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아빠는 누구였을까?

[서평]피에르 프랑크(아빠) · 율리아 프랑크(딸)가 지은 <아빠, 인생이 뭐예요?>

등록 2007.04.24 20:26수정 2007.04.2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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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드리미디어

내가 아주 꼬맹이였을 때 아빠는 자주 나와 놀아주셨다. 메뚜기도 잡고 개구리도 잡고 잠자리도 잡으며(전부 '잡기'만 했나 보네? 아무튼)….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아빠하고 나는 여러 번 들로 연못가로 나가서 뛰어놀았다.

그런가 하면, 그맘때 어떤 아저씨(우리 집 세입자 아저씨였거나 옆집 아저씨?)랑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도 있다. 얼굴도 분명히 떠오르지 않지만 나는 지금도 그를 가끔 '유사 아빠'처럼, 애틋하게 회상하곤 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의 얼굴보다 또 그때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이 뭐였는지보다, 우리 둘이 쪼그리고 앉아 앞마당에 이것저것 그림 그려가면서 끝없이 얘기를 나눌 때 누렸던 나의 기분을 나는 더 잘 기억한다. 그는 비록 친아빠는 아니었지만, 학교도 아직 안 들어간 꼬맹이를 상대해주어 그 꼬맹이 인생의 한 대목에 뿌듯함을 얹어주었던 것이다.

<아빠, 인생이 뭐예요?>는, 그 '유사 아빠'의 기억을 폴폴, 되살려주었다. 여전히 가물가물한 얼굴이지만, 그분을 떠올려보는 일, 행복했다. 이렇듯 새삼스레 내 인생의 또 다른 대목에서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 <아빠, 인생이 뭐예요?>의 주제가 뭔고 하니 '인생'이다. 이 책은 딸이 "아빠, 인생이 뭐예요?"라고 묻고 아빠가 그 물음에 대답을 하는 형식의 책인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딸아, 인생이 그런 거구나!"하고 도리어(!) 아빠가 깨닫는 것 같은 장면을 더 많이 만나게 된다. 이는 아빠 프랑크의 태도 때문이다. 그는 딸을 충분히 존중한다. 어린이를 존중하는 그의 그러한 태도는, 그 또한 어렸을 때 어른 '벱포'로부터 충분히 존중받아본 경험에서 생겨난 '버릇' 같아서 흥미롭다.

아빠 프랑크의 아역배우 시절, 어른배우가 그를 사정없이 때려야 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 역할을 맡은 어른배우가 바로 벱포였다. 그런데 벱포는 아이를 도무지 실감나게(!) 때릴 수가 없었다. 계속 NG가 나자 벱포는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일부러 만들어 5마르크를 건네면서 아이에게 자기의 의견을 내놓았다.

"한 번 진짜로 맞고 끝내버리는 게 어떻겠니. 이런 식으로 백 번 하다가 내일 아침까지 촬영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은데, 그렇지?" 그 사건을 아빠 프랑크는 "똑같은 연기자의 입장에서 나에게 이해를 구했고 내가 허락한 후에야 진짜 나를 때릴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거야"라고 기억한다(100∼101쪽).


내가 '유사 아빠'로 기억하는 그 아저씨와, 아빠 프랑크가 기억하는 벱포 아저씨, 그런 면에서 조금 닮은 것도 같다.

어린이였던 자기를 존중해준 벱포 아저씨의 대(!)를 잇듯이 아빠 프랑크는 <아빠, 인생이 뭐예요?>에서, 어린이인 딸 프랑크를 깍듯이 존중하면서 인생의 전반적인 것들(사랑과 성, 직업, 갈등, 감정, 교육, 돈과 행복, 아름다움과 삶의 의미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딸에게 인생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딸(14살)과 대화한다. 그런 주제들, 어른들끼리 대화하는 게 더 유익할 것 같다고? 이 책을 읽으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분명해진다.

[율리아] 하지만 돈이 없어도 걱정이 많잖아요.
[아빠] 물론 하루하루 어떻게 집세를 내고 냉장고를 채울지 고민하는 것도 정말 불행한 일이야. 그러니까 이 극과 이 극은 모두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들이 뭔지 잊어먹게 만드니까. 확실히 돈은 필요하고 우리 삶을 어느 정도 자유롭고 안전하게 만들어줘. 하지만 너무 대단하게 여기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게 돼.
[율리아] 정확히 말하면 아주 가난한 사람들과 아주 부자는 공통점이 있단 거네요. 둘다 돈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한다는 거요.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율리아의 대꾸로부터 얻는 깨달음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이런 높은 수준의 대화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다음은 부부싸움이 주제다.

[아빠] 아직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의 진심을 다시 한 번 느끼려고 부딪쳐보는 거야. 마찰은 열을 일으킨다고 하잖니.
[율리아] 그거야 과학시간에 배웠죠. 그럼, 사이좋게 지내려면 가끔 싸울 필요도 있단 거예요?
[아빠] 너하고 아빠도 가끔 싸우지만, 그게 우리의 사랑을 해치지는 않잖아. 싸워도 서로에게 정말로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면 돼.
[율리아] 그런데 왜 어른들은 헤어질 정도로 크게 싸우면서, 우리 아이들이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아빠] 아이들은 어차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율리아] 그건 아주 큰 착각이에요. 난 무슨 일이 있으면 다 아는걸요. 그리고 엄마 아빠보다 기억도 훨씬 잘해요.


이번에는 '부모, 자녀의 관계.'

[율리아] 아이들이랑 함께할 시간이 없는 부모님들은 정말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빠] 그것도 진짜 슬픈 일이야. 그러면 아이들은 자신들이 거부당한다고 느끼거든.
[율리아] 내 생각엔요, 그렇게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 쓸 시간이 없으면, 언젠가는 아이들도 어른들을 위해 시간을 안 내줄 거예요.


어른들도 역시 완벽하지 못해서 다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의 분노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다는 말을 아빠가 하자 율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문(門)들만 불쌍하죠”라고(99쪽)….

문 '쾅' 닫는 걸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밖에 모르는 어른들에 대한 일침이 아닐 수 없다. 그때 아빠는 대꾸한다. “그걸 꼭 말로 해야겠니(99쪽).” 말로 자기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건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임을 은근히 드러내 보여주는 명쾌, 아니 통쾌한 대화….

마지막으로, 이 멋진 '인생 대토론(53년생 아빠와 93년생 딸의 토론)'의 독일어 대화를 83년생 대학생이 한국어로 번역한 <아빠, 인생이 뭐예요?>를 읽는 동안 다들 한 번쯤 이렇게 스스로 물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내 인생에 아빠는 누구였을까? 내가 어릴 적에, 나를 진정으로 ‘대화상대자로서’ 존중해주신 분이 계셨다면 그분은 누구였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새가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월간 <새가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빠, 인생이 뭐예요?

피에르 프랑크 외 지음, 임정린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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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수업], [해나(한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커뮤니케이션북스, 2020)], [박원순의 죽음과 시민의 침묵], [(2022세종도서) 환경살림 80가지] 출간작가 - She calls herself as a ‘public intellectual(지식소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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