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교수님, '노무현 AS' 그만하세요!

철학자 김영민의 프레임으로 본 강준만

등록 2007.04.17 15:58수정 2007.04.17 17:29
0
원고료로 응원
철학자 김영민을 아십니까?

가장 많이 회자되었고,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를 상기시키면 기억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나오던 해에 우리는 같은 대학에 부임했다. 내 이름으로 잘못 온 우편물을 돌려준 적도 여러 차례다.

그런 그가 학교를 떠났다. 그의 이니셜도 '전주한일대 교수'에서 '철학자'로 바뀌었다. 그가 <한겨레>에 연재하는 '동무와 연인'의 18번째 이야기인 '부처와 가섭'에서 그것을 처음 확인한 순간 마음이 무거웠다. 미디어에 대해서도 혜안을 피력하는 그는 나에게 '선생'이자 연구대상이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김영민은 '부처와 가섭'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현대인의 존재를 일상적으로 전유하고 있는 갖은 신매체들의 전포괄적 영향력은 육성의 인문적 대면관계를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소리를 매개로 한 대면적 소통의 부재를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가령 '나는 그 사람을 안다(만난다)'는 말의 뜻은 각 시대나 세대 사이에 메울 수 없는 단절의 심연을 품고 있다"고 한다.

김영민은 2001년에 펴낸 <보행>에서도 같은 취지의 지적을 한 바 있다. "급격히 변화한 현실 속에서 적실한 의사소통의 방식을 개발하지 못한 이들은 마치 '유행처럼' 전래의 인문적 관계에 등을 돌린 채 냉소에 빠진다"며 "그 냉소의 저변에 놓인 것은 무엇보다도 소통의 피폐, 그 당착(撞着)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부의 본령(本領)이 아니라"(336쪽)고 비판했다.

<한국일보> 4월 11일자 강준만 칼럼 '노무현과 박정희'([전문보기])를 읽고 김영민을 생각했다. 강준만은 노무현을 알고 있을까? 본인은 잘 안다고 했지만…. 강준만은 2003년에 낸 <노무현은 배신자인가>에서 자신이 노무현을 비판하는 이유에 대해 "과거 노무현을 열렬히 옹호한 책들을 냈던 것에 대해 져야 할 책임과 의무"라며 이렇게 썼다.

"유시민식으로 말하자면, 나도 노무현에 대한 'AS(애프터서비스)'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유시민의 AS와 나의 AS는 그 방향과 내용이 전혀 다르다. 유시민은 선악(善惡) 이분법과 투쟁을 선호하는 반면, 나는 양쪽의 화해와 협력을 주장한다."(15쪽)


처음 의도는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이후 지난 3년 이상 그가 노무현에 대해 쓴 글들이 과연 '화해와 협력'의 정신이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그 방법론이 화해와 협력에 이르는데 기여했는지를 평가하면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다. <한국일보> 칼럼에서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한 인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려대 교수 최장집은 노무현에 대해 "처음부터 개혁에 대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비전, 아이디어를 가졌던 리더나 정치세력이 아니었다"며 "처음에는 개혁적이었는데, 나중에 변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고 썼다. 최장집의 주관적 비판에 동의하면서 강준만은 "노무현에겐 처음부터 이념은 없었다. 그에게 이념이 있다면, 그건 '승리' 그 자체거나 '원조(元祖)'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다"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최장집은 어떤 근거로 이런 평가를 했을까? 최장집은 대통령 노무현과 '육성(肉聲)의 인문적 대면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 강준만은 비슷한 취지의 관계를 권면했으나 참모들이 거절했다는 일화는 있다. 청와대를 떠난 후의 정태인도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대면적 소통이 부재하는 가운데 강준만과 최장집, 정태인의 노무현 비판은 '신매체들의 전포괄적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은 30대 중반까지도 '민주화'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독학으로 한 '의식화 교육'은 수박 겉핥기 수준에 머물렀던 것 같다" "노무현은 이번엔 국가주의적 의제를 골라 도박을 했다"는 등등의 평가 또한 노무현을 알고 쓴 것일까? 소통의 피폐, 그 당착(撞着)에서 비롯한 '냉소'는 아닐까?

김영민의 '동무론'으로 돌아가 보자. "끈끈하지 않아도 진지하고, 화끈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으며, 멀리 있어도 긴장하며, 만나지 않아도 대화하는 사이, 그 기묘한 사이 속에서 동무의 길은 자생한다."(<보행>, 325쪽) 무엇보다 동무는 대화적 공공성의 사귐을 지향한다.

김영민은 한편 '고백'은 반칙이라며 경계한다. 사사화(私事化)의 언어특권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란다. 하여 김영민은 "고백의 욕망을 끝없이 유예, 이월(移越)시키는 공공적 대화성의 태도를 키워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당면한 인문적 성숙을 위한 기본"이라고 했다. 만나지 않아도 대화하는 사이!

그리고 김영민은 "동무와 친구를 변별하는 실천적 이치가 성숙의 도정에서는 엄연하다"면서 "친구는 '듣기'(그러므로 '읽기') 이전의 사태며, 동무는 그 이후의 진경(珍景)"이라고 했다.(<보행>, 326~327쪽)

노무현에게 강준만은, 그리고 강준만에게 노무현은 친구일까, 동무일까? 무엇보다 강준만의 노무현 비판에서 결여된 것은 공공적 대화성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가 애초 의도했던 '화해와 협력'을 위한 대화는 사라지고 "사사화의 언어특권주의를 고집하는 비합리적 관습"이라는 일방적 '고백'과 '냉소'가 넘쳐 나는 것 같다.

'AS'란 것도 '동무' 아닌 '친구' 사이의 반영이 아닐까? 그렇다면 강준만의 '노무현 AS'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그만하는 게 좋겠다. 그리고 역시 김영민의 언어로 말하자면, 텍스트만 보지 말고 콘텍스트도 살피기 바란다. 한미FTA도 그런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국언론정보학회 회장, 한일장신대 교수, 전북민언련 공동대표, 민언련 공동대표,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 등 역임,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 리버럴아츠 미디어연구회 회장, MBC 저널리즘스쿨 강사,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강사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