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날, 아직 개화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세상으로 출근하는 해'처럼 아이들도 밝고 환했으면

등록 2007.03.04 11:20수정 2007.03.0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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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조계산에서 만난 복수초

조계산에서 만난 복수초 ⓒ 안준철

a 복수초- 아이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듯 아름다운 꽃 속을 들여다보았다.

복수초- 아이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듯 아름다운 꽃 속을 들여다보았다. ⓒ 안준철

개학을 했다. 겨우내 텅 빈 교정이 아이들로 넘쳐났다. 마치 긴 겨울을 이기고 산에 들에 피어난 봄꽃들처럼 아이들이 활짝 피었다. 그래서 개학날 만난 아이들을 보자마자 개화라는 단어가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개학과 개화, 그러고 보니 그럴 듯하다. 방학을 끝내고 다시 수업을 시작하는 것이 개학(開學)이라면 그것이 또한 개화(開花)가 아니겠는가. 아이들이 학교의 꽃이요 생명임이 분명하다면.

지난 3월 2일, 개학과 더불어 입학식이 끝나고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났다. 처음 만난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해마다 그런 고민을 한다. 대개 첫 시간은 수업준비가 덜 된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교과와는 상관없이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올해는 <참 소중한 생명>(아이필드)이라는 제목의 책에 소개된 '각시나방' 이야기를 준비했다. 다음은 그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BRI@'각시나방의 몸체는 큰 반면 고치는 아주 좁아서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가는 고치 속에서 기어 나올까 놀라곤 한다. 생물학자의 말에 따르면, 각시나방이 번데기일 때는 날개가 없지만, 고치를 뚫고 나와 껍질을 벗고 날개를 만들 때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신체 내부에서 날개의 핏줄 속으로 분비물을 흘려보내 힘찬 날개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각시나방이 껍질을 벗던 날, 한 부인이 고치 속의 번데기가 파닥거리는 모습을 발견한다. 부인은 아침부터 하루종일 그 옆에서 누에가 무던 애를 쓰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움직임은 느렸고, 그녀의 눈에 희망이 거의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결국 가위로 고치를 단단히 감싸고 있는 실을 잘라 준다. 그렇게 하면 누에가 쉽게 기어나올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과연 나방은 힘들이지 않고 금세 고치를 뚫고 나온다. 그러나 몸은 오히려 퉁퉁 부어버렸고 날개는 짧고 작아져 버렸다. 그 날개로는 날 수가 없었다. 나방은 힘을 주어 날려 하다가 이내 지쳐 그만 죽고 말았다.


우리 일생을 통하여 어느 정도 고통과 고난과 난관은 피할 길이 없다. 그 중 적어도 일부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으며, 심지어는 고통을 덜도록 도와줄 수조차 없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고통과 고난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


아무런 대가 없이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 그것이 요즘 아이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나는 '고통과 고난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인생의 주제가 담겨 있는 이야기를 나름대로 각색하여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듣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다. 그중에는 아직 개화(開花)하지 않은 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허공에 눈이 가 있는 아이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그들의 눈을 활짝 뜨게 해줄 방도는 없을까? 나는 손바닥을 몇 번 부딪혀 주위를 환기시킨 뒤에 개학 전날인 삼일절 휴일에 있었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어제 삼일절 휴일이라 문우들과 함께 조계산에 갔어요. 문우라는 말은 함께 문학을 하는 동무라는 뜻이에요. 선생님은 시를 쓰고 있어요. 시집도 몇 권 냈지요.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도서관에 가면 선생님 시집을 볼 수 있어요. 어제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이 아침 9시였는데 혹시 늦을까봐 서둔 것이 30분이나 일찍 도착했어요.

그래서 근처 서점에 들어가 책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낼까 했는데 문이 닫힌 거예요. 그런데 잠시 후에 한 직원이 서점 문을 열면서 아는 체를 하는데 보니까 선생님 제자인 거 있죠. 자,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시를 감상하면서 생각해보세요. 오늘 새벽에 일어나 쓴 거예요."

여기까지 말하고 나는 시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아직도 눈이 허공에 있는 몇몇 아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이며 빙그레 웃음을 던져주고 난 뒤의 일이었다.

세상으로 출근한 해

문우들과 산에 가기로 한 날
약속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아직 채 문이 열리지 않은
서점 앞을 서성이다가
학교를 갓 졸업한 제자아이를 만났다.

그녀의 손에는 열쇠가 쥐어져 있었고
나는 등에 배낭을 짊어진 채
서점 안으로 들어가
잠시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쇼윈도우 앞에 놓인 문학잡지를 하나 골랐다.

꽤 잘나가는 시인들의 신작시를 뒤적이다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 돌아보니
어깨에 핸드백을 길게 둘러 멘
제자 또래의 어린 처녀 서넛이
막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왜 가슴이 무장 뛰었는지
내 이마 어디쯤에 환한 빛이 감돌았는지
설명할 길이 없지만
그 소란스러움 이후로는
책장이 건성으로 넘어갔다.

서점을 나오자
세상으로 출근한 해가 보였다.


a 세상으로 출근하는 해

세상으로 출근하는 해 ⓒ 안준철

시를 다 읽고 난 뒤 아이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시를 낭송하기 전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실망스러울 것은 없었다. 한두 번 해본 장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은 쓸쓸하여 헛웃음을 지으며 아이들로부터 시선을 거두려는데 유난히 눈이 빛나는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가만 보니 두세 아이가 더 있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왜 그 소란스러움 이후로는 책장이 건성으로 넘어갔을까요? 시끄러워서 시에 집중할 수가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그때였다. 한 아이의 입이 열릴 듯 말 듯하면서 입가에 조금은 어색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그 아이에게 어서 말을 해보라고 재촉의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는 조금 시간을 주기 위해 기다렸지만 끝내 아이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어 목소리가 사뭇 떨리기까지 했다.

"어제가 삼일절 휴일이면서 또 긴 방학이 끝나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어요. 아, 내일이면 학교에서 여러분을 만날 수 있겠구나, 하는 그런 설레는 마음으로만 하루를 보냈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그 반대였는지도 몰라요. 아, 이제부터 고생시작이구나. 또 아이들과의 전쟁이 시작되겠구나. 그런데 삼일절 휴일에도 출근한 제자와 그 또래의 처녀들을 보면서 저도 갑자기 출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그 출근의 소란스러움에 시를 읽을 수가 없었던 거지요. 시보다도 그 소란스러움이 더 깊고 아름다운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에요. 이 말을 시에 쓸까 하다가 생략한 거예요. 독자의 몫으로 남기려고 한 거지요. 선생님의 출근이 여러분에게는 등교지요. 그것도 첫 등교. 선생님도 그랬듯이 여러분도 오늘 새로운 첫 출발이라는 설렘보다는 오히려 이제부터 고생 시작이라는 생각이 더 들었을 수도 있어요. 그런 여러분을 충분히 이해해요. 선생님도 그랬으니까요."

a 역시 학교의 꽃은 아이들이다

역시 학교의 꽃은 아이들이다 ⓒ 안준철

아이들을 내 편이 되게 하려면 내가 먼저 아이들 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 편이 되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인생의 깊은 이야기도 함께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첫날 수업을 이렇게 갈무리했다.

"오늘 공책 준비가 미처 안 된 학생이 몇 명 눈에 띄는데 다음 수업시간에는 책과 공책을 꼭 준비하세요. 오늘 여러분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내일은 여러분 만날 설렘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세상으로 출근하는 해처럼 정말 밝고 환한 마음으로 내일 학교에 왔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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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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