보>
고종의 새로운 대외전략은 서세동점의 시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열강 끌어들이기’와 ‘세력균형’을 시도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세력균형은 ‘나와 남의 세력균형’이 아니라 ‘남과 남의 세력균형’이었다. 아버지 대원군의 ‘결사항전’ 노선과는 정반대로, 그는 ‘이이제이’로 위기를 돌파하려 하였던 것이다.
1880년 이후 고종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열강을 끌어들였다. 1882년 5월 22일에는 청나라의 도움을 빌려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미국을 끌어들였다. 또 임오군란 발생 직후에는 청나라에 체류하고 있던 김윤식·어윤중에게 “청나라의 군사 개입을 부탁하라”는 비공식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미국에 이어 청나라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청나라는 이미 그 전에 조선에 진출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위의 광서 5년 유지에 언급된 바와 같이 그 이전만 해도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외교에 간섭하는 것은 수월치 않은 일”이었다. 청나라는 조선과 교류는 하고 있었지만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는 사상 처음으로 조선에 대한 간섭정책을 단행하게 되었다.
자신이 끌어들인 청나라가 힘이 너무 세 지자, 고종은 이번에는 미국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당시의 미국은 기본적으로 동아시아에 별 관심이 없었고 또 능력도 없었다. 미국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고종은 비밀리에 러시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김옥균·박영효·민영익·김관선 등을 러시아 측에 여러 차례 보내 수교 의사를 타진한 끝에, 1884년 7월 7일 조·러 수호통상조약 체결로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하였다.
조·러 조약은 대단한 외교적 사건이었다. 영·청·일 등이 러시아의 남진을 집중 마크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작은 나라 조선이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도 대단했고, 또 주변의 견제를 뚫고 러시아가 조선에 진출한 것도 대단했다. 고종의 외교적 수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외세를 끌어들여 외세를 견제한다는 고종의 외교 노선은 결국 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가 끌어들인 외세 중에서 일본과 청나라가 1894년에 ‘자기들끼리의 대결’을 조선 무대에서 치렀고(청일전쟁), 조선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러시아·미국 등은 청일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일찌감치 발을 빼고 말았다.
일본군 끌어들여 동학농민군 진압한 고종
고종의 외교 노선은 청일전쟁을 끝으로 마감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고종은 청일전쟁을 겪고도 자신의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지자, 이번에는 일본군을 끌어들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다. 정권 유지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여 자기 백성들을 죽인 것이다.
청일전쟁 후 일본의 힘이 너무 세 지자 이번에는 아관파천(1896년)을 통해 러시아의 세력을 다시 끌어들였다. 일본 연합함대가 청나라 북양함대를 침몰시켜 일본이 기세등등해 있던 그 상황 속에서도 고종은 일본을 따돌리고 러시아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 방법은 제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1896년 5월부터 1898년 4월까지 조선에서 러·일 세력균형이 형성되어, 어느 한 나라도 조선에 대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고종이 1880년부터 학수고대하던 세력균형이 16년 만에 드디어 성취된 것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외교적 성과에 기인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고종의 대외정책은 기본적으로 사상누각(砂上樓閣)이었다. 그 구도는 조선의 자유의지대로 유지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러시아와 일본의 자유의지를 전제로 하는 구도였다.
여순·대련 점령(1898년 3월) 이후 국제적 고립에 빠진 러시아는 대(對)러시아 연대에서 일본을 빼내오기 위해 1898년 4월 ‘만주는 러시아, 조선은 일본’이 차지한다는 협정을 체결하고는 한반도 무대에서 발을 뺐다. 이로 인해 러·일 세력균형은 파괴되고 조선은 일본의 단독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고종이 2차례나 끌어들인 러시아는 1904년 러일전쟁으로 동아시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1882년 이후 고종이 끌어들인 외세들은 하나같이 일본에 의해 밀려나거나(청·러) 혹은 스스로 물러가고 말았다(미국·독일).
자신도, 가문도, 나라도 망친 고종의 외교수완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은 외교를 못해서 망한 게 아니라 외교를 너무 잘해서 망한 것이다. 외세를 마구잡이로 끌어들이고 자체적인 역량증대에 투입할 자원을 외세 끌어들이기에 ‘탕진’했던 것이다. 고종 친정(親政) 이전에만 해도 조선은 서양열강이 ‘어려워하던’ 나라였지만, 이이제이 전략 채택 후에 조선은 주권을 지키기에도 버거운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고종은 분명 국제정세에 어두운 지도자도 아니었고, 외교적 수완이 없는 인물도 아니었다. 국제적 견제를 뚫고 조·러 조약을 체결한 것이나, 청일전쟁 이후의 혼란 속에서도 러·일 세력균형을 일구어낸 것을 보면, 그는 분명 세계정세를 잘 알고 있었으며 또 외교적 수완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내적 역량인 동학농민군을 궤멸시킨 것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조선의 역량을 키우기보다는 타국의 역량을 이용하기를 더 좋아한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왕위를 얻은 소년시절의 경험이 그런 퍼스낼리티를 형성하는 요인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그 때문에 자신도 망치고, 가문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고 말았다.
국가가 외교를 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동맹의 대상을 잘 선택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자국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에 일차적 관심을 기울이면서 나 스스로 살아갈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일단 나를 생각한 연후에 '나와 남의 관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2005년에 쓴 저의 논문 일부를 소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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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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