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말이 팍팍한 마음을 위로해주네

박완서와 이해인, 방혜자와 이인호의 <대화>

등록 2007.03.10 09:54수정 2007.03.1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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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대화> 겉표지

<대화> 겉표지 ⓒ 샘터

박완서와 이해인, 이인호와 방혜자. 그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소설, 시 분야에서 최고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박완서와 이해인만 해도 눈길을 끄는데 한국 최초의 여성대사 이인호나 예술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는 방혜자까지 모였다는 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다. 물론 그녀들의 글을 받아서 한권으로 모으는 방식이었다면 이건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 건 진부할 정도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하고 그것에 대해 대답을 하는, 책 제목 그대로 '대화'를 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기획을 위해 최근에 만난 사이라면 피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에 그치지만, 박완서와 이해인, 그리고 이인호와 방혜자처럼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이라면 자연스럽게 기대치를 높이게 된다. 대중이 모르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실제로 <대화>에서 그녀들이 말하는 내용은 어느 인터뷰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진솔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이 책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대화는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것이 나온다. 흔히 그녀들이 입을 열었다고 한다면, 그 분야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올 것 같은데, <대화>는 그렇지가 않다.

먼저 박완서와 이해인의 대화를 보면, 박완서는 남편과 아들을 먼저 보낼 때의 심정이나 세상에 대한 원망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상당히 용기 있는 일이다. 세상이 축제 때 즐거워하던 시절, 가족을 잃어 홀로 가슴 아파하던 그 심정을 다시 꺼내볼 수 있는 이가 누가 있을까? 더욱이 그런 때에 사람을 미워하고 세상을 원망하던 그 마음을 고백하는 것은 또 어떤가?

'난 지금도 올림픽이라면 몸이 떨리고 무서워요. 아주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평생을 함께한 남편을 잃고, 뒤이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을 잃었는데, 어떻게 된 게 세상은 환희에 들떠 있었어요. 어디로든 숨고 싶은데 정말 숨을 곳이 없더라고요. 지옥 같은 순간을 견디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지만 어딜 가든지, 누굴 만나든지, 온통 기쁘고 유쾌한 얼굴뿐이었어요.' - '박완서의 말' 중에서

그녀들이 솔직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로에 대한 믿음 때문일까? 아니면 의지? 신뢰? 그 어떤 말이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녀들은 서로에게 무엇이든지 물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박완서가 저 말을 꺼내게 된 것만 해도 그렇다. 일반 인터뷰라면 누가 저것에 대해 물을 수 있었을까? 묻는 이의 마음을 알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덕분에 <대화>에서는 소설가 박완서가 아니라, 어머니이자 여자인 박완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해인의 말에서는 수녀로서의 경건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좀 더 솔직한 말도 들을 수 있는데 <대화>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그것들은 하나같이 귀기울여 들을 것들이다. 개인과 개인, 그리고 그들이 모여 사는 이 사회 모두를 위해서 꼭 필요한 말인 것이다.


'저도 종교란 배타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고, 믿으면 천국에 간다든지, 저 자신은 예수님을 믿지만 그런 말 하는 걸 참 싫어해요. 안 믿으면 벌주고, 불지옥, 단정적인 말, 그걸 빌미로 한 믿음의 강요, 그건 정말 잘못된 거예요. 하느님의 사랑은 그 모든 걸 넘어서는 큰 사랑이거든요. 예수님의 말씀이 결코 협박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이해인의 말' 중에서

방혜자와 이인호의 대화에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그녀들이 박완서와 이해인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또한 분야가 분야인 만큼 이렇게 글을 통해 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인데 그만큼 반갑다. 그녀들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유학생활을 겪은 터라 그에 대한 이야기들은 지금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은 물론 세상이라는 곳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 사람들에게 귀한 충고가 된다.


'당시 우리문화에 대한 바탕이 없었기 때문에 문화적 충격이 더 컸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조선의 것이란 어수룩하고 치졸한 것이다"라고, 그렇게 일본사람들이 해석한 것을 듣고 자랐잖아요. 그런데 우리 문화가 그렇지 않거든요. 아주 정교하고 아름답고 훌륭한데 그걸 몰라서 받지 않아도 될 고통을 받았어요. 다른 나라의 예술이 더 훌륭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무조건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우리가 한국에서 대학 교육까지 받고 갔어도 우리 문화와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긍심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 '방혜자의 말' 중에서

그녀들의 말은 얼핏 보면 평범하다. 소설처럼 유려한 문장도 없고, 시처럼 아름다운 문장도 없다. 그런데 무슨 이유일까? 말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마치 할머니의 옛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다. 어린 사람들을 위한 그녀들의 말에 담긴 진실함 때문일까? 아니면 그 말에 담긴 애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까? 살벌한 말들 때문에 몸도 마음도 오그라드는 이때에, 따스함으로 마음을 위로해주는 <대화>의 힘이 귀하게 가다온다. 마음이 팍팍하다고 생각할수록, 얻을 수 있는 지혜는 클 것이다.

대화 - 삶의 여백에 담은 깊은 지혜의 울림

박완서.이해인.이인호.방혜자 지음,
샘터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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