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라는 품속에서 탁란되는 우리네 삶

[소설 속 강원도 15] 전상국의 <지빠귀 둥지속의 뻐꾸기>

등록 2007.03.27 18:18수정 2007.03.2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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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양구로 가는 배후령 정상 풍경

양구로 가는 배후령 정상 풍경 ⓒ 최삼경

삼월 하순인데도 멀리 미시령에는 무릎까지 빠지는 큰 눈이 왔다는 소식이 들리기 때문인지 춘천 오봉산과 양구 사명산 사이로 펼쳐지는 풍광은 어쩐지 을씨년스러웠다. 이제 머지않아 울긋불긋 만화방창(萬化方暢, 따뜻한 봄날에 온갖 생물이 나서 자라 흐드러짐)에 하늘과 땅 사이를 초록은 동색으로 뒤덮을 나뭇가지들은 그러나 아직은 실핏줄 같은 음영만으로 심드렁하게 놓여 있다.

소설 <지빠귀 둥지속의 뻐꾸기>에 나오는 '북남면 귀양리 고약골'은 실제로는 없는 행정구역이다. 소양댐 준공 이후 물속에 잠긴 삶의 터전을 떠나 자연히 형성된 인근의 조교리, 물노리, 부귀리, 오항리 등의 마을들. 간혹 낚시터와 양어장 등도 보이는 터이지만, 흔해진 물이 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닌 눈치이다.


어찌됐던 오봉산을 오르는 배후령에는 국내 최장의 터널공사가 한창이고, 이렇게 직선화 도로가 개통되면 양구와 춘천간은 삼, 사십 분으로 당겨진다고 한다.

'탁란'은 기실 소설이라는 허구의 이야기가 아닌 동물들의 실생활에서 실질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원주인의 알보다 하루 이틀 먼저 깨어난 뻐꾸기가 채 눈도 뜨지 못한 상황에도 힘겹게 다른 알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 장면을 본 일이 있다.

이렇게 남의 둥지에 자신의 알을 몰래 넣어 새끼를 기르는 것을 탁란이라고 하는데, 덩치는 벌써 어미보다 큰 뻐꾸기를 제 새끼처럼 먹이를 물어다 주는 지빠귀류의 새들의 미욱함에 잔뜩 화가 치밀었던 기억이 있다.

최근 미국 플로리다 자연사박물관 연구진의 연구에 의하면 사나운 찌르레기는 휘파람새에 탁란을 하고, 혹여 그 알이 없어지면 대략 56% 정도가 휘파람새의 둥지를 분탕질을 해놓는다는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래서 유약한 휘파람새는 찌르레기의 조폭식 앙갚음이 두려워 알을 품는다고 한다.

이런 탁란은 비단 조류뿐만 아니라 잉어과인 감돌고기라는 어류에서도 일어난다고 하니 탁란은 생명붙이들의 어엿한 하나의 번식방법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은 크게 두 가지 줄거리가 얽혀 이루어진다. 귀양초등학교 먹골 분교에 함께 근무하게 된 강선생과 나, 그리고 마을출신의 유지로 정계진출을 꿈꾸던 권진평 사장과 마을 사람들의 갈등이 그 한 축이고, 또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고 혼혈아인 딸 한수지를 위해 자신의 한 많은 사연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그녀, 혹은 한국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여인의 삶의 역정이 다른 한 축을 이룬다.

물론 두 가지 사연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데 여기서 탁란이라는 행태는 중첩적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의 탁란은 강선생이 귀양리라는 지명을 빗대 말했듯이 오갈 데 없는 이들의 귀양살이에서 오히려 지친 삶의 깃털을 고르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둘째 한수지 어미의 지난한 삶이 자궁 같은 고약골의 포근함에 의지해 살아갔음을 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딸 한수지를 미국이라는 둥지로 보내 살게 하는 행위이거나 아니면, 딸 수지가 이미 한국이라는 둥지 속에서 탁란되어 키워지다가 제 본 나라인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여하간, 소설 속에서 딸 한수지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흰배지빠귀를 어미로 착각하여 구릉진 응달 속에서 헤매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하여 자신이 비록 젊은 시절 지빠귀둥지 속에서 자랐지만, 자기는 한사코 뻐꾸기였음을 주장하며 미국에서의 삶을 살아낼 것을 당당히 주장하며 끝을 맺는다. 그리하여 두 모녀와 강선생이 살던 텅 빈 골짜기에는 비도 내리지 않아 더 비감스러운 뻐꾸기소리만 가득하다.

전상국의 소설에는 유독 6·25전쟁과 미군들, 가부장적 가정 아래서의 망가진 여인이라는 소재가 자주 나타난다. 소설 배경도 춘천 부근과 강을 중심으로 한 것이 많다. 작가는 자리 잡는 곳이 고향이라고 했던가. 소설은 팔월의 한여름을 배경으로 하여 쓰였지만, 어쩐지 이렇게 봄의 초입에서 보는 나무들은 더 울울한 느낌이었다.

a 추곡 약수

추곡 약수 ⓒ 최삼경

높이 솟은 사명산 기슭의 추곡약수를 벗어나며 보는 산하는 바야흐로 겨울이라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다. 인간이 만든 길과 자연이 만든 강이 평행하게 흐르는 풍광을 보자니 필경 인간들이 만물의 영장이니 하고 설레발을 치지만, 자연에 의해 태어나고, 자연 속에서 키워지고, 또 자연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 탁란의 삶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우주에 로켓을 쏘고 인공 비를 내리게 하는 등의 과학 만능을 자랑하지만, 정작은 아무렇게나 들에 피는 꽃 한 송이, 물 한 방울조차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현대과학의 저간의 사정에 이르면 인간의 과학은 아직 멀리 있는 꿈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말매미울음처럼 골짜기를 채웠던 수지 어머니의 울음소리…, 탁란은 그렇게 맡기는 자와 맡김을 당한 자의 슬픔 같은 것이 현재적으로도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가슴을 옥죄어 온다.

a 약수골로 불렸던 약수터 마을 풍경

약수골로 불렸던 약수터 마을 풍경 ⓒ 최삼경

a 오항리에서 보이는 소양호자락

오항리에서 보이는 소양호자락 ⓒ 최삼경

덧붙이는 글 | 웹진 '강원도 세상'에 올릴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웹진 '강원도 세상'에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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