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기사의 '힘' 보여준 <한겨레> FTA '분석'

[백병규의 미디어워치] 한꼭지 조간신문 리뷰

등록 2007.03.15 14:01수정 2007.07.08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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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치부 기자들이 독일이나 유럽에 가면 아마 기사를 쓸 수 없을 것이다."

지난해 연말 '언론광장' 송년 토론회에서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한 말이다. 한국 언론의 정치 기사라는 것이 거의 대부분 정치권의 '대변인'이 돼 있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정치라는 것이 국가라는 사회 공동체의 주요한 쟁점들을 드러내, 이해집단의 갈등이나 이해의 조정, 혹은 대립(정치과정)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일궈내는 과정이라고 할 때 한국 언론은 거의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신랄한 비판이기도 했다.

<한겨레>의 오늘(15일) 1면 머리기사 "한-미FTA, 대선판도 흔든다"(성한용 선임기자)는 그런 점에서 보기 드물게 정치기사의 새로운 유형을 보여 준 작품이라 할 만하다.

성한용 선임기자는 한미FTA 체결 일정과 대선 일정, 그리고 한미FTA에 대한 여론의 동향 분석이라는 입체적 분석을 통해 한미FTA 문제가 올해 대선 판도를 뒤흔들 수 있는 파급력을 가진 대선 쟁점이 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성 기자는 그 첫째 요인으로 한미FTA 체결 및 비준 일정을 들었다. 정부가 설령 한미FTA를 타결짓는다고 하더라도 국회 비준 동의에는 특별한 시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국내 사정상 국회에서 협정 체결 직후 서둘러 비준 동의를 하기는 어렵다"고 내다 봤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정치지형과 선거 구도를 재편할 수도 있는 초대형 정치 쟁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왜 그런가?

한나라당 유력 대선 주자들과 범여권을 포함한 타당 주자들과 확연하게 입장이 갈리는 쟁점이기 때문이다. 대치 전선이 분명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한나라당의 유력주자인 이명박·박근혜·손학규 등 이른바 '빅3'는 찬성, 나머지 주자들은 반대다." 반면 정동영·김근태·천정배는 반대다. "졸속 추진을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사실상 반대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고진화·원희룡 의원은 "개방엔 찬성이지만, 졸속 추진은 반대"다. 성한용 기자의 분류에 따르자면 역시 '반대' 쪽이다. 민주노동당의 권영길·노회찬·심상정 의원 역시 반대며 여권의 잠재후보인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또한 "개방 확대만이 절대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인 만큼 이 또한 반대다.


정치 기사의 '힘'은 '분석'에서 나온다

성 기자의 기사가 이 정도 수준에서 끝났다면 사실 별로 주목할 기사가 못된다. 유력 대선 주자들의 찬반 입장 정도를 정리한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의 기사가 빛을 발하는 것은 이를 여론조사 결과와 연계해 그 정치적 파급력을 '해석'해 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2월 21일 전국의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 지역별·세대별·지지후보별 찬반 경향이 다르게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찬성 48.3%, 반대 44.8%로 찬반 차이는 오차범위 안에 있다. 그런 가운데 지역별로는 서울, 인천·경기, 대구·경북, 부산·울산·경남은 찬성이 반대 보다 10% 포인트 안팎으로 많았다. 반면 대전·충남, 광주·전라는 반대가 찬성보다 많게는 37% 포인트나 많았다. 동서구분이 확연히 드러난다.

나이별로는 40대, 50대에서는 찬성이, 20·30대에서는 반대가 더 많았다. 젊은 층으로 갈수록 반대가 더 많았고, 나이든 층일수록 찬성이 더 많은 경향성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학력이 높을수록 찬성의견이 많고(낮을수록 반대가 많다), 소득별로도 의미 있는 차이가 드러났다(저소득층은 '반대', 고소득층은 '찬성'이 많다).

결론적으로 "대선에서 '결정적 변수'라고 할 지역·세대 등에 따라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의견이 갈리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겨레>의 관련 기사 "'FTA급행' 국회서 '일단 멈춤'"(황준범 기자)은 이 같은 분석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설령 정부가 한-미FTA를 타결짓는다고 하더라도 "협정에 대한 각 정당의 의견이 다르고, 당내에서도 견해차가 커서, 실제 처리(국회비준)까지는 큰 진통이 예상된다. 특히 12월 대선과 내년 4월 총선은 사정을 더 복잡하게 만들 것"으로 전망했다.

그같은 전망의 근거는 여야 정치권 내부 사정이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데 있다. 정치권의 전반적 기류가 "협상 내용이 한국 쪽에 별 실익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치권에 협정 반대 기류가 강해지고 있"는 게 가장 큰 변수다. 게다가 찬성 의견을 밝혀온 한나라당 도 "농촌 지역 의원들은 반대의견을 내고 있"어 전재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마저 "큰 원칙은 찬성이지만 의원들 의견이 갈려서 강제적 당론을 채택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니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나 한-아세안 자유무역협정처럼 비준 동의안이 국회에서 오래도록 묵다가 18대 국회(2008년 5월말 개회)로 넘어"가거나 "정부가 비준동의안의 의회 제출 자체를 내년 이후로 넘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선 막바지 국면에서 '치열한 쟁점'이 될 정치적 여건이 농후하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한겨레>의 오늘 이 기사들은 한-미FTA협상과 관련한 사회적 관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극단적으로 찬반양론으로 단순화시키거나, 혹은 지나치게 복잡한 내용들로 독자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던 쟁점을 대선국면에서 그 정치적 함수 관계를 쉽고 설득력 있게 풀어냄으로써 독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큰 틀에서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대선 주자들과 그들의 참모 역시 한미FTA협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시 살펴보도록 하는 계기가 됐을 법도 하다.

정치 기사의 '힘'은 바로 이런 '분석'에서 나올 수 있다. 대선 주자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중계하는 데 쏟고 있는 씨잘 데 없는 정력을 이런 데 돌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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