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착한' 사르코지, '성난' 루아얄에 승리?

[해외리포트] 프랑스인 2천만명이 지켜본 대선 결선 TV토론

등록 2007.05.04 18:32수정 2007.05.04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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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EPA HORACIO VILLALOBOS


10대의 세골렌 루아얄(53) 사회당(PS) 대선 후보는 아버지를 법정에 세운 일이 있다. 이혼한 아버지가 양육비를 제때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10대의 니콜라 사르코지(52) 집권 대중운동연합(UMP) 후보도 기숙사비를 지급하지 않는 아버지를 고발한 바 있다. 작가 장 콕토의 표현을 빌면 루아얄과 사르코지는 '앙팡 테리블(Enfants terribles, 무서운 아이들)'이었다.

'앙팡 테리블', 외나무다리에서 격돌

'앙팡 테리블'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한판 승부였다. 2007 프랑스 대선 결선을 나흘 앞둔 지난 2일 사르코지와 루아얄은 유권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5개월여에 걸친 선거전을 '총정리'했다. 결선에 오른 후보의 필수 과목인 TV 토론회가 그 무대.

토론은 프랑스 최대 민영 TV 채널 <테 에프1(TF1)>과 공영 채널 <프랑스2(france2)>가 주축이 됐으나 최소 9개 채널을 통해 생중계됐다. 케이블과 위성 채널이 가세했기 때문이다.

평소 흰색과 붉은색의 정장을 선호해온 루아얄은 이날 검은색, 사르코지는 짙은 청색 정장 차림으로 사각의 링에 올랐다. 관객이 없는 20㎡의 무대 또한 경기장처럼 꾸며졌다. 그리고 추첨에 따라 좌파 루아얄은 무대 왼쪽에, 우파 사르코지는 오른쪽에 마주보고 자리했다. 두 방송을 대표하는 스타 진행자 아를레트 샤보와 파트릭 푸아브르 다르보르가 두 후보 사이에서 주심 노릇을 했다.

1974년 시작된 결선 후보의 TV 토론은 올해로 5회를 맞았다. 단 한차례 TV 토론이 취소된 일도 있다. 2002년 대선에서 자크 시라크 현 프랑스 대통령이 결선에 오른 극우 정당 국민전선(FN)의 장-마리 르펜 후보와 토론을 거부했던 것. 12년 만에 처음 열리는 토론인 까닭에 후보들의 TV 토론을 처음 접하는 유권자도 적지 않았다.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마치 월드컵 결승전처럼 생방송으로 중계된 이날 두 후보의 토론을 '관전'한 시청자는 2000만명~2300만명에 달했다. 대형 TV가 설치된 카페나 레스토랑, 디스코텍 등지에 모여든 시민들은 맥주를 마시며 '응원전'을 펼쳤다. 친구나 가족을 집에 초대해 TV 브라운관에 열중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월드컵 '서포터'를 연상시켰다.

루아얄과 사르코지는 서포터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애초 저녁 9시부터 2시간 동안 토론이 예정됐으나, 두 후보의 설전은 예정 시간을 30분이나 넘기며 활발하게 진행됐다.

성난 루아얄, 침착한 사르코지

사르코지는 차분했고 루아얄은 공격적이었다. 예상했던 태도였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를 기록해온 사르코지는 현재 '스코어'를 유지하는 것이 목표였고 루아얄은 상대의 아성을 무너뜨려야 했으므로.

두 후보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평소 '난폭하고 호전적'인 인상으로 각인된 사르코지는 '의외로' 침착한 이면을 선보였다. 반면 초반 30분 동안 사르코지에 밀리는 듯했으나 곧 평정심을 찾은 루아얄은 한껏 신랄했다.

사르코지가 두 진행자에 주로 시선을 고정했다면, 루아얄은 사르코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마치 '대통령 사르코지'가 정부 정책을 옹호했다면 루아얄은 '야당 총재'로서 정부를 비판하는 형국이었다. 동시에 각 사안마다 포괄적인 시각을 제시한 루아얄은 '큰 인물'을 부각시킨 반면, 지난 5년 우파 정부의 업적을 세세한 사례를 들어 설명한 사르코지는 보고서를 든 내무장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선 1차 투표에서 지적된 것처럼 두 후보는 국내 문제에 치중한 나머지 유럽연합(EU) 헌법을 비롯해 이란, 다르푸르 등 국제 문제에는 여전히 소홀했다. 까다로운 주제로 예상했던 이민 정책도 신속하게 지나갔다. 주 35시간 노동을 비롯한 경제와 치안 분야에 취약한 루아얄은 환경, 교육 분야 전문가로서 면모를 발휘했다. 토론의 절정은 예측하지 못한 장애 아동 취학 문제에서 폭발했다.

"대통령은 쉽게 흥분하면 안 됩니다. 평소 침착한 마담 루아얄이 왜 이렇게 신경질적인지 모르겠군요."
"나는 신경질이 난 게 아니라 분노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건전한 분노예요. 대통령이 된다 해도 부당한 처사에는 분노할 겁니다. 신경질이 아녜요."
"마담 루아얄이 신경질나면 볼만하겠군요."
"나는 냉정합니다."
"금방 냉정을 잃었어요."

현 우파 정권이 장애아동 취학 보조정책을 소홀히 했다며 이것을 '정치적 비도덕성'이라 규정한 루아얄은 '전사'처럼 사르코지를 공격했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사르코지는 조롱으로 응수했다. 그러나 장애아동 대책에 관한 루아얄이 제시한 자료는 '오보'였다. 전세가 뒤바뀌기도 했다.

