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그 곳에 있다

[서평] 신정일 엮음 <그 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등록 2007.03.02 20:33수정 2007.03.02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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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신정일 엮음 <그 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신정일 엮음 <그 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 다산책방

<그 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는 시집이다. 시 모음이다.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우리나라 곳곳을 걸어 다니며 돌아다니며 읊은 시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 모음은 사계로 채워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강도 있고 산도 있고 마을도 있다. 꽃도 있고 비도 있고 바람도 있고 눈도 있다. 더불어 이 안에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도 산다. 시집 구석구석 고즈넉이 시가 들어찬다. 이때 들어차는 시들은 걸어 나간 시의 길들이고 투덕투덕 다독여 여민 맘의 결들이다.


한 편 한 편 담아놓은 시들은 해석이 아니라 감상이다. 집요한 감상이 아니라 느슨한 즐김이다. 시의 것도 시인의 것도 아닌 읽는 이 자신의 것이다. 하여 내가 읽는 것은 시인의 시라기보다는 독자의 마음과 생각과 삶에 맺히는 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독자는 이 책의 저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양성우의 '추풍령'은 저자에게 '내 마음 속 가장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는 불씨인 셈이다. 어쩌면 시 속의 한두 구절 "허이허이 이 고개를/ 걸어서 넘으리라"나 "걸어서 넘으리라/ 사랑하는 이여"가 이런 기억을 소스라치게 깨웠는지도 모른다.

세 살 때이다. 어머니 등에 업혀서 배개재를 넘어 진안읍의 병원으로 가던 길, 그때 보았던 고개의 풍경이, 그때 어머니의 등에서 전해지던 따스함이 이제껏 나를 살게 한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79쪽)

아버지의 모습도 아련하게 잡히는가 보다. 김광섭의 '산'이 아버지를 불러다 모셔놓는다. 아버지의 기억을 잔잔히 비추어준다.

어느 해 가을 머루와 다래 그리고 맑고 투명한 맛을 자랑하는 산배를 가득 따 가지고 와 풀어놓고 웃으시던 우리 아버지. 내 아이들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나는 어떤 아버지로 남아 있을까? (83쪽)


시 읽기는 자기 읽기이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일깨우는 길이고 여행이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얻는 것도 많다. 그렇다면 시 읽기는 시를 읽는 스스로를 위한 추수이고 수확이며 축제이다. 그래서 시는 풍성풍성하고 들썩 들썩거리며 포근포근하다.

시구는 또 다른 문구들을 불러 모으기도 한다. 곽재구의 '나팔꽃이 피면'은 저자로 하여금 정약용을 떠올리게 한다. 죽란시사(竹欄詩社) 풍류계(風流契)의 규약을 생각나게 한다.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 필 때와 한여름 참외가 무르익을 때 모이고, 가을 서련지(西蓮池)에 연꽃이 만개하면 꽃구경하러 모이고, 국화꽃이 피었을 때 첫눈이 내리면 이례적으로 모이고, 한 해가 저물 무렵에 매화가 피면 다시 한번 모인다"는.


윤동주의 '길'로부터는 "길이 멀어야 말(馬)의 힘을 알고, 날이 오래되어야만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명심보감의 한 구절을 옮겨 담는다. 윤동주의 '길' 중에 어떤 굽이가 이런 문구를 담아오게 했을까? "돌담을 끼고 가"는 길이었을까?

신정일의 <그 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에 담겨진 봄은 '꽃'이고, 여름은 '산'과 '섬'이며, 가을은 '산사'와 '길'이고 겨울은 '눈'과 '마을'이다.

시 쓰기가 실 뽑혀 나오듯이 무심히 써나가는 자기 쓰기이듯, 시 읽기는 물 길어 올리듯이 무심히 읽어나가는 자기 읽기이다.

덧붙이는 글 | * 엮은이: 신정일 / 펴낸날: 2007년 2월 10일 / 펴낸곳: 다산책방 / 책값: 9500원

덧붙이는 글 * 엮은이: 신정일 / 펴낸날: 2007년 2월 10일 / 펴낸곳: 다산책방 / 책값: 9500원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 문화사학자 신정일의 발로 떠나는 우리 시 기행

신정일 지음,
다산책방,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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