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짜는 마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만의 여행지] 매화도 보고 나물도 뜯는 호젓한 매화마을

등록 2007.03.28 16:57수정 2007.03.29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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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코앞에 사는 아이들이 지각은 단골로 맡아 놓듯이 반나절이면 유명한 꽃동네 어디든지 닿을 수 있는 곳에 산다는 느긋함으로 올해도 매화축제를 놓쳤다. 신문, 방송을 달구는 꽃소식이 한창인 즈음, 문득 매화향기 흩날리는 섬진강이 그리워 점심상 치우자마자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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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저녁 햇살 ⓒ 조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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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 진달래 ⓒ 조명자


봄바람에 짙은 녹색으로 출렁이는 섬진강이 햇살에 부서져 눈부시다. 섬진강가를 휘어드는 강변도로가 그리워 일부러 곡성으로 향하는 국도를 타다 보니 철길 위 야산에는 벌써 진분홍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보성강과 섬진강이 만나는 압록, 구례를 향해 달리던 외줄기 섬진강 폭이 갑자기 넓어지는 곳이다.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남사면 쪽으로 길을 틀었다. 주도로인 북쪽 길 보다는 훨씬 한적한 길이라 강 구경, 꽃 구경하며 주유천하 하기엔 그쪽 길이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매실 꽃 구경보다 사람 구경

따끈따끈한 봄 햇살에 달구어진 남사면. 강가를 따라 수도 없이 늘어선 매실 밭은 이미 누리끼리하게 시들어버린 매화가 볼품없이 매달려 있는 모습이었다. 매화도 지고, 산수유도 지고. 바야흐로 국도 양옆에 있는 벚꽃 길만이 분홍 꽃망울이 여명처럼 달궈오는 풍경으로 개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매년 매화축제를 찾아 남도 순례길에 나선 친구들 안내하느라 다압면 매실 마을은 빠짐없이 찾았는데 그때마다 장터를 방불케 하는 '청매실 농원'은 늘 나를 실망시켰다. 신문이나 방송에 대대적으로 소개되는 청매실 농원과 홍쌍리 아주머니. 마음먹고 매화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꼭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다.

그러나 밀려드는 관광객을 위해 매실나무를 베고 거대한 주차장을 조성한 것 하며, 흙먼지 뽀얗게 피우는 인파 속에 밀리다 보면 매화 향기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정신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사람 밀쳐가며 간신히 매화꽃 아래서 몇 컷 찍고 나서 어마어마하게 늘어선 장독대 배경으로 또 기념사진. 곳곳에 진치고 늘어선 상인들이 내미는 매실 제품 몇 개 고르면 꿈에 그리던 꽃구경이 얼떨결에 끝나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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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금마을의 매화 ⓒ 조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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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와 지리산 ⓒ 조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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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매, 청매... ⓒ 조명자


꽃구경 못지않게 사람구경도 할 만한 것이지만 우리만의 오롯한 봄나들이가 무엇보다 그리웠다. 그래서 눈에 띄는 대로 올라간 본 마을이 '직금마을'. 청매실 농원에서 한 2km 못 미쳐 위치한 마을이다.

도로에서 고개 쳐들고 올려봐야만 보이는 마을. 마을 올라가는 길의 경사가 어찌나 가파른지 저단 기어 넣고 조심조심 접근해야 할 정도로 절벽 요새처럼 생긴 마을이다. 그곳에 오르면 벼랑 끝에 매달린 정자처럼 오똑 선 마을회관이 섬진강을 굽어보고 있다.

요사이 지은 것처럼 보이는 현대식 정자는 사방이 유리로 둘러싸여 시원한 조망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자 뒤편 몇 가닥 실핏줄처럼 그어진 고샅 길 양쪽으로 옹기종기 터 잡은 농가주택들. 그 마을 농민들의 활동무대인 논밭이 가파른 능선 위에 계단식으로 차곡차곡 늘어서 있었다.

예전엔 논농사를 지었음직한 계단 논이 시대 조류에 따라 남김없이 매실 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고도 때문인지 아래 매실 밭보다 훨씬 생생한 매화가 꽃구름처럼 만개해 있다. 아득하게 내려다뵈는 섬진강과 맞은 편 희뿌연 안개 속에 동양화 한 폭처럼 구불구불 그어져 있는 지리산 능선이 눈높이를 맞춘다.

한가로이 매화에 파묻힐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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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금마을에서 바라 본 섬진강 ⓒ 조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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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금마을 정자에서 보이는 섬진강 ⓒ 조명자

그 아래 보이는 섬진강. 녹색 물결이 휘돌아져 하얀 백사장을 만들고. 섬진강가를 연필로 그어놓은 것 같은 양쪽 국도에 꿈틀거리는 승용차와 관광차들로 만원사례를 이루고 있었다. 그 모든 풍경들이 흡사 꿈결처럼 아니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발아래 펼쳐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 아니고 무얼까 하는, 순간적으로 내가 신선이 된 느낌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산꼭대기를 꽉 채운 매화 밭에는 사람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매화 밭 사이로 가파르게 이어진 시멘트 농로를 남편과 둘이 쉬엄쉬엄 오르는데 매실나무 아래 나물이 지천이다.

제법 실한 이파리가 너울너울한 쑥, 다닥다닥 붙어 자란 쑥부쟁이 무더기 그리고 논밭 가상이 질퍽한 고랑에는 보기에도 먹음직한 돌미나리가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나물 뜯어간다고 나무랄 사람 있을까?

잠시 잠깐만 쭈그려 앉아 나물 뜯어도 순식간에 비닐봉지 꽉 채우기는 일도 아닐 만큼 싱싱한 나물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풀숲을 가득 메운 홍자색의 광대나물 꽃, 새하얀 꽃잎이 별사탕처럼 반짝이는 별꽃, 밝은 남색의 작은 꽃잎이 이슬처럼 몽롱한 개불알풀꽃.

조금만 고개 돌려도 시선 닿는 곳마다 눈길을 사로잡는 크고 작은 풀꽃들. 하늘에는 구름 같은 매화 꽃송이가 정신을 몽롱하게 하고 발아래 풀숲에는 작디작은 아기 풀꽃들이 아양을 떨고… 뭐 땀시 아수라 장터 같은 유명 매화농원 찾아가 정신 뺄 일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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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금마을의 차밭 ⓒ 조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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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금마을엔 아직도 아람이 있다 ⓒ 조명자

비단을 짜는 마을, 직금(한자 표기가 없어 내 맘대로) 마을에 가면 구름처럼 하늘을 수놓는 매화 꽃송이가 있다. 저녁 식탁을 황홀하게 꾸며 줄 향기로운 나물도 지천이다. 그리고 백운산 자락을 장승처럼 받치고 있는 밤나무 군락도 있다.

청매실 농원 마당을 그득 채운 장독대를 기필코 봐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직금마을' 매화도 참 좋다. 하늘과 바람과 백운산 기가 내리꽂히는 마을에서 한가로이 자연과 벗하며 한시름 내려놓아도 좋을 마을. 비단 짜는 마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나만의 여행지>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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