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기자로, 취재현장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기자 지망생이 <시사저널> 선배들에게 보내는 편지

등록 2007.04.21 16:55수정 2007.07.06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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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감히 '선배'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선배, 제가 <시사저널> 사태를 처음 들은 것은 올 겨울 인도에서였습니다.

지난 2월 6일, <시사저널> 사태에 대해 방영된 MBC < PD수첩 >을 두고 한 언론고시 카페 게시판에 여러 사람이 올린 글을 통해서였죠. 글을 올린 사람들이 삼성에 대해 언급을 하길래, '황우석 사태처럼 < PD수첩 >이 삼성에 대해 무언가를 터트렸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달은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 셈이었죠.

2월 말쯤, 귀국해 < PD수첩 > '삼성공화국, 언론은 침묵하라?'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확실한 내막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몇 신문들의 보도를 접할 수도 있었죠. 어느 날, 소위 '언론고시' 스터디원들과 <시사저널> 사태에 대해 논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스터디원이 저에게 묻더군요. "태섭씨, 근데 <시사저널> 사태가 뭐예요?" 참 이상했습니다. 매일 신문을 읽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토록 중요한 사건을 알지 못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a "거대자본 삼성은 광고로 언론을 길들이려하지 말라"

"거대자본 삼성은 광고로 언론을 길들이려하지 말라" ⓒ 변태섭


a 이건희 회장에게 날리는 시사모의 펀치! "사과하세요"

이건희 회장에게 날리는 시사모의 펀치! "사과하세요" ⓒ 변태섭

많은 언론이 침묵했습니다. 수익의 많은 부분을 광고에 의존하고 있는 언론사들의 기이한 수익구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자·언론 본연의 의무보다 회사의 이익을 더욱 중요시 여기는 그들은, '언론인'이기에 앞서 '회사원'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오늘 100일 문화제에서도 그들은 보이지 않더군요.

의사에게는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있고 간호사에게는 나이팅게일 선서가 있다고 합니다. 의사들은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며 선서를 하고, 간호사는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헌신을 하겠습니다"고 맹세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인류봉사'나 '안녕에의 헌신' 등 고매한 정신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본분인 '국민의 알 권리'는 지켜줘야 되는 것이 맞는 게 아닌가요?


20일, 100일 문화제에서 손세실리아 시인은 '짝퉁유감'이란 자신의 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아무리 짝퉁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정신'까지 짝퉁이라는 거, 이거 참 씁쓸하잖아요"라고. 언론을 두고 '사회적 목탁'이라 칭하는 이유도 바로 '정신'을 두고 한 말이겠지요. 그리고 선배님들의 편집권 독립투쟁 역시 이 '정신'을 지키기 위함이리라 생각합니다.

선배님, 언젠가 말씀하신 적 있으시죠? 우리가 파업을 하는 이유는 지면을 독자들에게 돌려드리기 위한 것이라고. 이는 기사 선택에 있어 그 주인은 독자이며, 그것이 언론사의 이해관계나 언론사와 외부 세력간의 관계에 의해 정의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저널리즘 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유독 하필이면 <시사저널>만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a 시사저널의 역사 앞에서 오늘의 문제가 씁쓸하기만 한가 봅니다.

시사저널의 역사 앞에서 오늘의 문제가 씁쓸하기만 한가 봅니다. ⓒ 변태섭

지난 2월 6일자 < PD수첩 >을 보니 <한겨레> 안수찬 기자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자본권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선배나 데스크의 얼굴로 다가온다"고. 그리고 이날 고재열 기자는 "독재 권력은 펜을 꺾었지만, 자본권력은 펜을 구부리고 길들인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이미 많은 언론들이 대기업과 같은 경제주체에 해(害)가 되지 않는 기사만을 싣는 검열기준을 스스로 내화했다는 말이겠지요. "언론이 배고파지면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삼성밖에 없다"며 기사 불기재를 종용한 <시사저널> 금창태 사장의 말은 이런 면에서 인상 깊습니다.

