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는 반미파, 극좌는 반북파가 된다?

[取중眞담] 현기증나는 북미 접근... '이거 될지 모르겠는데…'

등록 2007.03.13 08:19수정 2007.03.13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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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조갑제 닷컴에 실린 정창인씨의 '부시 대통령의 배신'이라는 제목의 글

조갑제 닷컴에 실린 정창인씨의 '부시 대통령의 배신'이라는 제목의 글 ⓒ .

"이러다가 극우파들이 주한 미대사관 앞에서 반미 데모를 벌이고, 극좌파들이 인공기 태우며 반북 시위를 벌이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최근 북미 관계 급진전을 놓고 한 토론회에서 나온 말이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봤던 조지 부시 정권이 김정일 체제를 인정하고 수교하면 배신감에 치를 떤 극우파들이 반미 데모를 벌일지 모른다는 말이다.

@BRI@'한반도의 모든 문제는 미국 탓이다, 주한미군 철수만이 살 길'이라고 외쳐왔던 '반미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일부도 북한이 미국과 수교를 위해 남한 내 미군 주둔을 인정하면 반북주의자로 돌아설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선뜻 종잡기 어려운 우려'(?)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킬킬 웃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안은 그냥 웃고 넘길 문제는 아니다.

이런 우려는 보수 진영 쪽에서 일부 확인되기 시작했다. 지난 2월 26일 칼럼을 통해 "부시가 배신했다"고 비난했던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은 12일 '핵의 네거리에 남겨지는 한국'이라는 칼럼을 다시 썼다.

그는 "북한 핵에 사실상 굴복한 부시는 더 이상 '원칙'의 정치인이 아니다"라며 "미국에 있어 북한이 어제의 적대 국가가 아닌 것처럼 한국이 어제의 '친구'가 아닐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한의 독자적인 핵무기 보유도 제안했다. 김 고문은 "우리도 북핵에 대비한 대등한 안전장치를 갖는 것이 중요하며 핵에 대한 우리의 기존의 입장과 고정된 생각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며 "북의 핵을 용인하는 한, 미국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세계 어느 나라의 핵 프로그램도 저지할 명분이 없다"고 강조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핵무기 개발을 시도해 미국과 격하게 대립했고 이것이 그의 죽음의 원인이었다는 설까지 있다. 김 고문의 주장대로라면 한미 동맹은 이제 끝나야 한다.

정창인 친북반국가행위진상규명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쓴 '한반도에 몰아치는 태풍과 부시 대통령의 배신'이라는 글이 지난 9일 조갑제 닷컴에 실렸다.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부분이 관심을 끈다.


"마치 기독교인으로 인권을 신앙처럼 보호할 것처럼 보였던 부시 대통령도 지금은 핵문제 외에는 다른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부시 대통령은 우리들의 희망을 배신한 것이다. 북한 동포의 노예 같은 생활은 이제 더 이상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부시가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직후 탈북자를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만난 것은 순전히 쇼였던가?"

조갑제 닷컴은 정창인씨의 개인 글을 비중 있게 배치했다. 지난 5일 김동길 교수는 자신의 홈피(www.kimdonggill.com)에 '부시와 김정일은 한 편이 되고'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지난 8일 극우 잡지인 <미래한국>에는 ‘남북 합작에 미 부시정권 동조’라는 기사가 실렸다.

a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6일 뉴욕 소재 저팬 소사이어티에서 6자회담과 자신과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간의 첫 북미 관계정상화 실무그룹 회의에 관해 연설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6일 뉴욕 소재 저팬 소사이어티에서 6자회담과 자신과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간의 첫 북미 관계정상화 실무그룹 회의에 관해 연설하고 있다. ⓒ 연합뉴스

<조선> 김대중 고문 핵무장 주장

보수 인사 가운데서도 대체로 극우적이라고 평가받던 사람들의 주장이다. 아직 보수 인사 대부분은 북미 접근을 떨떠름하게 여기면서도 "미국과 북한이 설마~"하는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기대는 근본적으로 북한이 기존 핵무기와 핵시설을 완전히 폐기해야 미국은 수교를 할 것인데, 그럴 리가 없기 때문에 결국 북미 수교는 어렵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이런 기대가 무너질 때 상당수 보수 인사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성조기를 불태우는 전무후무한 광경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여담이지만 북미간 약속이 깨지는 것을 여러 번 봤던 기자는 솔직히 2·13 합의에 대해 크게 기대를 안했다. 그런데 2·13 합의에 대해 존 볼턴 전 유엔주재 미국 대사 등 네오콘들이 벌떼 같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이거 될지 모르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시가 '쇼'로 2·13 합의를 했다면 미 행정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네오콘들은 그냥 잠자코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오콘의 반발은 역설적으로 2·13 합의에 그만큼 부시의 진심이 담겨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국내 보수 인사들의 반발도 마찬가지다.)

