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이 꽃 보고 빨리 나아야 해"

6살 된 손자의 정성스런 병간호

등록 2007.04.02 09:59수정 2007.04.0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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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낮에 꺾어 온 꽃이 몇 시간만에 활짝 피었다. 노란개나리, 하얀 매화, 분홍색 진달래꽃. 고운 색깔로 골고루도 꺾어왔다. 주말에 제 할아버지 생신에 음식을 먹은 것이 체했는지 토사곽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내가 토하는 것을 보더니 얼굴이 금세 일그러진 큰 손자 녀석.


손자가 꺾어온 노란개나리, 하얀 매화, 분홍 진달래꽃
손자가 꺾어온 노란개나리, 하얀 매화, 분홍 진달래꽃정현순
약을 먹고 소파에 누워 있으려니까 내 앞에 TV리모콘과 티슈도 갖다 놓고, 안방 화장대 앞에 놓여 있던 제 할아버지와 둘이 찍은 사진도 내 앞에 갖다 놓는다. 그러더니 물도 한 컵 떠다놓고는 "할머니 물 또 마시고 싶으면 나 불러, 그리고 내가 좀더 크면 이마에 물수건도 놓아줄게" 한다. 녀석의 간호에 아픈 것이 달아나는 듯하다.

그리곤 제 할아버지한테 "할아버지 나하고 공원에 가자"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오늘(4월 1일) 황사가 와서 안 되는데"라고 하자 "할아버지 공원에 가서 내가 할 일이 있어. 빨리 잠깐만 갔다 오자"하며 조른다. 할아버지는 빨리 들어와야 한다면서 할 수없이 손자를 데리고 공원에 갔다. 얼마가 흘렀을까? 생각보다 오래 있다 둘이 들어왔다.

그런 사이 난 약의 효력이 생겼는지 조금 나아져서 맥없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헐레벌떡 들어오는 손자의 손에는 진달래, 매화, 개나리가 들려 있었다. 가쁜 숨이 채 가시지도 않은 손자가 나한테 그 꽃을 내밀면서 "할머니 이 꽃 보고 빨리 나아야 해. 그런데 할머니 조금 괜찮아졌어?" 한다. 난 녀석을 끌어안으면서 "응 많이 나아졌지. 할머니의 첫사랑이 꽃을 줬는데 빨리 나아야지"하면서 녀석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러다 문득 꽃을 손자가 직접 꺾었는지 궁금해졌다. "참 이 꽃 네가 꺾은 거야?" 하고 물었다. 옆에 서 있던 할아버지가 "내가 꺾어 줬지. 공원에서 꽃 꺾으면 안 된다 하니깐, 아주 쬐금만 꺾어 달래 할머니 아프니깐 꼭 갖다 줘야 한다"면서. 기운이 없었지만 난 얼른 작은 유리잔에 물을 담고 녀석이 건네준 꽃들을 꽂았다. 녀석도 그것을 보더니 해맑게 웃는다.

잠시 후 내가 토한 것을 보고 간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너 좀 어떠니?" "약 먹고 조금 괜찮아 졌어"라고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손자 녀석이 "할머니 우진이가 꽃 갖다 주고 간호해 주어서 빨리 낫다고 해야지"한다. 난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참 언니 우진이가 물도 떠다주고 공원에서 꽃도 꺾어다 줘서 더 많이 나았어"라고 말했다. "너는 좋겠다. 손자가 꽃도 다 꺾어다주고. 이모할머니가 우진이 정말 착하다고 전해줘라"라는 말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모할머니의 말을 전해주자 손자는 기분이 정말 좋은가 보다. "할머니 이마 한번 만져볼게" 하더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이마를 짚어본다. "할머니 뜨거워"한다. 그러더니 제 엄마를 급하게 부른다. "엄마 할머니 물수건해서 이마에 놔줘야 해"한다. "아니야 우진아 이젠 할머니 괜찮아. 조금만 누워 있으면 많이 나을 거야"라고 하니 "진짜야? 할머니. 알겠어"라고 말하곤, 동생과 논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약 효력으로 속이 좀 가라앉았다. 그런 난 속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뜨끈한 숭늉을 먹으면 속이 한결 좋아질 것 같았다. 내가 팍팍 끓인 숭늉과 누른 밥을 한술 뜨자 녀석은 안심이 되었는지 "할머니 이제 밥 먹어도 돼?"라고 말한다. "그럼 우진이가 꺾어온 꽃을 보니깐 할머니가 힘이 막 생기는 것 같다"라고 말한 뒤, 숭늉과 누른밥을 먹고 나자 몸이 조금은 개운해진 듯했다.


녀석의 사랑이 담긴 꽃들이 식탁 위에서 활짝 웃고 있다. 난 그 꽃을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시간가는 줄도 모른다. 입가에 웃음이 저절로 번진다. 그 꽃 위로 손자의 얼굴이 맴도는 듯하다. 내일은 손자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고맙다 우진아. 우진이가 갖다 준 꽃보고 할머니가 다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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