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면 10분일 거리를 100분 동안 걷다

군산 무녀도, 선유도와 부안 모항에 가다

등록 2007.04.01 16:23수정 2007.04.0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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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호젓하게 여행을 하기에 봄보다 좋은 계절이 없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곳곳에 강이 흘러 지구상의 어느 곳보다 물이 풍부하다는 나라에서 여름에 피서객들이 없는 장소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어딜 가도 사방이 산인지라 가을이면 단풍을 찾아 떠나는 등산객들을 피할 수 없다. 마침내 그대가 겨울에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면 시베리아 기단의 매서운 칼바람에 여행의 의욕을 순식간에 날려버리기 일쑤다. 하지만 때가 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꽃만 피하면 되지 않는가!

온전히 내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장소를 원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하는 처지이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머니사정마저 그리 여의치 않다면 두 다리에 의지하자. 고생길이 훤하다고? 처량해 보인다고? 천만의 말씀.

그동안 너무 나 아닌 다른 것만 바라보고 생각하고, 그것만을 위해 달렸다면 이번에는 나와 만나기 위해 걷자. 걷고 있는 길 위, 다른 누군가와 굳이 발맞추지 않는다면 그간 소홀했던 내 내면의 목소리와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곳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제 오감을 만족시키며 천천히 걸을 수 있는 장소를 찾는 일만 남았다.

고군산군도... 무녀도를 거쳐 선유도로

고군산군도를 향하는 배는 군산여객터미널에서 하루 아홉 편 정도로 비교적 자주 있는 편이다. 볕이 좋은 날이면 바람이 다소 차더라도 갑판에 마련된 의자에 앉기를 권하는데, 뱃머리가 향하는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군산항을 출발하고 오래지 않아 바다 곳곳에서 수많은 섬들이 신비스런 자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서해안에서만 볼 수 있는 이 보물 같은 풍경을 놓친 채 선실에서만 안주한다는 건 여행자로서의 참된 도리가 아니다.

이런 신선놀음에 시간가는 것도 잊을 때쯤 배가 한 섬에 정박한다. 선유도인가 하고 배 밖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어 보면 무녀도라는 섬인데, 무녀도와 선유도는 두 섬을 잇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선착장을 마주하고 있어 선유도를 찾은 사람들은 이제사 내릴 채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왠지 무녀도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뭔가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면 다시 배가 움직이기 전에 결단을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애초에 무녀도라는 섬은 잘 알지도 못하고 출발했고 승선권에 쓰여 있는 내 목적지도 아니지만 과감히 무녀도에 그 첫 발을 내딛는 것이다!(여행이란 원래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더 큰 것을 얻는다는 오묘한 진리를 체득한 사람이라면 결단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선유도가 여행객들을 위해 제 삶의 일부를 내어주었다면 무녀도는 선유도에 비해 섬 마을 풍경을 오롯이 품고 있다. 돌아보는 동안 갯가에서 막 잡아 올렸을 법한 바다생명체(?)들을 흥겹게 손질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고 아이 키보다도 낮은 학교 담장 너머로 나이도, 학년도 모두 달라 보이는 대여섯 남짓한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입가 가득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이 풍경들에 함께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 내가 한심해질 정도다.

넓게 펼쳐진 갈대밭을 지나 무녀도를 한 바퀴 돌아 나오면 이제 선유도를 갈 차례이다. 아름다운 일몰로 얻은 명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생각에 부랴부랴 선유대교를 건너 명사십리해수욕장에 이르면 신선이 놀고 갔음이 분명한, 고운 모래사장이 길게도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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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 명사십리해수욕장 ⓒ 김도연

모래위에 철퍼덕 주저앉아 팔짱 끼고 해 떨어지기만 기다리기엔 시간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남았다면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길을 걸어보라. 망주봉을 지나면 곧 나무들의 호위를 받는 아늑한 산책로가 나오는데 그 사이로 비추는 바닷빛 또한 일품이다.

다시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도 돌아와 이번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바다와 하늘을, 그리고 어쩌면 바다인지도 모를 하늘을, 혹은 하늘인지도 모를 바다를 감상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눈앞의 가장 가까운 섬 뒤로 수줍게 제 모습을 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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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 명사십리해수욕장 일몰 ⓒ 김도연

그 날의 석양은 분명 여행안내책자에 쓰여 있는 것처럼 경이롭고 황홀한 ‘불바다’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붉음은 보고 있는 사람을 비롯한 세상을 자신과 같은 색으로 물들이기에는, 그래서 그 순간 세상의 모든 경계를 허물어뜨리기에는 충분했다.

부안 모항 가는 길

부안터미널에서 격포행 버스에 오르면 약 30분 남짓 변산반도를 낀 부안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를 감상할 수 있다. 이때 주의할 점은 반드시 버스 오른쪽 창가에 앉아야 한다는 것이다. 왼쪽에 자리하면 바다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논밭만 줄곧 이어진다.

어쨌든 넋을 놓고 감탄사를 연발하다보면 채석강과 함께 있어 더 유명한 격포에 닿는다. 하지만 너무 이름난 관광명소인 탓에 바다보다 먼저 눈에 띄는 즐비한 횟집과 모텔의 북적거림이 영 석연치 않다면 그때가 바로 진정한 ‘떠남의 미학’을 체험할 시점이다. 모항까지는 걸어가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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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 모항갯벌해수욕장 ⓒ 김도연

버스를 타면 10분이 채 안 걸릴 거리를 100분 동안 걸어간다고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말 비경제적이라고, 그 시간을 아껴서 한 곳이라도 더 보는 게 낫겠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지도 위에 그려진 무수한 동그라미들을 다 돌아보는 것 자체가 떠나온 목적이 아니라면 일단 버스가 줄곧 달려온 30번 국도로 나가 모항 쪽을 향해 서보라. 그리고 발을 떼어보라.

이제 그 길을 내 발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버스 위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길이 나를 위한 길로 변모한다. 그 길을 걷는 내내 온몸에 활짝 열린 창으로 차의 속도가 만들어내는 작위적인 바람 대신 대지의 숨결이 불어오고, 바다는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배낭의 무게 속에, 가파른 오르막 속에, 흐르는 땀 속에 매 순간이 살아 움직인다.

이쯤 되면 어느 맘씨 좋은 가족이 내 옆에 차를 세우고 목적지를 물어도 극구 그 친절을 마다하게 된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하면 목적지에 더 빨리 닿은들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미 내 몸이 알아챈 탓이다.

그렇게 도착한 모항은 어수선한 이 세상과는 무관한 듯 아주 고요하고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작지만 세상 만물을 말없이 품어줄 것만 같은 그 포근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자리를 뜰 수 없게 하는데 그럼에도 다시 한 번 일어서야 한다. 그것은,

여행이 항상 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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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모항갯벌해수욕장에서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 김도연

덧붙이는 글 | <나만의 여행지> 응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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