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특별기획 드라마 <하얀 거탑>은 주인공 장준혁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iMBC
11일 막을 내린 <하얀 거탑>(MBC TV 특별기회 드라마)에서 외과 과장 장준혁(김명민 분)은 일반적인 주인공과는 달리 악역에 가까운 캐릭터였다. 오로지 자신의 성공과 명예만을 위해 때로는 비열한 거래와 음모를 꾸미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장준혁은, 예술적 재능을 위하여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까지 팔았던 파우스트의 현대적인 구현에 다름아니었다.
@BRI@성공가도를 달리던 장준혁은 의료사고로 인한 법정분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담관암이라는 병마까지 얻어 결국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권선징악의 통쾌함보다는, 권력의 허망함과 인생무상의 쓸쓸함을 자아내게 했다.
최근 드라마에서는 이처럼 전통적인 선악 구분의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 일종의 '반(反)영웅적' 캐릭터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무조건 선한 주인공에 반하는 트러블 메이커이거나 아무 이유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단순한 악역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인물의 사회적 배경이나 개인적 콤플렉스, 혹은 본의 아니게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환경적 요인들은 캐릭터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이런 캐릭터들이 악역으로서의 거부감보다 연민을 자아내는 이유는,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의 배경과 인간적 고뇌 때문이다. 오늘날 절대적인 정의와 불의의 구분은 날이 갈수록 모호해지고 대립구도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닌, 가치관의 차이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질투했던 살리에르나, <주몽>에서 주인공 주몽(송일국 분)에게 콤플렉스를 느끼는 대소,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정작 사랑에 있어서 강인욱(소지섭 분)을 질투하는 정재민(조인성 분) 같은 인물들은 모두 선과 악의 단정적인 구분이 불분명하고, 해석에 따라서 오히려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인물들이다.
악역에 비친 현대인들의 자화상
각박한 자본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현대인들은 저마다 알게 모르게 타인에 대한 경쟁의식과 피해심리, 수많은 개인적 상처와 콤플렉스들을 안고 살아간다. 항상 대의명분에 충실하고 완벽한 '모범생형' 주인공들과 달리, 속물성과 이중성, 인격적인 결함과 약점을 드러내고 있는 '상대적 악역'들에 더 공감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현대인들의 현실적 자화상에 좀 더 가까운 캐릭터들이기 때문이다.
병원을 배경으로 의사들의 권력투쟁과 흥망성쇠를 다룬 <하얀 거탑>에서 장준혁은 성공을 꿈꾸는 출세주의자이자 '정치적 인간'의 전형 같은 인물이었다. 위계질서와 서열주의가 강한 보수적인 조직사회에서 장준혁이 보여준 모습은 수단이 과격했을 뿐 본질적으로 생존을 위한 처세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준혁은 성공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이용할 줄 알았고, 강자 앞에서 '줄서기'나 협박, 음해 같은 비열한 권모술수도 마다지 않았다.
드라마 속 악역으로서 장준혁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우리 사회, 우리 주변에 실제로 장준혁 같은 인물들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처절한 생존게임의 와중에서 때로는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때로는 세상의 질서와 관행에 물들어가는 장준혁의 모습이야말로 현대인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조금씩 잠재되어있는 그림자인지도 모른다.
물론 드라마는 현실보다는 훨씬 관대하고 감상적인 세계다. 드라마 속 악역들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거나, 어떤 역경을 거쳤든지 간에 마지막에는 결국 처벌을 맞이한다. <하얀 거탑>의 장준혁이나 <의가형제>의 김수현(장동건 분), <발리...>의 정재민과 같이 주로 첨예하게 꼬인 갈등을 봉합하는 방식은 주인공의 죽음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불치병과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실제로도 그리 자주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는 막바지에 이르러 주인공의 죽음을 통해 모든 것이 봉합되는 감상주의적 결말로 마무리했지만 현실사회 속 수많은 장준혁 같은 인물들은 아직도 건재하며, 오늘도 사회는 끊임없이 제2, 제3의 장준혁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얀 거탑>의 인기원동력이었던 리얼리즘도, 한 인간과 권력의 인생무상을 다룬 휴머니즘 드라마이기 앞서, '정치적 인간'들을 육성해내는 냉혹한 사회구조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데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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