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 김씨는 눈이 온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원규 시인의 '행복한 시 쓰기' 초청강연을 듣고

등록 2007.05.02 10:00수정 2007.05.03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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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의 눈은
맑다 슬프다 예쁘다

그런데
소고기 국물은 맛있다


어떡하지? -시, 송아지(초등학교 1년생 작품)


시가 재미있다. 아니, 심각하다. 지은이는 단 5행으로 시를 끝냈지만 시는 여전히 펄펄 살아 있다. '어떡하지?' 라는 진솔한 질의 때문이다. 정말 어떡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답이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송아지의 눈이 맑고 슬프고 예쁜 것도 진실이고, 소고기 국물이 맛있는 것도 진실이기 때문이다. 두 진실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 막다른 골목에서 시가 탄생한 셈이다.

좋은 시인은 좋은 시를 안다

a 이원규 시인

이원규 시인 ⓒ 안준철

지난달 27일 저녁 7시, 순천 중앙서점 3층 세미나실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 순천지부(이하 순천작가회의)가 주최하는 '문예창작아카데미'가 열렸다. 그 첫 번째 강사인 이원규 시인이 극찬한 시가 바로 위에 소개한 초등학교 1년생이 쓴 '송아지'라는 시다. 시인은 일반인 학생이 모두 참가한 백일장 대회에서 이 작품에 최고의 영예인 천왕봉상을 안겨주고 싶었단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수포로 돌아가고 동석한 심사위원들로부터 이상한 사람 취급만 받았다고 한다.

좋은 시인은 좋은 시를 안다. 좋은 시를 아는 사람이 좋은 시인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시를 써야 시인이다. 하지만 좋은 시를 쓰지 못하더라도 좋은 시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마치 가야할 방향을 알고 길을 가는 것과도 같다. 반대로 그의 마음에 좋은 시에 대한 그림이 잘못 그려져 있다면 시를 쓰는 일이 향방 없는 주먹질처럼 공허한 일이 되기 십상이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사전을 갖다놓고 어려운 말만 골라 시를 썼던 기억이 난다. 당시는 그것이 일종의 유행이었다. 이른바 난해시다. 지금도 자기도 모르는 시를 써놓고 애꿎은 독자만 고생시키는 고약한 시인들이 좀 많은가. 그들의 고약한 취미로 인해 불편한 것은 비단 독자만이 아니다. 시인 자신도 필경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이원규 시인은 중학생부터 머리가 희끗한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을 이룬 30여명의 예비 시인들 앞에서 '행복한 시 쓰기'를 강조했다. 약 2시간 가량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이원규 어록을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시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귀에 솔깃한 말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그 중 '똥'과 관련된 몇 가지만 소개한다.


'내 똥을 내가 똑바로 보자.'
'똥을 보면 그 사람의 24시간 알리바이가 나온다.'
'똥이 가장 유력한 역사다.'
'현대인은 자기 똥을 확인하지 않는다.'
'똥을 쳐다보면 자기를 안다.'


고상한 시를 앞에 두고 도대체 무슨 난데없는 똥 타령인가? 하지만 가만 새겨들을수록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다. 시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지금은 화장실이 수세식이어서 자기가 싼 똥을 보기가 어려워요. 그냥 싸고 물을 내려버리니까요. 전날 술을 많이 먹으면 똥에서 나는 냄새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니까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뭔가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반성도 하고 그럴 텐데 현대인들은 그럴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거지요. 내 똥을 내가 똑바로 볼 수 있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는데 말입니다. 물론 비유로 하는 말입니다만."

만약 그가 말미에 '비유'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정말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뻔했다. 그런데 비유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결국 시인은 자기성찰이 없이는 좋은 시를 쓰기 어렵다는 얘기가 되겠는데 그러한 적나라한 자기성찰의 행위가 실제로 내 똥을 내가 똑바로 바라보는 것보다 덜 고통스럽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이원규 시인은 지금 구례군 토지면 구산리에 살고 있다. 시인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지리산 자락에 둥지를 튼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렇다고 마냥 산 속에 묻혀 지낸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도심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세상과 소통한다. 인간의 탐욕에 의해 끊어진 길을 잇기 위해 걷고 또 걷는다.

그는 날로 오염이 가속화되어 썩어가는 낙동강 1300리를 걸었고, 지리산 850리와 백두대간 1500리를 걸었으며, 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를 지원하며 부안에서 서울까지 걸었고, 도법, 수경 스님과 함께 '생명평화의 탁발순례단'의 일원으로서 매달 천리 길을 걷기도 했다. 그에게 그런 공공선을 지향하는 거룩한(?) 행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천상 시인일 뿐이다

a 순천작가회의와 함께 하는 <문예창작아카데미>가 지난 21일부터 순천중앙서점 3층 세미나실에서 열리고 있다.

순천작가회의와 함께 하는 <문예창작아카데미>가 지난 21일부터 순천중앙서점 3층 세미나실에서 열리고 있다. ⓒ 안준철

그는 구례에서 순천을 넘어올 때 그의 재산목록 1호인 오토바이크(오토바이는 일본식 발음으로 잘못된 이름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를 타고 온다. 그가 살고 있는 집보다도 더 값비싼 물건을 타고 그냥 하릴없이 꽃의 속도나 구름의 속도로 달리기도 한다. 그가 남들이 불러주는 지리산 시인이라는 고상한 별칭을 고사하고 지리산 폭주족으로 불러지기를 바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보기에 폭주족이 되기에는 마음의 속도가 너무 느려터진 천상 시인일 뿐이다.

