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개XX'가 아니에요, 사람이에요"

[현장]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촉구 기자회견

등록 2007.03.21 15:15수정 2007.03.2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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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보고 '개XX'라고 하는데, 우리는 개 아니에요. 한국 사람 같은 사람이에요."(보트르존·우즈베키스탄)
"이번에 중국 사람들 9명하고 다른 나라 사람 한 명이 죽었는데, 마음이 아파요. 이주노동자들, 한국 와서 너무 힘들어요."(슈몬·방글라데시)


대부분 알아듣기 어려운 이주노동자들의 발언에서 2~3문장 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이들이 평소 자주 들었거나 늘상 마음 속에서 되뇌었던 표현이기에 말하기에도 익숙한 법인 모양이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이하 외노협)가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30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은 미등록 상태로 '범죄자' 취급을 받는 자신들의 처지를 토로했다.

이들은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전면 합법화를 촉구하며 전날부터 이 곳에서 농성을 진행 중이다. 또한 지난달 11일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가 중국 동포의 방화로 매듭지어지는 데 대해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외국인보호소 개선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a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가 21일 연 기자회견에 참석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합법화할 것을 촉구하는 문구를 한국어와 모국어로 직접 써서 들고 있었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가 21일 연 기자회견에 참석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합법화할 것을 촉구하는 문구를 한국어와 모국어로 직접 써서 들고 있었다. ⓒ 오마이뉴스 이민정

"아파도 열심히 일했는데... 이 나라에서 살 수가 없나보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성명서가 없이 진행됐다. 대신 참석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소개하면서 전면 합법화를 호소했다.

보트르존(우즈베키스탄)씨는 미리 배포한 글에서 "2003년 6월 한국에 와서 자동차·컴퓨터·에어컨 부품 공장에서 열심히 일했다"며 "일하다가 허리와 다리가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한다, 비자가 끝나 보험카드가 없어서 병원비가 너무 많이 나온다"고 토로했다.


한국말이 서툰 그는 "일하다가 한국 사람들이 '개XX'같은 나쁜 말을 많이 했다, 우리는 개가 아니다, 우리도 사람이다"며 한국인 동료들의 배려를 당부했다.

그는 "불법체류자는 범죄자가 아니다"며 "한국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우즈베키스탄에는 일자리가 없어서 가난하다"며 "한국처럼 잘 사는 나라가 되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모민(방글라데시)씨는 전날 '대통령께 드리는 글'을 직접 써서 낭독했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잘 살아보려고, 가족들에게 잘해주기 위해 많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쉬는 날에도 일했다"며 "졸려도 3∼4시간 잔업을 했는데, 이 나라에서는 살 수가 없나 보다"고 말했다.

이어 "4500만 한국 사람 안에 이주노동자들이 어울릴 수는 없는 것이냐"며 "제가 본 한국의 대통령들은 한국을 잘 사는 나라로 만들고, 북한과 악수해서 노벨평화상도 받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비자를 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냐"며 "대통령이 만든 법으로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a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는 21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어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에 대한 정부의 대책과 함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신분을 전면 합법화해줄 것을 촉구했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는 21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어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에 대한 정부의 대책과 함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신분을 전면 합법화해줄 것을 촉구했다. ⓒ 오마이뉴스 이민정

"해결된 것은 없는데, 여수 참사가 잊혀지고 있다"

우삼열 외노협 사무처장은 "여수 참사가 잊혀지고 있지만 해결된 것은 없다"며 "정부가 유가족과 함께 피해자 보상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지만 지지부진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번 사건으로 인한 비극적 죽음에 대해 정부가 명확한 책임을 져야 한다"며 "이주노동자에 대한 강제 추방을 중단하는 등 합리적 대책을 내놓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김봉구 외노협 공동대표는 "노동부와 법무부 등의 정책에도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속출하는 것은 정부 정책이 잘못됐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며 "숙련된 이주노동자를 미등록 상태로 쫓아내서 심리적 압박을 받게 하기보다 전면 합법화로 떳떳하게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주노동자 정책 돌아보는 계기 돼야"

유엔 이주자인권 특별보고관이 국내 이주노동자의 인권 실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가운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회장 백승헌·이하 민변)이 정부를 향해 이주노동자 정책의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민변은 21일 발표한 논평에서 "유엔 인권이사회 특별보고관의 이번 보고서는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상세한 조사를 거쳐 나온 결론"이라며 "이를 계기로 한국의 이주노동자 정책을 돌아보고 한 단계 선진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정부를 향해 "여수 화재가 단순한 사고로 인한 불행한 결과가 아닌 무분별한 단속과 그릇된 보호소 '구금' 위주의 정책 때문이라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며 "피해자 유족에 대한 배상 과정에서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결과를 낳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정부를 향해 유엔 특별보고관의 권고에 따라 이주노동자 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고, 이주노동자의 권리 협약을 비준해 줄 것을 촉구했다.

지난 20일 제네바 유엔 유럽본부에서 열린 '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의 인권-한국과 인도네시아 사례'를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여수 참사 등 국내 이주노동자의 인권 실태에 대해 집중 조명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실태 조사를 위해 지난해 방한했던 부스타만테 보고관은 "여수 화재로 10명이 사망하고 화재 당시 55명의 이주노동자가 구금 상태에 있었다"며 "이 사건이 한국이 국제기준에 따라 이주노동자의 상황을 점검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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