"상처를 받으면 국민은 분열됩니다."
막대한 국가 부채 등 우파 정부의 과오를 공격하는 루아얄을 향해 사르코지는 안타까운 듯 항의했고, 때를 놓치지 않고 루아얄의 비아냥이 돌아왔다.
"상처 받았습니까? 잘 됐군요."
"누구나 신경질을 부릴 수 있는 거예요."

바이루 "사르코지에게 투표하지는 않겠다"

사르코지는 평소 비판의 대상이 됐던 루아얄의 역량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신은 날카로운 질문에는 대답을 회피하는 재능이 있군요."
한 발 더 나아가 사르코지는 줄곧 루아얄을 '마담'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훈계하기도 했다.
"명석해 보이기 위해 시건방질 필요는 없습니다."

이날 토론의 근본적인 목적은 부동층 공략이었다. 특히 대선 1차 투표에서 각각 3, 4위를 차지한 두 후보, 프랑스민주연합(UDF)의 프랑수아 바이루와 르펜의 유권자들이 주 표적이었던 것. 바이루와 르펜은 1차 투표에서 각각 680만과 380만의 표를 끌어모았다. 이를 증명하듯 토론 다음날인 지난 3일 바이루는 일간지 <르 몽드>를 통해 선언했다.
"사르코지에게 투표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TV 토론 직후 발표된 세 개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사르코지가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간격은 기록적으로 벌어졌다. 4일자 일간지 <르 피가로>가 여론조사 기관 TNS-소프레스에 의뢰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르코지는 54.5%의 지지를 얻어 45.5%를 기록한 루아얄을 9%P 앞질렀다. 지금까지 나온 결과 중 가장 큰 차다.

같은 날 또 다른 여론조사 기관 입소스는 사르코지 54%, 루아얄 46%로 발표했으며 이보다 앞선 3일자 일간지 <르 파리지앵>이 공개한 CSA-Cisco의 자료는 사르코지 53%, 루아얄 47%로 기록됐다. TV토론을 기점으로 루아얄의 지지도가 점차 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유권자들은 결국 '공격적인' 루아얄보다 '침착한' 사르코지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 TV토론 다음날인 지난 3일 여론조사 기관 오피니언웨이의 조사 결과 사르코지 쪽이 설득력이 있었다고 대답한 프랑스인이 53%였다. 루아얄은 31%에 그쳤으며 16%는 대답하지 않았다. TV 토론을 통해 부동층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한편 결선 투표를 이틀 남긴 4일 루아얄은 브레스트, 사르코지는 오트-사부아를 끝으로 5개월여에 걸친 유세를 마감한다. 그리고 이날 자정을 기해 여론조사를 비롯한 모든 선거전이 엄격히 금지된다.

대선 결선 TV토론이 남긴 말, 말, 말

대선 결선에 오른 두 후보의 TV 토론은 투표 당일을 제외하면 프랑스 대선의 절정이다. 결선 후보의 TV 토론이 처음 실시된 1974년에는 총 2900만 등록 유권자 중 2500만명이 TV토론을 지켜봤다. TV토론은 결선 투표 직전에 실시된다는 점에서 유권자의 선택을 좌우하는 열쇠라고 해도 무방하다. 때문에 토론 사이사이 '살인적인' 발언이 관건이었다. 역대 후보들이 쏟아낸 촌철살인의 한마디는 유권자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각인됐다.

1974년 5월 10일,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VGE) 장관과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가 프랑스 대선 사상 처음으로 벌인 TV 토론.
"이것은 두뇌뿐만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좌파 후보 미테랑은 경제 성장과 분배 문제를 지적하며 VGE를 공격했고 VGE는 이렇게 반박했다.
"당신은 마음의 독점권이 없습니다."
VGE는 대선에 성공했다.

1981년 5월 5일, 대통령 VGE와 미테랑이 다시 만났다. 그리고 이제는 카메라에 익숙해진 미테랑의 복수가 시작됐다. 미테랑은 자신을 '과거의 남자'라 정의하는 VGE를 일러 '무기력한 남자'라 공격했다. 미테랑의 승리였다.

1988년 4월 28일, 이번에는 대통령 미테랑과 총리 시라크의 차례였다. 시라크는 말했다.
"오늘 저녁, 당신은 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닙니다. 나는 총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동등한 후보입니다…. 내가 당신을 미테랑씨라 불러도 되겠지요?"
미테랑은 가소롭다는 듯이 일갈했다.
"당신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총리."
'시라크씨'가 아니라 '총리'라는 이름을 말미에 붙임으로써 미테랑은 시라크에게 한 방 먹이는 데 성공했다. 다시 미테랑의 승리.

1995년 5월 2일, 파리 시장 시라크와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은 지난 미테랑 대통령 정부의 결산을 주제로 대립했다. 정중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 토론에서 조스팽은 돌연 대통령 임기 5년제를 주장하며 시라크를 몰아붙였다.
"조스팽과 함께 5년이 시라크와 7년보다 나을 겁니다."

2002년 4월, 극우당 국민전선(FN)의 장-마리 르펜이 결선에 오르자 시라크는 '증오를 보편화하는' 극우파를 상대로 하는 토론을 거부했다.
"나는 단 한 번도 극우파를 인정한 일이 없습니다."
르펜은 이것이 '딱한 회피'라며 격분했다. 여론은 시라크의 편이었다.
#프랑스 대선 #루아얄 #사르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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