믿었던 부시 대통령의 변절에 아노미 상태에 빠진 보수 인사들을 바라보면서 진보 진영 쪽에서는 다소 고소해하는 분위기도 보인다. 그러나 불쌍한 보수 진영 동포들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질 만한 여유가 진보 쪽에 앞으로 있을까?

미국은 북한과 수교를 할 경우 반드시 주한미군의 존재 인정을 요구할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의 공식입장과는 달리 주한미군의 존재를 인정할 것이라는 게 많은 진보 학자들의 예상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2000년 정상회담에서 통일 뒤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에 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의견을 같이했다고 전한 바 있다. 이미 지난 1991년 1월 20일 김용순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워싱턴에서 아놀드 캔터 미 국무부 차관을 만나 미군의 남한주둔을 용인하는 조건에서 미·북 수교를 요청했었다.

북한이 북미 수교를 전제로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인정한다면 반미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일부는 상당히 충격을 받을 것이다.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완성한 황장엽씨와 남한 주사파의 대부 김영환씨가 반북주의자로 돌아섰던 사례가 반복될 수 있다.

보수 인사 가운데는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요구를 절대 굽히지 않을 것이며(그래야 남한을 적화통일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 때문에 북미 수교협상은 깨질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도 북한이 주한미군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와는 거꾸로 미국이 북한과의 수교 협상 때 주한미군 계속 주둔을 고집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미국은 이미 1970년대 말 지미 카터 정권 때와 1990년대 초반 동아시아 전략구상(EASI)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를 시도했던 적이 있다.

이 경우에는 한미 정부 사이의 갈등은 별개로 치고 심각한 남남 갈등이 발생할 것이다.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북한이 미군을 철수시킨 뒤 남한을 공격할 것이라는 주장이 강하게 나올 것이고, 이는 다시 남북 대화에 대한 국민 여론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북미수교 되면 한국과 중국은 소외된다?

a 6일 뉴욕 북미관계정상화 회담뒤 기자회견하는 김계관 북한외무성부상

6일 뉴욕 북미관계정상화 회담뒤 기자회견하는 김계관 북한외무성부상 ⓒ 연합뉴스

북미 수교 뒤 남한에 주둔하는 주한미군은 곧 중국을 겨냥하는 군대가 된다. 중국으로서는 북핵이라는 불은 급한 대로 껐는데 다른데서 화재가 발생한 꼴이 될 수가 있다.

북한과 미국의 직접 수교는 그만큼 동북아에서 중국의 외교적 역할의 축소를 의미한다. 지난 7일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서울정책재단 초청 토론회에서 "북미 관계가 급진전되면 한국이 소외될 수 있다"고 우려했는데 이는 중국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지난 6일(현지시각)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1차 실무회의가 끝난 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북한이 핵 문제에 대한 생각을 바꾼 것 같은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우리가 중국과 공조한 것이 매우 주효했다"고 말했다.

사실을 말한 것일 수 있지만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을 제쳐두고 북한과 미국이 척척 일을 진행하는데 대한 베이징의 우려를 무마하기 위한 외교적 발언으로도 볼 수 있다.

지난 9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북미 관계정상화를 위한 1차 실무회담을 위해 뉴욕을 방문했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미국의 북한 전문가들에게 "중국은 우리를 이용만 하려 한다", "중국은 우리에게 큰 영향력이 없다. 미국은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에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 정부가 중국 정부를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다. 중국 인터넷상에는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가 풀리면 혈맹인 중국을 '팽'하고 남한 및 미국 정부와 놀아날 것이라는 우려 섞인 글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북미 수교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은 아주 근본적인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줄 수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수립된 뒤 그 자리에 멈춰버리면 전쟁 위협은 줄어들지만 영구 분단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특히 북한 정권이 남북통일보다는 체제 유지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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