지난 2월 3일, 그는 섬진강 망덕포구에서 한 매화나무가 첫 꽃망울을 터뜨리기만을 기다리며 무려 3시간 동안이나 쭈그려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동네 할머니가 몇 번 다녀갔다는데 그때 할머니가 시인을 향해 던진 수상쩍은 눈빛은 보지 않아도 그림이 그려지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 덕분에 시인은 백운산이 막아주고 동남쪽이 열려 있어 겨울철에도 따뜻한 기온이 감도는 섬진강 망덕포구가 우리나라에서 첫 매화꽃을 터뜨릴만한 조건을 갖춘 최적지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의 관찰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같은 밭에서 자라는 나무들 중에도 맨 먼저 꽃을 피운 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뭔가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처였다. 상처가 나무를 긴장시켜서 꽃을 먼저 밀어올린 것이다. 태풍 루사 때에는 벚꽃나무가 바람에 찢겨졌는데 그 해 가을 나무에서 꽃이 피었다고 한다. 상처로 인한 긴장이 새끼를 키우려는 생존본능을 자극하여 때 아닌 가을에 꽃을 피운 것이다.

이원규 시인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시를 뒤따라가지 말고 시가 등 뒤에 따라오게 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시가 등 뒤에 따라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시를 쉽게 얻으려는 성급한 마음을 버리고 몸을 먼저 움직여 시적 대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라는 말일 성 싶다. 그가 강의록에 써놓은 글을 직접 읽어보자.

'먼저 대상을 향하여 몸부터 움직여라.
온 몸으로 밀고 나가면 발자국에 빗물처럼, 눈물처럼 고이는 시들을 주어 담자.
시를 생의 가장 밑바닥에, 가장 비루한 곳에 두자.
그래야 창작의 스트레스 없는 행복한 시인,
자기 구원과 타인과의 소통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창작의 스트레스 없는 행복한 시인이라니, 그것이 가당키나 한 얘기일까? 하지만 그의 강의가 끝나갈 무렵, 내 마음 한 구석에서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다만, 그가 내게 한 수 가르쳐 준대로 내 똥을 내가 똑바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남들이 다 쓴 죽은 말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엄마 손등에 있는 흉터 하나로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리고 마을에 눈이 내리자 그것을 맨 먼저 알고 싸리비를 들고 나온 맹인 김씨처럼 늘 곤충적 감각의 새로운 긴장 속에서 시를 쓸 수만 있다면. 아, 맹인 김씨는 어떻게 마을에 폭설이 내린 것을 알았을까? 그의 시를 읽어보자.

산촌 하내리의 겨울밤
자정 넘어 함박눈 내리면
먼저 아는 이 누구일까
제아무리 도둑발로 와도
먼저 듣고 아는 이 누구일까

온 마을길들이 덮여
문득 봉당 아래 까무러치면
맹인 김씨 홀로 깨어 싸리비 챙긴다
폭설의 삶일지라도 살아온 만큼의 길 아니던가
밤새 쓸고 또 쓸다보면
맹인 김씨 하얀 입김 따라 열리는 동구 밖

비록 먼눈일지언정
깜박이는 눈썹 사이 하내리의 아침이 깃들면
맨 먼저 그 길을 따라
막일 나가는 천씨의 콧노래
등교하는 아이들의 자건거 폐달 밟는 소리

비로소 맹인 김씨는 잠을 청한다. - 이원규 시인의 '맹인의 아침'


a 이원규 시인과 함께

이원규 시인과 함께 ⓒ 안준철

덧붙이는 글 | 이원규 시인은 1962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계명대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습니다. 1984년 <월간문학>에 「유배지의 풀꽃」을, 1989년 <실천문학>에 연작시 「빨치산 아내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빨치산 편지>, <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에게>, <돌아보면 그가 있다>가 있습니다. 1998년 제16회 신동엽창작기금을 수혜했습니다.

순천작가회의 (http://cafe.daum.net/sunchonpoem)가 주관하는 <문예창작아카데미>가 지난 4월 21일 이원규 시인의 첫 강의 이후, 5월 3일(목)부터 5월 31일(목)까지 매주 목요일 저녁 7시에 중앙서점 3층 세미나실에서 열립니다.

덧붙이는 글 이원규 시인은 1962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계명대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습니다. 1984년 <월간문학>에 「유배지의 풀꽃」을, 1989년 <실천문학>에 연작시 「빨치산 아내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빨치산 편지>, <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에게>, <돌아보면 그가 있다>가 있습니다. 1998년 제16회 신동엽창작기금을 수혜했습니다.

순천작가회의 (http://cafe.daum.net/sunchonpoem)가 주관하는 <문예창작아카데미>가 지난 4월 21일 이원규 시인의 첫 강의 이후, 5월 3일(목)부터 5월 31일(목)까지 매주 목요일 저녁 7시에 중앙서점 3층 세미나실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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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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