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논두렁 태우는 날

봄농사 시작을 알리는 신호

등록 2007.04.17 14:17수정 2007.04.17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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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희식
면사무소에서 논두렁 태우러 오는 날이다. 이장님이 마을 방송을 통해 이틀 동안 거듭 알려 주었다. 방송장비가 낡은 탓에 골바람을 타고 말소리가 너울너울 흩날려버려서 이장님 집으로 전화를 걸어 확인까지 하고 마을회관으로 갔다.


마을회관에는 쇠갈퀴를 하나씩 든 동네 아낙들이 너댓 분 나와 있었다. 아낙이래야 일흔이 넘은 할머니들. 할머니라고 불렀다가 "할머니는 무슨 할머니 아직" 이라며 섭섭해 하시는 눈치여서 아주머니라고 부른다. 아흔넷 우리 동네 최고령 할머니는 특별서비스로 '누님'이라고 불렀더니 얼굴까지 빨개지며 박장대소다. 이 할머니는 앉은 자리에서 막걸리 한 병을 비우시는 분이다. 지난번 장계 장에 가셨을 때는 소주 두 병을 잡수셨다고 다른 할머니가 귀띔이다.

아랫동네에서 먼저 연기가 솟아올라야 우리 마을 차례가 되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논두렁 태우는 연기는 보이지 않는다. 또 허탕이란 말인가. 허탕 친 게 오늘로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정했던 날에 비가 와서 그랬고 두 번째 허탕은 다른 마을 뒷산에 불이 나서 면사무소 전 직원이 불 끄러 갔기 때문이었는데 오늘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면사무소 직원이 와야 불 지를 수 있어

전희식
산불조심 때문에 함부로 불을 지를 수도 없다. 꼭 면사무소 지도위원이 물통 등 불 끄는 장비를 가져와 대기시켜 놓은 상태에서 논두렁을 태우게 하고 있다. 공공기관의 모든 차량은 '산불조심'이라는 깃발을 꽂고 다니고 아침마다 마을이장은 주의방송을 한다.

한 할머니가 들고 온 쇠갈고리가 휘적거렸다. 쇠살이 구부러져 있는가 하면 빠져 달아난 할머니 이빨처럼 쇠살이 아예 없는 곳도 있다. 나머지 몇 개도 흔들거렸다. 내가 트럭에 가서 펜치와 철사를 가져와서 퍼질고 앉아 갈고리를 다 뜯어내고 다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자 기다리기 지루해 하던 아주머니들이 빙 둘러앉아 참견을 시작했다.


"깔꼬리 장사 굶어죽것네. 버려어~ 3천원이면 새거 산당게."
"솜씨 보니께 깔꼬리 맹글어도 밥 묵고 살것네."
"우리 밭에 가면 이것보다 몇 배 쓸 만한 거 버려놨으니 그걸로 쓰시소."

한 할머니는 손가락 굵기의 나무 두 개를 잘라다 주며 갈고리 아래 위에 대고 살을 하나하나 동여매라고 했다. 철사가 모자라자 산기슭에서 칡넝쿨을 걷어 와서 묶었다.


작업의 마지막 단계에서 갈고리 쇠 살 끝을 가지런히 구부려 드렸다. 철물점에서 파는 것보다 두툼해지긴 했어도 묵직하니 손바닥에 전해오는 감촉이 좋았다. 이때 한 아주머니가 '온다. 와!'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전희식
우리는 우르르 논으로 달려갔다. 면사무소 지도차량이 곁에 서고 우리는 논으로 들어섰다. 차에는 네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아무도 내리지 않고 "누구 라이터 없어요? 불 지르세요!"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불을 붙이자 그들은 붕 하고 다른 데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참 맥없는 순간이었다.

네 논 내 논 할 것 없이 제일 위 논부터 불을 질렀다. 제일 위에 있는 논두렁을 주의해서 잘 태우고 나면 나머지 논은 맨 아래부터 마음 놓고 불을 질러 올라가면 된다. 그러면 불길이 산으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봄볕을 받아 바싹 말라 있던 풀섶에 불길이 닿자 불은 날랜 뱀처럼 번져갔다. 불길을 에워싸고 불이 번져 갈 길을 만들어가던 우리가 도리어 눈 깜짝하는 새 불길에 에워싸이고는 했다.

불똥은 개구리처럼 튀었다. 여기로 불똥이 튀었구나 싶으면 어느새 저기로 날아 간 불똥이 훨훨 타오르는 것이었다. 어라? 어라? 하며 아찔했던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불이 번지기 전에 미리 갈퀴로 검불들을 긁어내면서 불길을 조절했다. 불이 드세어지면 검불들을 얇게 흩었고 불길이 사윌 듯하면 검불들을 불쪽으로 긁어모았다.

다른 논다랑이로 불을 옮겨 붙일 때는 갈고리에 불붙은 검불을 퍼서 끼얹었다.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 매콤한 연기와 함께 검댕이가 얼굴에 확 끼얹어졌고 숨통이 콱 막혔다.

연기를 피해 도망가는 쪽으로만 연기가 몰려오면 '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지?' 싶으면서도 더럭 겁이 나곤 했다.

논두렁 태우기, 효과 있나?

어떤 논 바로 옆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있는 데가 있어서 사람들을 한 군데로 모았다. 논두렁 가장자리로 빙 둘러가며 마른 풀을 걷어낸 다음에 엷고 가늘게 불을 질러 나갔다. 비닐하우스 쪽에 물을 끼얹고 하자는 사람이 있었지만 가타부타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자 그 말은 불티처럼 그냥 공중으로 사라져 가 버렸다.

키 큰 마른 갈대가 빡빡하게 서 있는 개울가에서는 짜자자자작 하고 요란하게 박수치는 소리를 내며 탔고, 땅을 융단처럼 뒤덮고 있는 잡풀 무성한 논두렁은 바람결을 따라 좌악~ 좌악~ 하는 소리를 냈다. 소나기 뿌리는 소리랑 비슷하다고 느꼈다.

내가 올해 모를 심을 논 500평은 이태 동안이나 묵었던 논이라 논바닥에도 갈대랑 잡풀들이 두어 자씩 자라있었다. 불길이 제 스스로 타 들어가기에는 풀이 듬성듬성했고 그냥 놔두기에는 논갈이가 힘들 그런 상태였다. 갈퀴로 잡초를 한 줄로 긁어모으면서 불을 붙였더니 잘 탔다. 풀이 무성했던 곳에는 불길이 사위고 나서도 불잉걸이 남아 있어 일일이 흩어 놓아야 했다.

전희식
겨우 붙들어 매서 고쳐주었던 쇠갈고리의 주인할머니가 내게 다가왔다. 속주머니에서 홍삼사탕 두 개를 꺼내셨다. 거절해도 막무가내다. 사탕은 얼마나 긴 세월을 할머니 옷 속에서 뒹굴었는지 동그란 사탕 알이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었다.

경칩 때 땅 밖으로 나왔던 것으로 보이는 개구리 한 마리가 불에 타 죽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해충 없앤다고 익충들도 다 죽이고 흙 속 원생동물과 미생물들의 먹잇감을 다 태워버리는 논두렁 태우기는 안 하는 게 낫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 지역 농어촌문제연구소에서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논두렁 태우기 해도 별 효과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동네 사람들이 연례행사처럼 하는 일에 반대하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

우리 마을 논두렁에서 나던 연기가 꼬물꼬물 자취를 감추어가는 것을 신호삼아 윗동네에서 연기가 솟아올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삶이 보이는 창> 3-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삶이 보이는 창> 3-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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