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에 동백만 유명하던가요?

선운사를 병풍처럼 감싼 선운산

등록 2007.03.24 15:09수정 2007.03.24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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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차밭과 대밭이 어우러진 선운산 들머리

차밭과 대밭이 어우러진 선운산 들머리 ⓒ 김선호

두 아이가 여덟 살, 여섯 살 적에 그 어린 아이들 손을 잡고 선운사를 찾았을 때, 여름이어서 그 유명한 선운사 뒷마당의 동백꽃을 보지 못했다. 꽃은 지고 동그란 열매만 달려 있었다.

선운사 경내로 진입하기까지 선운계곡에 가지를 드리운 고목들이 그림 같은 풍경을 실컷 보았으니 그걸로 되었다 했지만, 그래도 못내 아쉬워 도솔암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아장거리며 걷는 아이들을 앞세우고 비 온 뒤 질퍽거리는 길을 걸어 도솔암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계곡물이 분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여울목에선 물길을 지켜보느라 지체되고, 길섶에 핀 들꽃을 들여다보느라 늑장을 부리다 오늘 안으로 가긴 갈 것인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때마다 어디선가 보라색 부전나비가 한 무리 나타나 길을 인도하듯 눈앞에서 군무를 추어 보였다. 지체하던 아이들은 나비를 잡으러 앞으로 달려나가곤 했다.

a 선운산 석상암에서 만난 동백꽃

선운산 석상암에서 만난 동백꽃 ⓒ 김선호

어슴프레한 안개에 싸인 도솔암 가는 길은 신비로웠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길을 안내하던 부전나비의 군무는 그 신비를 더했다. 그날 그 여름의 도솔암 가는 길은 그렇게 신비롭고도 먼 길이었다.

얼마 만인가, 다시 선운사를 찾았다. 올해는 기후 온난화의 영향으로 동백꽃이 일찍 필 것이란 예고에 기대를 품고서.

후배의 결혼식이 전북의 한 작은 도시에서 있었다.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젊은 커플을 지켜보는 일이 감동스러웠다. 진심을 다해 행복한 앞날을 축복해주고 한시간여를 다시 남쪽으로 달려 고창의 선운사에 도착했을 때가 오후 3시였다.

등산복을 입거나 간단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선운사 들머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등산복을 입은 이들은 선운산 등반에 나섰던 이들일 게다. 평상복은 아마도 동백꽃 보러 선운사에 다녀오는 이들이 아닐까. 우리는 그제서야 아무도 오르지 않는 텅 빈 산을 오를 예정이었다.


a 선운산 산능선에서 보이는 서해바다와 변산반도

선운산 산능선에서 보이는 서해바다와 변산반도 ⓒ 김선호

결혼식 참석 차 내려왔지만 집에서부터 꽤 먼길이었기에 늦은 산행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선운산의 낙조대에서 '해넘이'를 만나기에는 적당한 시간이 될 것이다. 선운사(336m)로 진입하면서 만나게 되는 왼편의 계곡가에 저마다 세월의 옹이를 이고 살아가는 고목들의 행렬은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아직은 이른지 나무등걸에 푸른 잎 한 장 달려 있지 않았지만, 그저 나무등걸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을 보며 선운사를 향해 걷다 선운사에 당도해서는 옆길로 들어섰다. 선운산을 올라 낙조대에서 저녁해를 보고 도솔암을 거쳐 내려오다 선운사 동백꽃을 볼 셈이었다.


선운산 등산로 초입은 야생차 밭에서 시작되었다. 산자락 아래 아늑하게 펼쳐진 분지에 작은 녹차밭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밭 가장자리엔 사철 푸르게 서 있었을 대나무밭이 싱그러웠다.

a 흙산에서 어느순간 바위산의 면모로 바뀌는 선운산

흙산에서 어느순간 바위산의 면모로 바뀌는 선운산 ⓒ 김선호

선운사의 숲을 이루는 나무들의 종류가 참으로 다양하다. 아마도 남도의 따뜻한 햇볕 때문이 아닐까. 선운사 동백꽃이 아니라 선운산의 동백꽃을 만난 건 산을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석상암'이라는 작은 암자 앞을 지날 때였다. 굉장한 고목으로 자란 동백나무였다.

이른 봄을 만나 도톰한 질감이 느껴지는 빨간 동백 꽃송이가 윤기 나는 푸른 잎새 사이에서 숨바꼭질하듯 피어나 있었다. 그곳에서 동백을 보았던 건 운이 좋았다. 나중에 산을 내려와 선운사에 도착해 보니 캄캄한 밤이었고 선운사 뒷마당 동백꽃도 어둠에 잠겨 있어서 제대로 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400미터 남짓의 선운산의 언덕 같은 둥근 봉우리를 많이 걸어 보고 싶어 가장 긴 코스를 택하다 보니 도솔산에서 시작해 도솔암까지다. 선운산은 대체로 완만한 능선길이고 가장 긴 코스라야 3시간에서 4시간 남짓 코스여서 등산 초보자들도 누구나 오르기 쉬운 산이 아닌가 싶다. 전형적인 흙산이고 봉우리라야 조금 높은 언덕을 넘는 기분이다.

a 도솔계곡이 이루어 놓은 협곡의 장관

도솔계곡이 이루어 놓은 협곡의 장관 ⓒ 김선호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 기암괴석이 특별해 보이는 까닭이다. 드라마 <대장금>의 최상궁이 자살한 장소라서 유명세를 탄 낙조대를 비롯, 병풍바위, 투구바위와 배맨바위 등, 선운산의 뼈대를 이루는 굵직한 바위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조망은 어찌나 시원하게 펼쳐지던지. 특히 견치봉 넘어 가는 길목에서 서해바다쪽을 조망하는 코스가 장관이었다. 손에 잡힐 듯 눈앞에 펼쳐진 변산반도와 그 주변의 서해바다가 저물어 가는 햇살을 받으며 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저녁햇살에 물드는 서해바다를 보자니 마음이 급해졌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낙조대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낙조대가 가까워질수록 산세에 힘이 붙는 느낌이다.

a 때맞춰 낙조대에 오르니 해가 진다.

