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대청호에서 만난 풍경

등록 2007.03.08 11:05수정 2007.03.09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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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 무언지 모르게 가슴이 막막한 날엔 대청호를 찾아 가곤 했습니다. 물론 답답한 가슴을 확 트이게 하는 풍경이야 넓고 푸른 겨울 바다가 좋겠지만 제가 사는 곳은 내륙의 한가운데 있으니 짬을 내러 찾아가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바다는 멀어서 생각의 안에서만 빙빙 맴돌 뿐이었지만 그래도 마치 바다를 방불케 하는 대청호가 있어 그리운 바다를 대신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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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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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겨울의 끝이라고는 하지만 호수의 바람은 차갑습니다. 옷섶을 파고드는 칼바람을 막아보려고 자꾸만 코트깃을 여며 봅니다. 그러다가 이내 바람과의 다툼을 포기하고 맙니다. 바람은 마음이 없고 저는 마음이 있으니 마음이 있는 제가 져야지 별 수 있겠습니까.

이제 그만 자리를 뜰까보다. 그렇게 마음은 차를 주차해둔 마을 쪽을 향해서 동동거리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움직이니 자연히 눈도 따라 움직입니다. 마을에서 두 소년이 걸어나오고 있었습니다. 한 손엔 통을 들고, 한 손엔 막대기를 들고 건들건들 걸어서 호수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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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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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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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사이좋게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걸어오던 둘의 간격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두 아이 가운데서 키 작은 아이가 몸을 돌려 막대기로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키 큰 소년이 아주 멀리 가도록 혼자서 해찰을 부립니다.

키 큰 소년도 애써 손짓을 하거나 소리를 쳐서 "어서 오라"고 작은 아이를 채근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작은 아이의 그런 해찰하는 버릇에 벌써부터 익숙해져 있나 봅니다. 아마도 '저러다 싫증나면 따라오겠지' 싶은 것이지요.


이를테면 키가 큰 아이는 부처님이고 키가 작은 아이는 손바닥 위에서 노는 손오공이라고나 할까요. 손오공은 절대 부처님의 생각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 하는 법이지요.

이윽고 해찰을 끝냈는지 작은 아이는 큰 아이 쪽으로 걸어 옵니다. 저만큼 뒤떨어졌으니 뜀박질이라도 해서 앞서 가는 큰 아이를 따라 잡을 일이지만 작은 아이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 옵니다. 어쩌면 작은 아이가 결코 서두르지 않는 것은 큰 아이가 결코 자신을 떼어놓고 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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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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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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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이윽고 두 아이는 호숫가에 아무렇게나 매여져 있는 빈 배 앞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 두툼한 외투를 벗어서 빈 배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습니다. 겨우내 홀로 외로움을 타던 배는 아이들의 무례함을 기꺼운 마음으로 허락합니다.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물가에 놓인 통발을 열어 봅니다. 아마도 아이들은 물고기를 잡으려고 물속에다 통발을 놓아 두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붙입니다.

"이 동네 사니?"
"아니요, 시내 살아요."
"그렇구나.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왔니?"
"봄 방학이라, 외가에 놀러 왔어요."
"외가가 가까워서 좋겠구나. 그런데 통발로 물고기 잡는 것은 누가 가르쳐 주었니?"
"전에 할아버지랑 잡아 봤어요."

그들이 물 속에 담가놓은 통발 속에는 작은 물고기 몇 마리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조금도 서운한 빛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고기를 잡는 것이 목적인 어른이었다면 퍽이나 서운했겠지요.

어쩌면 그런 점에선 어른보다 아이들이 나은지도 모릅니다. 이 아이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과정을 즐길 줄 알지요. 이미 과정을 충분히 즐길 만큼 즐긴 아이들이기 때문에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서운해할 리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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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아이들은 이내 왔던 길을 되돌아가 버립니다. 잠시 아이들의 옷을 맡아두었던 배는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뒷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어디선가 들릴 듯 말듯 가냘픈 목소리로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얘들아, 같이 가~!"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아이들을 소리쳐 불렀을까요? 강가에 매여져 있는 빈 배일까요? 저 남쪽 어디선가 불어오던 봄바람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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