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난제를 해결하고 돌아온 이방원

[태종 이방원 64] 명나라 사신 성공

등록 2007.03.30 10:00수정 2007.03.30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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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밤을 새운 방원은 고려촌에서 따뜻한 환송을 받고 갈 길을 재촉했다. 연교보와 파리보(巴里堡)를 지나 드디어 연경(燕京북경)에 입성했다. 압록강에서 2030리 39일만이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가 통치하고 있는 곳이다. 방원으로서는 처음 밟아보는 연경 땅이었다.

연경에서 연왕(燕王)을 알현했다.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내왔다. 시위하는 군사도 물리치고 독대했다. 사신이지만 조선의 왕자에게 친밀감을 표시한 것이다. 방원의 눈에 비친 연왕은 첫눈에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독사눈을 닮은 눈동자에서 광채가 빛났다. 두툼한 입술에 야망을 품고 있었다.

연왕 역시 이방원이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읽었다. 지금은 나이어린 막내 동생에게 세자의 자리를 내주고 야인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선수가 선수를 알아 본 것이다. 훗날, 이방원은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고 연왕은 조카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묘호도 똑같이 태종(太宗)이다.

때를 기다리는 잠룡들, 서로를 알아 보다

태종으로 등극한 이방원에게 이때의 만남이 큰 자산이 되었다. 이방원이 연왕을 황제로 처음 만났다면 과감한 대명외교를 펼치지 못했을 것이다. 관계란 첫 만남이 중요하다. 어떠한 지위에서 어떠한 사람을 만났느냐가 관건이다. 스승과 제자로 만났으면 제자가 교수가 되어도 스승은 선생님이다.

하위와 상위가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하위가 상위가 되어도 그 관계의 저변에는 첫 만남의 흔적이 흐르고 있다. 이렇게 좋은 첫 만남도 부정적인 면이 있다. 하위가 동등내지 상위가 되었을 때 그 위를 인정해주지 않고 첫 만남의 연속선상에서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관계의 모순이다.

연경에서 연왕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사신 일행은 연경을 떠나 남행을 계속했다. 연경에서 보낸 시간을 보충하기 위하여 잰걸음으로 남행을 계속할 무렵, 한 떼의 군마 무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길을 비키라고 고함을 질렀다. 왕의 행차이니 길을 비키라는 것이다. 연왕이 아버지 주원장의 부름을 받고 금릉으로 가는 길이었다.

중국인들은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길을 터주었다. 방원을 비롯한 사신일행도 말에서 내려 길섶에 몸을 세웠다. 지나던 연왕이 방원을 비롯한 조선사신을 알아보고 타고 가던 수레를 멈추고 휘장을 걷었다. 조선 사신 방원을 알아본 연왕이 중국말로 말했다. "급한 일이 있어 금릉에 가는 길이니 천천히 뒤 따라 오라"는 것이었다.

요하(遼河)를 건넜다. 요하는 요수 또는 대요수라고 부르기도 하거니와 구려하(句麗河)라고도 불린다. 고구려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다. 요하를 기준으로 동쪽을 요동, 서쪽을 요서지방이라 부른다. 요하를 건너면 진정한 의미의 중국 땅에 들어가고 장성(長城)권역에 들어가는 것이다.

요하를 지나 발착수(渤錯水)를 지날 때는 당태종 이세민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고구려를 정벌하려다 국력을 소모하여 패망의 길로 들어선 수나라를 멸하고 대륙을 평정하던 당태종은 고구려를 주머니 속의 작은 물건으로 생각했다.

당태종은 17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계절을 잘못 선택했다. 요동벌판의 혹독한 추위는 당나라군에게 크나큰 재앙이었다. 포차와 당차를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략했지만 양만춘에게 패하여 눈을 잃고 패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당나라군이 퇴각한 경로는 요하 하구 쪽이었다. 겨울에 꽁꽁 얼었던 진흙땅이 해동과 함께 늪지대로 변하는 지역이다. 군사는 물론 군마와 군수물자를 가득 실은 수레도 삼켜버리는 무서운 지역이다.

"조상님이여, 나 이세민을 가엽게 봐주소서. 내가 조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말을 타고 진흙구덩이에 빠지니 만민을 통치하는 조정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말을 아무리 때려도 진흙구덩이에 빠져 나갈 수 없으니 내 황제인 것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내 너무나 상심하여 두 눈에 눈물이 흐르니 나 당나라 왕 이세민을 구해주소서!" -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薛仁貴跨海征東白袍記)>


이 험난한 길을 택하여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나라 황제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완전한 패배를 당하여 도망갈 길 조차도 선택하기가 어려웠음을 의미한다. 연개소문에게 패배한 이세민은 몰락하여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 측천무후의 등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대륙의 황제 이세민으로 하여금 피눈물이 나게 했던 연개소문이 한없이 자랑스럽고 위대해보였다. 그러한 기상을 이어받은 후예가 명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러 가는 자신이 참담했다.

융숭한 대접으로 조선 사신을 어리둥절하게 한 명나라 조정

금릉에 도착하여 황제를 알현하니 흡족한 마음으로 따듯이 맞이해 주었다. 조정의 대신들도 조선의 왕자가 왔다고 융숭히 대접해 주었다. 황제 주원장은 이방원을 여러 차례 만나 주었다. 외교 관례상 보기 드문 이례적인 대우였다. 명나라가 아들을 보낸 이성계를 신뢰하고 이방원을 신임한다는 메시지였다.

이방원의 명나라 방문은 대 성공이었다. 요동정벌론을 주장하는 조선에 대한 명나라의 의구심을 풀어주었다. 1년 3사 외교도 복원하였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외교 난제를 해결한 것이다.

이방원은 방문 목적을 성공리에 마쳤다. 방원을 비롯한 사신 일행도 놀란 예상 밖의 결과였다.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방원의 외교능력이 탁월해서 라기 보다도 분위기가 성공을 이끌어 내었다.

"배를 타고 빠른 길로 귀국하시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뱃길을 이용하여 이 기쁜 소식을 고국에 빨리 알리자고 수행원들이 성화를 냈다. 좋은 소식은 빨리 전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방원은 뱃길이 두려웠다. 지난번 사신 길에 뱃길을 이용하다 배가 뒤집혀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다.

"뱃길은 아니 될 말이오."

왔던 길을 되짚어 귀국길에 올랐다. 방문 성과를 임금에게 알리는 사신을 지름길을 통하여 먼저 귀국시키고 느긋한 마음으로 귀국했다. 심양과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넜다. 의주목사가 환한 모습으로 영접했다. 압록강을 건너갈 때의 노파심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찾아 볼 수 없었다.

평양을 거쳐 예성강에서 나룻배를 타고 개경에 도착하니 송악산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보마" 하고 다짐했던 송악산을 다시 본 것이다. 개경을 떠난 지 5개월 12일만이다. 감개가 무량했다. 눈에 보이는 산이 신령스러운 산 송악이라는 것을 확인하니 살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추동 사저에 도착하니 부인 민씨가 아들을 낳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복자가 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아이다. 방원은 기뻤다.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이 뿌듯했다. 이 아이가 훗날 애증이 교차했던 양녕대군 이제(李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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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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