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으로 나무 훔치러 오세요!"

지금은 사라진 정월대보름에 얽힌 어릴 적 추억

등록 2007.03.03 09:31수정 2007.07.08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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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홰와 보름달, 정월대보름이면 홰싸움을 하면서 한해의 풍년을 기원했다.

홰와 보름달, 정월대보름이면 홰싸움을 하면서 한해의 풍년을 기원했다. ⓒ 강기희

3월 4일은 정월대보름이다. 3월에 맞는 정월대보름이라 봄의 축제처럼 되어 버렸지만 예전엔 정월대보름이면 겨울이 한창이었다. 눈이 허벅지를 덮고도 남을 정도로 오던 시절의 정월대보름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먹을 것 없던 시절의 정월대보름, 마음만큼은 풍성해

@BRI@정월대보름의 기억을 온전히 하려면 탯줄이 묻혀 있는 강원도 정선의 덕산기로 가야 한다. 나는 그곳에서 8살까지 살았는데, 당시의 기억이 아직도 오롯하다. 읍내에 이사한 후 맞이한 정월대보름은 쥐불놀이를 한 기억밖에는 없으니 대보름의 기억은 고향에서의 추억이 가장 많다.

그 무렵 겨울에 하는 일이라고는 양지 편에 앉아 이를 잡거나 장작을 패는 일밖에 없었다. 당시의 옷이라는 게 나일론으로 만들어진 일명 '도꼬리'였는데, 옷의 박음질을 따라 이나 서캐가 하얗게 무리를 지어 서식하고 있었다. 서캐는 이가 까놓은 알이었고 그것들을 그냥 두면 이가 되었다.

이는 사람의 피를 빨아 통통했다. 그것들을 손톱으로 짓누르면 탁탁, 피가 튈 정도였다. 서캐는 박음질이 된 곳을 입에 물고 깨물어 나가면 알 터지는 소리가 오드득 오드득 났다. 형제들이 모여 앉아 이를 잡는 풍경이란 후일 TV에서 본 원숭이들의 이 잡는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양지 편에 앉아 이를 잡다가도 산림간수가 떴다 하면 집안 식구 모두가 바빴다. 숨길 곳도 없는 나무를 숨기느라 집안 식구가 매달리다 보면 산림간수는 집까지 와 있고 결국 키우던 닭을 잡아 입막음을 해야 했다.


땔나무를 하지 않으면 겨울나기가 어려운 산촌 살이에서 나무 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해놓은 것 자체가 문제였지만 당시 그 누구도 그런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대통령보다 무서운 산림간수의 존재는 그렇듯 산촌 사람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나중엔 어느 한 집 나무를 하지 않은 집이 없기에 아예 산림간수가 뜨면 마을의 어느 집에 모셔놓고 극진한 대접을 하여 돌려보내곤 했다. 그 시절 아이들은 마을 입구의 고갯마루에 보초를 서고 있다가 산림간수가 나타나면 즉시 어른들께 알리는 역할을 했다.


정월대보름을 하루 앞둔 밤인 까치 보름은 밤새 나무를 지키거나 나무를 훔치러 다녔다. 그날만큼은 나무를 훔쳐도 죄가 되지 않는 날이라 하여 형제들과 역할을 분담하여 나무를 훔치러 다녔다.

더위 팔지 못해 엉엉 울다 개에게 "내 더위 사라!" 하기도

형제가 많은 집은 그만큼 나무를 많이 가지고 올 수 있는 장점이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나무 훔치는 일은 당시의 정월대보름 풍습이었다. 돈 많은 부잣집이 그날만큼은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나무광을 열어두었다. 일종의 '베품'의 풍습인데 고향마을에서는 누구네 집 할 것 없이 대상이 되었다.

보름달이 훤하게 산길을 밝혀주는 날 다른 집의 나무를 가지고 오다가 우리집 나무를 가지고 오던 아이들과 만나기 일쑤였다. 산길에서 만난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나무를 내려놓고 몇 개인가 세어보기도 했고, 즉석에서 가위바위보를 해 이긴 사람이 나무를 다 가지고 가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

정월대보름날이 되면 어머니는 새벽부터 바빴다. 마을에 있는 샘물을 가장 먼저 뜨러 가기 위해 어머니는 첫닭이 울면 깨어났다. 정월대보름 날에 뜨는 샘물을 '용물 뜨기' 또는 '복물 퍼오기'라고도 하는데, 옥황상제가 목욕하고 간 물이라 하여 가장 먼저 뜨면 한 해 운이 좋다는 풍습이 있었다.

