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40회

등록 2007.02.26 08:17수정 2007.02.26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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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녀석… 하기야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지금 그 모양 그 꼴이 되었지.”

“이게 차라리 편하오.”


@BRI@“그럴 것이면 지금 조용히 이곳 운중보에서 사라지는 것이 어떠냐? 네 놈 혼자가 싫다면 이 녀석도 같이 데려나갈 수도 있다.”

능효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오.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곧 후회를 했소.”

“못난 놈!”

“뭐… 추숙께 배터질 만큼 욕먹을 각오는 했으니 실컷 하시오. 나야 한쪽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이지만 추숙 입만 아프실 거요.”


어이가 없었다. 저놈은 아주 특이한 놈이었다. 이리저리 충동질 쳐도 전혀 요동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준비해 놓은 안배를 모두 동원한다 해서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란 법도 없었다. 상대가 있는 일이란 언제나 변수가 있는 법이었고, 운이란 놈이 가끔 어느 쪽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되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그건 그렇고… 남들이 알지 못하는 방 하나만 구해주시오. 토굴도 좋고 밀실이라면 더욱 좋소. 말소리가 새나가지 않는 방이라야 하오.”


“뭣 하러? 갑자기 겁이 나 숨으려는 게냐?”

능효봉이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이며 누워있는 설중행을 가리켰다.

“저 자식을 안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수는 없잖소? 어차피 금제를 풀려면 시간도 걸릴 테고. 귀찮은 일은 되도록 피하는 게 좋지 않겠소?”

“지금 네 놈은?”

귀산노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능효봉의 생각을 읽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남들 눈에 띠지 않게 주작각으로 스며들 수 있는 쥐구멍이 있으면 그거나 알려주시오.”

정말로 능효봉은 설중행을 데리고 중의에게 갈 모양이었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으니 하는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귀산노인의 수염이 미세하나마 떨리기 시작했다.

“미친 놈!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냐? 네가 저 녀석을 중의에게 데려간다고 그 자가 순순히 말을 들을 것 같아?”

귀산노인은 화가 나 악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인데도 능효봉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러한 반응은 예상했던 것이었고, 그런 것에 연연할 시기도 아니었다.

“데려가긴? 차라리 중의를 모셔오는 게 더 편하지 않겠소?”

“중의는 매우 간교할 뿐 아니라 정말 다루기 힘든 놈이다. 네가 어떠한 수단 방법을 동원해도 중의 그 자가 손을 쓰지 않겠다고 하면 어찌할 테냐? 오히려 그 자는 아마 네 놈까지 누군지 금방 알아차릴 것이야.”

귀산노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악이라도 쓰며 욕을 해대야 하는데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봐 그러지도 못하니 더욱 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능효봉의 능글거리는 태도가 더욱 화를 돋우고 있었다.

“추숙이 말씀하신 중의가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의미는 그가 어떠한 일에 연연하거나 욕심이 없어 파고들 약점이 없다는 뜻일 거요.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의는 그런 사람이오. 추숙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중의는 꽤 완벽한 가면을 쓰고 살았다고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소.”

“무슨 뜻이냐?”

“중의는 절대 내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는 의미요. 나는 중의가 어떤 인간인지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오. 그 때문에 제일 먼저 중의에게 빚을 받으려 했는데 이 자식 때문에 조금 늦추는 게 마음에 걸릴 뿐이오. 하지만 누가 먼저든 무슨 소용이 있고, 그 시기가 하루 이틀 빨라진다고 달라질 게 무에 있겠소?”

“죽으려고 환장한 놈 같군. 네 놈들은 하루가 지나기 전에 허무하게 뒈져 버릴 게야.”

“추숙!”

능효봉이 차분한 목소리로 귀산노인을 불렀다. 그렇다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고, 투정을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약간은 미안한 기색을 띠고 있었지만 엷은 미소까지 입에 매달고 있었다.

“어차피…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그저 내가 해야 할 최소한의 것만 하고 싶소.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과연 지금 와서 굳이 그 빚을 받아야 하는지 조차 망설여지오. 혈채(血債)에 대한 대가는 물론 피(血)뿐이오. 그리고 그 피는 다시 피로 갚아야 하오.”

“나약한 자의 변명일 뿐이야. 두려움을 가진 자가 그것을 숨기려 하는 말일뿐이다.”

이것은 비난이었다. 지금까지 기다려온 자의 실망과 배신의 표출일는지 몰랐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소. 나는 두렵소. 정말 두렵소. 지금까지 내 칼에 죽어간 많은 영혼들도 두렵고, 앞으로 내 칼에 죽어갈 영혼들도 두렵소.”

귀산노인은 눈을 크게 뜨고 능효봉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내며 입술을 꼬옥 다물던 그 꼬마가 아니었다. 세월은 어느새 어린아이의 얼굴에 고뇌와 회한이라는 잔주름을 입히고 용서와 체념이라는 감정을 덧씌우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귀산노인은 능효봉이 진정으로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알았다.

“……!”

귀산노인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능효봉이 두려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그 인물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약하지도 두려움에 떠는 겁쟁이도 아니었다. 그는 강한 인간이었고,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자신의 마음이었다. 과거 자신이 존경했던 그 분이 그랬던 것처럼.

“네 마음대로 하다가 죽든 말든… 이젠 나도 모른다. 침상 뒤쪽 아래를 보면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보일게다. 그 안에 공간이 있다. 밖으로 통하는 길도 마련해 놓았다.”

다른 인물들의 이목을 숨기고 주작각으로 스며들 쥐구멍(?)은 분명 있었다. 가르쳐 주어야 했다.

“그 안에 운중보 내부 지도도 있을 게다. 내가 장난쳐 놓은 것들도 설명해 놓았으니 네놈이라면 아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지. 단 한 가지만 부탁을 하마.”

이제 더 이상 욕을 해댈 기운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사정하는 듯한 표정과 말투로 변했다.

“네게 위험이 닥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운중보를 떠나라. 그리고 어느 구석에 처박혀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말고 그냥 살아. 약속해 줄 수 있느냐?”

능효봉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약속을 지킬 것이라 믿지는 않았지만 귀산노인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고, 또한 듣는 능효봉으로서도 고개를 가로 저을 수 없는 약속이었다.

“알겠소. 추숙. 약속하리다.”

귀산노인이 능효봉을 더 이상 보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미 꺾지 못할 고집이다. 저 놈의 혈관에 흐르는 피는 아주 특이한 것이어서 일단 결정을 하면 절대 바뀌지 않는다.

“움직이려면 반 시진 뒤에 움직여. 성곤은 새벽마다 산책하는 습관이 있으니 반 시진 후라면 중의 혼자 있을 터이니….”

“고맙소….”

“어차피 이곳에도 한시진도 못되어 곽정흠이 올게야.”

경비가 가장 허술해 지는 그 때를 이용해 움직이라는 의미였다. 매일 아침 보고를 받는 시각은 묘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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