때맞춰 낙조대에 오르니 해가 진다. ⓒ 김선호

지금까지 걸어온 선운산 능선길이 여성적이라면 견치봉을 넘어 낙조대를 향하면서 본 산은 매우 남성적인 느낌을 준다. 아니나 다를까, 도솔암이 있음직한 바위산은 마주보는 바위산과 거대한 협곡을 이루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부드러운 흙산의 이미지가 180도 바뀌는 순간이다.

하루를 마감하는 해가 서해바다 끄트머리에 달려 있을 즈음에 낙조대에 도착했다. 해넘이가 시작되려는 듯 산봉우리에 우뚝 선 낙조대가 붉게 물들고 있다. '해 뜨는 동해에서 와서 해 지는 서해'에 서 있는 감회가 남다르다.

지면서 자신의 존재를 불태우는 태양 아래 바다와 산은 경계를 잃고 하나의 빛으로 통합되는 장관을 보여주었다. 그때 문득 귀를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지는 때를 맞춰 절에서 울리는 범종소리다. 낙조대에서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저 아래 도솔암이 있으니 아마도 그곳에서 울리는 범종소릴 게다.

a 저녁빛으로 보는 마애석불은 또다른 감상을 불러온다

저녁빛으로 보는 마애석불은 또다른 감상을 불러온다 ⓒ 김선호

서해바다로 해는 지고 산을 혼연히 떠돌며 귓가에 와 닿는 종소리가 들리는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해는 유난히 붉고도 눈부시다. 이것은 도대체 지상의 풍경인가, 천상의 것인가 헷갈린다. 지는 해는 붉은 기운을 산 위에, 바다 위에 뿌리고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도 붉은 빛으로 물들어 버렸다.

수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뒤로하고 낙조대와 이어진 천마봉을 거쳐 도솔암으로 하산이다. 사위는 조금씩 어두워가고 시시각각으로 하늘빛도 연보라빛에서 남빛을 띠어간다. 희미한 저녁빛으로 바라보는 거대한 '마애석불'도 색다르다.

이번엔 깃대를 꽂았다는 부처님 머리맡의 세 개의 구멍에서부터 정교하게 다듬은 계단석의 연꽃무늬까지 6m나 된다는 바위에 새긴 부처님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도솔암을 지키는 개가 늦은 하산을 서두르는 등산객을 향하여 오래 짖어댔다. 그 부르짖음을 '조심해서 내려가라'는 인사로 알고 점점 어두워지는 산길을 걸어 선운사에 도
착해 보니 캄캄한 밤중.

걱정이었던 도솔암에서 선운사까지의 거리는 예전만큼 그리 길지 않았다. 입구를 막아놓은 진흥굴도 들여다보고 어둠 속에서도 홀로 꼿꼿한 천연기념물 장사송도 구경하며 선운사에 도착해보니 40여분이 소모되었다.

a 어둠속에서 만난 선운사 동백꽃. 올해는 온난화 현상으로 일찍 꽃이 피었다

어둠속에서 만난 선운사 동백꽃. 올해는 온난화 현상으로 일찍 꽃이 피었다 ⓒ 김선호

이미 사위는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선운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스님의 독경소리 은은한 선운사 경내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선운사 동백숲 앞에 섰다. 가로등에 비춰본 동백나무에 벌써 핀 꽃들이 화사하다. 환한 햇살로 보았으면 더욱 화려했겠지만 등불에 비춰 본 동백꽃의 은은한 아름다움도 괜찮다.

비록 어둠 속이었지만 선운사 동백꽃까지 보고자 생각했던 것들 다 보고 나니 그제서야 피로감이 몰려온다. 붉은 동백꽃처럼 감미롭고 나른한.

덧붙이는 글 | 선운사-석상암-마이재-도솔산(수리봉)-견치산(개이빨산)-소리재-용문굴-낙조대-천마봉-도솔암-선운사로 잡은 등산 코스로 약 4시간 소요되었다.
천연기념물 제 184호로 지정된 선운사 동백꽃은 4월에 가서야 꽃이 핀다고 알려졌지만 올해는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지난주 (3월 18일)에 이미 꽃이 피어 있었다. 선운사 동백을 보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선운사-석상암-마이재-도솔산(수리봉)-견치산(개이빨산)-소리재-용문굴-낙조대-천마봉-도솔암-선운사로 잡은 등산 코스로 약 4시간 소요되었다.
천연기념물 제 184호로 지정된 선운사 동백꽃은 4월에 가서야 꽃이 핀다고 알려졌지만 올해는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지난주 (3월 18일)에 이미 꽃이 피어 있었다. 선운사 동백을 보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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