<시사저널> 노조의 '고난의 행군'이 주목되는 것은 바로 그래서입니다. <시사저널>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언론의 문제이며, 나아가서는 미래의 제 문제일지도 모르니까요.

낭만을 꿈꾸며 입학한 대학은 낭만보다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사회의 이면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식의 명제는 단지 교과서 안에서만 그 타당성을 갖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는 교과서와 너무나 달랐습니다. 교과서를 통해 사회를 바라보던 저는 20년 동안이나 '자기 배반화'의 길을 걸어온 셈이었죠.

<체 게바라 평전> <당신들의 대한민국> 등 사회과학 서적을 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와 가장 떨어져 있는 군대에서였습니다. 군 내에서 '보안성 검토' 명목으로 이뤄지는 검사 덕에 언제나 사물함 깊숙이 책을 숨겨둬야 했습니다.

박노자씨의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와 같은 책은 위계질서를 근본으로 하는 군대이기에 감히 반입할 용기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사회에 대해 눈을 떴습니다. 그럴수록 부조리에 대한 물음은 깊어갔고, 물음이 깊어갈수록 기자에 대한 꿈도 확실해져 갔습니다.

전역 후 어느 날, 학교에서 초청 강의하던 한 언론사 기자가 그러더군요. 기자를 지망하는 사람이면 자신만의 골방 속에서 사회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골방을 깨고 나와 세상과 소통하고 사회와 호흡해야 된다고.

대학 초에 느꼈던 자기 배반화에 대한 충격만큼이나 기자의 그 말은 저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골방 속의 철학자'는 단지 그뿐이다. 아마 그때서부터였던 것 같아요. FTA 집회에 참가하고 대추리도 가본 것이.

100일 문화제가 있었던 이날, '자본권력에 맞서는 독립 언론투쟁'이라 평을 듣는 <시사저널> 노조와 함께 소통하고 같이 호흡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옳다고 믿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3인의 선배들에게 미약하지만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a 선배님들이 투쟁을 하는 것은 이 아이들에게 좀 더 낳은, 좀 더 바른 세상을 보여주기 위함이겠죠?

선배님들이 투쟁을 하는 것은 이 아이들에게 좀 더 낳은, 좀 더 바른 세상을 보여주기 위함이겠죠? ⓒ 변태섭


a 정신마저 짝퉁일 수 있는 세상, 저 스마일처럼 "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정신마저 짝퉁일 수 있는 세상, 저 스마일처럼 "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 변태섭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창하던 날씨가 하필이면 100일 문화제가 있던 날 비가 내리는지. 서울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혹시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았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걱정과 달리, 시사모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서울역 광장을 찾았더군요.

새 생명이 움트는 봄이 찾아 왔지만, <시사저널>은 아직 겨울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늘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언젠가는 '봄'이 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겠죠. 기자들이 시위가 아닌 취재를 하고, 더 이상 '짝퉁'이 아닌 '진짜' <시사저널>을 볼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하기 때문이겠죠.

소설 <데미안>에는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성역화된 자본권력의 세계를 깨고, 다시 태어나 참되고 진실한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세요.

외환위기 당시, 1년 8개월이란 긴 시간도 묵묵히 버텨온 선배님들이지 않습니까. 저를 비롯한 많은 기자 지망생이 선배님들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른 길이기에 힘들지만, 바른 길이기에 아름다운 그 길에서 전 선배님들을 따르겠습니다.

집에 오는 길, 문득 '같은 기자로서 현장에서 만나고 싶다'는 주제 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직 정식 기자도 아닌 제가 외람되게 '선배'라 부른 것에 대해 너그러운 용서를 빌며, 투쟁도 좋지만 건강도 챙기셨으면 하는 기우를 보태봅니다. 또 뵙겠습니다.

기자 지망생 변태섭 올림.

덧붙이는 글 | 변태섭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단입니다.

덧붙이는 글 변태섭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단입니다.
#시사저널 #서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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