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바람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내가 딱 그래요"

한글교실 <금파은빛교실> 수료식에서 만난 할머니들

등록 2007.03.26 11:19수정 2007.03.2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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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김입분 할머니와 할머니의 수료식을 축하 하러 온 딸 유순희씨.

김입분 할머니와 할머니의 수료식을 축하 하러 온 딸 유순희씨. ⓒ 김정혜

<금파은빛교실>의 수료식이 열리는 금파 교회 앞마당이 사람들의 잰 발걸음으로 매우 분주하다. <금파은빛교실>은 김포시 양촌리에 위치한 금파교회가 운영하는 할머니들의 한글 교실이다.


2005년 4월 13일 오전 11시. 네 분의 할머니를 모시고 첫 수업을 시작한 지 벌써 2년. 그 네 분의 할머니가 뜻 깊은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다. 네 분 할머니들의 뒤를 이어 열두 분 할머니들의 입학식도 함께 치렀다.

오후 2시. 색색의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할머니들이 한 분 한 분 오신다. 그 모습이 봄 햇살만큼이나 화사하다. 주름진 얼굴에서 피어나는 할머니들의 웃음꽃은 어느 봄꽃보다 곱다. 지나는 봄바람에 할머니들의 수다가 섞여 든다. 듣기 좋은 꽃노래보다 더 흥겨운 할머니들의 수다. 시샘 많은 봄바람도 잠시 숨을 죽이고 그 수다 속으로 빠져드는 듯싶다.

"손자 손녀들이 멀리 캐나다에 살아요. 그 손자 손녀들이 보낸 편지를 받을 때면 무척 속이 상했어요. 답장은 고사하고 읽지도 못하니 그저 손자 손녀들 손때 묻은 그 편지를 이리저리 만져 보고 얼굴에 대보고 가슴에 품어 보고… 한이 맺혔어요. 편지 잘 받았다고, 이 할미도 하늘만큼 땅만큼 내 강아지들이 보고 싶다고 구구절절 써서 보내고 싶은데 그걸 못하니…. 그런데 이젠 아니에요. 내가 먼저 손자 손녀에게 편지 보내요. 요즘요? 속이 후련하죠."

올해 일흔 셋의 김입분 할머니. 촉촉이 젖은 눈가로 끝내 이슬이 맺힌다. 아마도 벅찬 감격 때문이리라. 70평생, 글을 쓰는 건 고사하고 읽기조차 못했으니 그 답답함이야 말해 무엇 할까. 고지서가 와도 무슨 내용인지 몰라 일일이 이웃의 도움을 받을 때마다, 손자 손녀들의 편지를 가슴으로만 품어야 할 때마다 부끄러움에 앞서 그리 한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a 올해 일흔 넷의 김재례 할머니. 서툰 영어 발음이지만, 이만큼이라도 말 하는 것이 어디냐며 환하게 웃으셨다.

올해 일흔 넷의 김재례 할머니. 서툰 영어 발음이지만, 이만큼이라도 말 하는 것이 어디냐며 환하게 웃으셨다. ⓒ 김정혜

"헬로우 에브리 완(Hallo everyone)! 굿 에프터눈(Good afternoon)? 나이스 투 미츄(nice to meet you) 마이 네임 이즈 김재례(My name is Kim Je-Rea).


제가 은빛 교실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딸자식 때문이었습니다. 딸아이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거든요. 딸자식이 자꾸 오라고 해요. 물론 저도 딸자식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요. 그래서 언제 한 번 미국에 갈까 해요.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때를 대비해서 영어를 배우게 됐어요."


일흔넷의 김재례 할머니. 서툰 영어 발음에 들뜬 기쁨이 온전히 묻어난다. 단아하게 차려입은 진달래색 한복과 곱게 화장한 얼굴. 그 얼굴 가득 소복한 주름. 그 주름 사이의 눈부신 웃음. 이 세상 어떤 졸업생이 이만큼 아름다울까 싶다.


a 올해 여든 일곱의 문명분 할머니. 32주 동안의 교육 기간 중, 단 한 번의 결석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취미가 숙제일 만큼 공부에 푹 빠지셨다고 한다.

올해 여든 일곱의 문명분 할머니. 32주 동안의 교육 기간 중, 단 한 번의 결석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취미가 숙제일 만큼 공부에 푹 빠지셨다고 한다. ⓒ 김정혜

"맨날 수요일이었으면 좋겠어요. 아니,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 내내 공부만 했으면 좋겠어요. 내 취미가 뭔 줄 아세요? 숙제하는 거예요. 요즘은 숙제 할 때가 제일 행복해요. 그런데 왜 아이들은 그렇게 숙제하기가 싫은지 모르겠어요. 늦바람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내가 딱 그래요."

여든일곱의 문명분 할머니. 32주간의 학습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이 온통 수요일이면 좋겠다고 하실 만큼 늦공부에 온 정신을 쏙 빼놓으셨으니 말해 무엇 할까. 진즉에 배우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됐었다는 헛헛한 푸념 너머로 이젠 당신 이름 석자 쓸 수 있다는 계면쩍은 당당함이 보기 좋다.

a 난생 처음 해본 받아 쓰기. 받아 쓰기가 그렇게 재미 있을 줄 몰랐다는 할머니들의 열정에고개가 숙여진다.

