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의 부산근대역사관.김대갑
한미관계를 근본적으로 뒤돌아보는 시발점, 부미방 사건
1945년 2차 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이 땅에 해방자로 처음 등장했다. 세계 평화의 수호자이자 자유민주주의의 보루였다. 적어도 광주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국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군 작전권을 상납해도, 수천만 평의 땅을 미군이 무상으로 사용해도, 우리 '누이'들이 미군들의 성 노리개로 전락해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매트릭스에 편안하게 묻혀 살면 그만이었다.
부미방 사건은 이 매트릭스에 반기를 든 최초의 사건이자 남한에서 일어난 공개적인 반미투쟁이었다. 당시 사건 현장에 뿌려진 유인물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부미방 사건이 던져준 첫 번째 충격은 한미관계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는 것이다. 부미방 사건의 원류는 2년 전에 일어난 광주항쟁이었다. 당시 광주는 미국이 광주시민을 지원하기 위해 부산에 항공모함을 파견했다고 착각할 정도로 '친미'적이었다.
그러나 광주가 무참하게 짓밟히면서 이런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군 작전권을 행사하는 미국의 동의가 없으면 신군부는 결코 군대를 광주로 출동시키지 못한다. 이런 연유로 광주는 미국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광주의 인식 변화는 곧바로 반미행위로 이어졌다. 1980년 12월 9일 밤에 광주 미 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 투쟁은 체계적인 반미투쟁은 아니었다. 당시 사건 관련자들은 올바른 한미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마음에서 방화했다고 고백했다.
반면에 부미방 사건은 처음부터 '반미'를 선명하게 내걸었다. 부미방 사건은 이후 이 땅에 봇물처럼 터진 반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1982년 4월에는 강원대생들의 성조기 소각 사건이 벌어졌고, 1983년 9월에는 대구 미 문화원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1985년 4월에는 부산 미 문화원 투석사건이 발생했으며, 1985년 5월에는 서울 미 문화원이 73명의 대학생에 의해 점거되는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그러나 1985년까지 반미운동은 자연발생적인 성격이 짙었다.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틀이 완전히 정립되지 못한 반미운동이었다. 이런 반미운동은 1985년에 등장한 사회구성체론에 힘입어 체계적인 사상으로 정립돼 갔다.
1985년 하반기에는 '반제민중민주주의혁명론(AIPDR)'이 등장했으며, 1986년에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이 등장했다. 그리고 1986년 공개적으로 등장한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일명 자민투)에 의해 반미운동은 하나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결국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부미방 사건은 한국 현대사를 새롭게 쓰게 만든 반미운동의 시발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