어머니는 샘에서 떠온 '용물'로 전날 물에 담가 놓은 오곡으로 오곡밥을 지었다. 요즘이야 압력밥솥에 오곡밥을 짓기도 하지만 당시만 해도 오곡밥은 시루떡을 하듯 떡시루에다 오곡밥을 지었다. 그렇게 지은 오곡밥은 날이 춥기에 저절로 냉동이 되었고 봄이 될 때까지 솥뚜껑에 눌려서 먹었다.

아침이 되어 가장 먼저 눈을 뜬 사람은 부스스 눈을 부비며 일어나는 사람에게 더위를 팔았고, 더위를 산 사람은 그 더위를 팔기 위해 다른 집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다른 집이라고 다를 바 없으니 오히려 형제 많은 집안의 더위를 다 사가지고 오기도 했다.

감당 못할 정도로 더위를 많이 산 사람은 엉엉 울다 그 더위를 결국 사람이 아닌 키우던 똥개에게 팔기도 했다. 보름날 아침이면 할일도 많았다. 더위를 팔고나면 부럼을 깨물었다. 부럼은 '부스럼 깨물기'라고도 하는데 볶은 콩이나 가래, 잣, 옥수수, 대추 등 소리가 날만한 것을 깨물었다.

부럼을 깨물면서는 '내 몸에 헌디가 나지 않게 해 달라'는 말을 함께 했다. 그렇게 하면 일년 내내 부스럼으로 인해 종기가 나지 않는다는 일종의 주술적 개념이었다. 그 시절 목욕탕이 어디 있었으며 빨래도 가끔가다 양잿물에 삶을 정도였으니 위생 상태라는 게 엉망이었다.

실제로 그 시절 일년 내내 얼굴이나 머리에 부스럼을 달고 사는 경우가 허다했다. 영양실조에 걸려 마른버짐이 피는 아이도 많던 시절이었다. 비누라는 것도 없이 살았던 터라 목욕 한번 하지 않고 겨울을 나기도 했다. 산촌의 생활이라는 게 환경적으로는 사람이 견딜 수 없을 정도여서 작은 병에도 목숨을 잃는 수가 많았다.

a 대추나무 시집 보내기. 많이 열려서 우리 가족 먹여 살려다오.

대추나무 시집 보내기. 많이 열려서 우리 가족 먹여 살려다오. ⓒ 강기희


a 정월대보름엔 소에게도 오곡밥과 나물을 주었다.

정월대보름엔 소에게도 오곡밥과 나물을 주었다. ⓒ 강기희

정월대보름은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

오곡밥을 먹으면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귀밝이술을 한잔씩 했다. 귀밝이술은 섣달 그믐에 담근 술을 사용하는데 보름날 아침에 마시면 귀가 밝아져 한해 좋은 소식만 듣는다고 믿었다. 오곡밥으로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나면 비로소 정월대보름의 하루가 시작된다.

밖으로 나간 아이들은 집 주변 나무에 앉은 새들을 쫓았다. 정월대보름날 새를 쫓으면 곡식이 여물 무렵 새들이 몰려들지 않는다고 했다. 새를 쫓으며 부르는 소리는 이랬다.

"웃녘새야 안녘새야, 우리집 밭에 들지 말고 길동이네 집으로 가거라. 훠이훠이."

이날은 소에게도 오곡밥과 나물을 주는데, 소가 오곡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이고 나물부터 먹으면 흉년이 든다고 해 억지로 소의 머리를 오곡밥을 향해 돌리기도 했다. 소에게 오곡밥을 주는 것에 비해 키우는 개에게는 밥을 주지 않았다.

'개 보름 쇠듯 한다'라는 말이 있듯 정월대보름 날 아침에 개에게 먹이를 주면 여름에 파리가 끼고 깡마른다고 하여 굶겼다. 사람과 한 식구 대접을 받는 소에 비해 개의 대접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한낮이 되면 아이들은 대추나무를 시집보내기 위해 여기저기 쏘다녔다. 여자 형상을 한 나뭇가지 사이에 잘 생긴 돌을 끼워 넣으면 시집보내기가 끝나는데, 그렇게 하면 대추가 많이 열린다고 믿었다.