난생 처음 해본 받아 쓰기. 받아 쓰기가 그렇게 재미 있을 줄 몰랐다는 할머니들의 열정에고개가 숙여진다. ⓒ 김정혜

어찌 이뿐일까. 친구가 좋은 건 할머니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터져 나오는 웃음에 어깨까지 들썩이시며 수다에 열을 올리신다.

당신 목에 걸려 있던 색색의 사탕 목걸이를 친구의 목에 다시 걸어 주시는 할머니, 한복 입은 모습이 이리 예쁜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며 느슨해진 고름을 다시 매만져 주시는 할머니, 손자 결혼식 때문에 수료식에 늦게 참석할 거란 친구를 목 빠지게 기다리시는 할머니….

함께 동고동락한 시간들을 회상하시며 기어이 눈물바람을 하시는 할머니도 계셨다. 처음 'ㄱ,ㄴ,ㄷ,ㄹ'을 배울 땐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고, 당신 이름 석자 썼을 땐 목으로 뜨거운 것이 치솟는 것 같았으며, 금쪽같은 손자 손녀들 이름 줄줄이 써내려갈 땐 서러움에 기어이 눈물을 흘리셨다니 할머니들의 한이 얼마나 깊었을지 감히 짐작해 보는 것마저 죄스럽다.

당신들은 헐벗고 배곯아도 자식들 입히고 먹이기 위해 섬섬옥수 가녀린 두 손이 갈퀴가 되었을 것이다.

주어도 주어도 못 다 준 것 같은 목마른 모정이 골 깊은 주름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고단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당신 이름 석자 못 쓰는 것보다 아들 이름 못 쓰는 게 더 가슴 아프셨다니 할머니들의 그 한이야 되짚어 무엇 할까.

그러나 오늘만큼은 고단함이 켜켜이 내려앉은 할머니들의 그 앙상한 어깨가 유난히 가벼워 보인다. 배움이라는 가슴 벅찬 감격과 그 감격이 주는 아릿한 기쁨과 그 기쁨이 주는 터질 듯한 행복이 깃털처럼 내려앉았기 때문일 것이다.

a 할머니들의 공부하는 모습. 책을 읽는 일이 너무 행복해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하신다.

할머니들의 공부하는 모습. 책을 읽는 일이 너무 행복해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하신다. ⓒ 김정혜

뜬금없는 생각 하나에 빠져든다. 한글을 깨우쳤다는 기쁨 하나에 이렇듯 행복해 하시는 할머니들. 그 할머니들의 기나긴 삶을 되짚어 볼 적에, 오로지 당신들만을 위한 날이 과연 몇 날이나 있으셨을까.

오로지 당신들만을 위하여 고운 한복을 차려 입고, 오로지 당신들만을 위하여 곱게 화장을 하고, 오로지 당신들만을 위하여 마음 놓고 웃음꽃을 피우며 이렇게 기꺼이 행복해 하셨을 날이 과연 몇 날이나 있으셨을까. 긴 삶의 짧고 짧은 오늘 이 한 순간. 이렇듯 철부지처럼 내놓고 좋아하시는 할머니들 모습에 내 마음은 또 왜 이리 짠한지….

"시골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꽤 많은 어르신들이 한글을 모르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신도 몇 명이서 의논을 했죠. 어르신들께 한글을 가르쳐 드리면 어떻겠느냐고요. 모두들 흔쾌히 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창피하다는 이유로 어르신들이 쉽게 응해 주시지 않는 거예요. 끈질기게 설득을 했죠. 그나마 네 분의 할머니들께서 허락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지금은 그 세 배나 되는 열 두 분의 할머니들께 한글을 가르쳐 드리게 되었으니 큰 성과죠."


한글 교실을 열게 된 경위를 말하는 이경재 목사의 목소리는 오히려 할머니들보다 더 들떠 있는 듯했다. 처음보다 세 배나 되는 할머니들을 모시게 된 지금. 그 보람은 삼십 배도 더 넘는다고 한다. 간혹, 할머니들의 아들, 딸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을 때면 주체할 수 없는 감격에 가슴이 뻐근해진다고 한다. 바람이 있다면, 모쪼록 건강하셔서 더 오래오래 뵙고 싶다고 한다.

a <금파은빛교실>의 수료생들과 입학생들.

<금파은빛교실>의 수료생들과 입학생들. ⓒ 김정혜

옛날 옛적. 할머니들은 그랬을 것이다. 여자라는 운명의 걸림돌, 전쟁이라는 비극의 걸림돌, 남동생부터 배워야 한다는 부모님의 호통이란 걸림돌에 걸려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열망만 고스란히 가슴에 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냥 묻어 두기엔 그 한이 너무 깊었나 보다. 오롯이 한이 되어 가슴 저 깊은 곳에 옹이로 박혔었다는 한 할머니의 애달픔에 가슴이 저리다.

그러나 이제라도 그 한을 풀게 되어 여한이 없다시는 할머니들. 할머니들의 그 뜨거운 열정 앞에 난 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그러나 부끄러움에 앞서 먼저 고백해야 할 것 같다. 할머니들과 함께 한 봄날 오후가 내겐 크나큰 축복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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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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