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섬뜩한 미스터리

온다 리쿠의 데뷔작 <여섯 번째 사요코>

등록 2007.03.15 10:09수정 2007.03.15 11:19
0
원고료로 응원
a 책 표지

책 표지 ⓒ .

일본의 한 지방고등학교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고3이 된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는 붉은 꽃다발과 열쇠를 받아 '사요코'가 되어야 한다. 남자일수도 여자일수도 있는 그 사람은 일단 사요코가 되면 사요코의 정체에 걸맞은 '그녀'의 의식을 치러야 한다. 그 의식을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 그해 학생들의 길흉이 점지된다. 고3학생들인 그들에게 길흉을 가늠하는 척도는 대입 성공률이거나 혹은 다른 무엇인데….

노스탤지어의 마술사라 평가받는 온다 리쿠의 데뷔작으로 지난 1991년에 출간된 <여섯 번째 사요코>가 소재로 삼은 이런 류의 괴담은 한국독자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진지는 잘 모르겠고 일단 한국과 일본의 경우, 학교는 학교라는 공간만이 갖는 어떤 특별한 분위기가 있다.


일반인들에게야 세파에 좀 덜 시달려도 괜찮은 일종의 보호구역으로 여겨지겠지만 학생들 입장에서는 졸업하기 전까지는 좋으나 싫으나 발목 묶여 있어야 하는 곳이 학교다. 말하자면 보호감호소쯤 되는, 명목이야 어떻든 학교는 결국 자유롭지 않은 닫힌 공간이다. 자유롭지 않다는 건 그만큼 불안을 증폭시키기 마련, 폐쇄적인 공간이 주는 두려움과 공포야말로 학교를 배경으로 한 괴담들이 무성한 이유일 것이다.

재작년 최익환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목소리'까지 해서 4편이나 이어졌던 여고괴담을 보더라도 그렇고 우리나라 웬만한 역사를 지닌 학교라면 무시무시하거나 잔인하거나 기괴한 이야기 하나쯤은 전해 내려온다.

그런데 그게 다 학교라는 공간이 그만큼 무시무시하고 잔인하고 기괴한 배경이 될 만해서였던 거다. 학교괴담을 소재로 한 이 책을 읽고나니 새삼스레 드는 확신이다. 사실 우리가 학교라는 제도랄까 체제를 너무 당연하게 여겨 그렇지 고만고만한 또래 아이들이 취향 능력 형편 장래희망 등등에서 공통점이 있건 없건 일정 시간 꼼짝없이 한곳에 모여 죽치고 있어야 하는 현실은 대단히 웃기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시추에이션 아닌가.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사건

@BRI@<여섯 번째 사요코>는 바로 이 웃기고 황당하고 기이한 상황이 완벽하게 세팅된 학교를 배경으로 어른도 아이도 아닌 불안정한 상태의 청소년들을 등장시켜 무시무시하고 잔인하고 기괴한 사건을 겪게 하는 이야기다.


청소년층은 물론 지난 학창시절을 기억하는 이들 누구라도 솔깃해질 수밖에 없는 소재이니만큼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소설은 새 학기 첫날 지나치다싶게 아름답고 지독히 매력적인, 이름조차 '사요코'인 여고생이 전학하는 걸로 시작한다.

3년마다 한번씩 일종의 연극 형식으로 행사가 이루어지는 '사요코' 전설에서 올해는 여섯 번째 사요코가 탄생하는 해. 졸업식날 작년의 사요코에 의해 지명된 올해의 사요코는 자신이 '사요코'임을 아무도 눈치재지 못하도록 자기반 교실에 빨간 꽃을 꽂아놓는 걸로 자기 임무, 곧 사요코 게임을 완수하겠다는 의사를 공표하게 된다.


그런데 올해의 게임을 막 시작하려는 사요코 앞에 자신이 들고 있어야 할 꽃병을 들고 있는 한 소녀가 나타난다. 그 소녀가 그날 전학한 신비할 정도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요코인지 전설 속에 내려오는 미지의 '그녀'인지는 소설 막바지까지 미스터리로 남겨진다.

한편 사요코와 함께 나름대로 귀엽고 순수하고 명석한 네 명의 친구가 신학기인 봄부터 대학입시가 끝나는 이듬해 겨울까지 사요코 전설을 축으로 펼쳐가는 학교생활은 괴담의 흥미와는 별도로 청소년소설의 한 전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봄부터 여름에 걸쳐 이래저래 얽힌 사건들은 축제를 준비하는 분위기속에서 하나로 모아지고, 전교생이 참여하는 연극에서 사요코 전설은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를 배경음악으로, 1인극의 대사를 전교생이 각자 자기에게 할당된 짧은 문장으로 돌아가며 읽는 장면은 압권이다. 교실 뒷벽에 걸린 오래된 그림처럼, 누구나 한번쯤 꾸었음직한 악몽처럼 그려진 이 장면은 지금 당장이라도 눈앞에 떠올릴 수 있을 만치 생생하고 인상적이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까?" "학교란 무엇을 위해 있는 걸까요." "물론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하지만 공부만 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여기가 아니더라도 가능합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시험 삼아 저 교실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수많은 책상과 의자" "하나같이 똑같은 네모난 방" "이 방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건 그릇입니다" "무엇을 담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인간입니다."

여섯 번째 사요코 이야기는 열쇠를 간수해 둔 교내 동아리방이 불타면서 마침내 막을 내리지만, 소설의 미스터리는 해결된 게 없다. 소설 첫 장면에서 ‘그래, 여섯 번째 사요코는 나야’라는 목소리로 등장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던 ‘그녀’의 정체도 밝혀지지 않는다. 이 작품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들 전반에 걸쳐 환상적이고 몽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로 밀고가는 작가의 성향 탓일 텐데, 그래서인가 사요코의 전설이 주는 여운은 가볍지 않다.

네 명의 주인공들이 각자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찬란한 청춘의 봄을 맞이하는 걸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을 읽고나서도 일말의 불안이랄까, 공포의 매듭 하나가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계속되는 전설 속에서 '그들은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아직 보지 못한 '그녀'를 기다리는 게 아득한 미래를 넘겨다보며 닫힌 공간에 발목 잡혀있는 청소년뿐이겠는가도 싶고….

여섯 번째 사요코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노블마인, 2017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