순임의 집으로 간 평서는 아이들과 다금골을 돌아다니며 대추나무를 시집보내는 놀이에 빠져있었다. 대추나무를 시집보내는 날은 정월대보름인데 그때 대추나무를 시집보내야 열매를 많이 맺는다 해서 순임은 아이들과 함께 가지 사이에 돌을 박고 있는 것이다. 평서는 순임이 시키는 대로 넓적한 돌을 집어 가지가 벌어진 대추나무 사이에 끼웠다.

"이왕이면 잘 생긴 돌로 낑궈라. 그래야 꽃도 많이 피고 올 가을에 대추도 많이 열린단 말이다."

순임이 평서가 끼워 놓은 돌을 빼 내며 자신이 들고 온 길쭉한 돌을 가지 사이에 끼웠다.
- 강기희 장편소설 '은옥이' 본문 중에서


대추나무 시집보내는 일이 끝나면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 양동이를 들고 나왔다. 아이들은 마을의 집을 돌며 오곡밥을 얻었다. 집집마다 오곡밥의 맛이 다르기에 그것들을 집에 가지고 와서 어느 집 오곡밥이 맛있는지를 평가하곤 했다.

나눔과 베품의 풍습 사라진 정월대보름, 각자의 소원 빌기에만 바빠

오곡밥 얻으러 다니는 일도 하나의 풍습이라 어느 집이고 가면 마다하지 않고 넉넉하게 퍼주었다. 이러한 풍습 또한 나무를 훔치는 풍습과 더불어 부잣집이 가난한 집을 위해 그날만큼은 먹을 것을 얼마든지 내어주는 대보름만의 풍습이었다.

마을에 사는 사람이 적었던 탓에 덕산기에는 농악대도 없었다. 어른들은 더 큰 마을로 대보름맞이를 하러 가고 아이들은 마을에 남아 망우리를 돌렸다. 나중에 커서야 그것이 '쥐불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의 '망우리'는 쥐불놀이와는 다른 뜻이 있었던 듯싶다.

'망우리'는 '망월'의 또 다른 말로 대보름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어린 시절 살던 덕산기는 산촌이라 깡통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망우리를 깡통으로 한다는 것도 읍내에 살게 되면서 알게 되었으니 고향 마을은 은둔의 땅이 맞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나무에 헝겊을 둘둘 말아 홰를 만들었다. 몇 개의 홰를 만들어 보름달이 떠오르는 언덕에 올라 홰를 돌렸다. 아이들은 패를 두 개로 나누어 홰를 돌리다 마지막엔 횃불싸움도 했다. 그 싸움에서 이긴 편이 풍년이 든다고 했으니 모두들 기를 쓰고 홰를 던졌다.

밤이 깊으면 다들 집으로 돌아와 오곡밥을 먹으며 밤을 보냈다. 이날은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하여 잠을 자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버틴다 해도 잠은 오게 마련이었고 급기야는 성냥개비로 눈썹을 받쳐 들기까지 했다.

가장 먼저 잠을 자는 사람은 늘 막내인 나였다. 하루 종일 형들을 따라다니며 노느라 피곤했기에 먼저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내 눈썹엔 밀가루가 하얗게 칠해져 있었고 나는 진짜 눈썹이 센 줄 알고 엉엉 울었다.

엉엉 울던 그 아이들이 이제 어른이 되어 정월대보름을 맞는다. 어른이 된 그 시절의 아이들은 당시의 일을 추억하며 "그래도 옛날이 좋았어"한다. 요즘 아이들은 예전처럼 나무를 훔치거나 오곡밥을 얻으러 다니지도 않는다. 어머니도 이른 새벽 용물을 뜨러 가지 않고 시루에 오곡밥을 짓지도 않는다.

대추나무도 이젠 시집을 가지 않는다. 대추가 열린다 하여 털 사람도 없는 시골에서 대추나무 시집보내는 모습은 구경하기도 힘들다. 에어컨이 더위를 식혀주는 요즘 더위를 파는 아이들도 없고 귀밝이술을 마시는 어른들도 드물다.

나눔의 문화가 사라진 걸까. 요즘은 오곡밥을 짓는다 해도 옆집과 나누지 않는다. 부잣집도 어느 가난한 집을 위해 광을 열어두거나 음식을 나누지도 않는다. 나누고 더불어 사는 지혜마저 사라진 요즘의 정월대보름 풍습은 '문화'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그저 각자의 소원을 빌기에만 바쁘다.

a 보름달과 달집 태우기. "누가 뭐래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입니다"

보름달과 달집 태우기. "누가 뭐래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입니다" ⓒ 강기희

#정월대보름 #쥐불놀이 #홰싸움 #더위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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