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34명, 자살 권하는 한국사회

[주장] 21세기, 풍요의 시대에 자살은 늘어간다

등록 2007.05.07 12:07수정 2007.05.07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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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난 2003년, 노동탄압 중단, 이라크 파병 철회, 근본적 정치개혁을 촉구하며 민주노동당 지구당위원장들이 여의도 국회앞에서 비상시국 노상농성을 벌였다. 농성장에는 자살한 노동자, 농민을 추모하는 분향소가 마련되었다.

지난 2003년, 노동탄압 중단, 이라크 파병 철회, 근본적 정치개혁을 촉구하며 민주노동당 지구당위원장들이 여의도 국회앞에서 비상시국 노상농성을 벌였다. 농성장에는 자살한 노동자, 농민을 추모하는 분향소가 마련되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빙허 현진건이 1921년 <개벽>에 발표한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는 식민지 조선에서 아무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인텔리를 다룬 작품이다.

무슨 일을 하려 해도 다 막혀버린 출구. 명예와 권리·지위만을 탐하는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 무리. 여기에 더하여 자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 그리하여 그가 도달한 마지막 지점은 '술주정꾼'이 되는 것이다.

불과 두 해 전에 있은 3ㆍ1운동의 드높은 기개와 용솟음치던 힘은 사라져버렸다. 해방과 독립의 열망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문화정치'로 옷만 바꿔 입은 일제의 교활한 통치방식의 본질은 요지부동이었다. 3ㆍ1운동 결과 조선인들은 최소한도의 숨통을 얻었으나, 민족해방의 대의에 복무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루에 34명씩 죽는다, 왜 그럴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30개 나라 가운데 한국의 자살률이 1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말로 우울한 이 소식은 각종 대형사건에 묻혀 슬며시 사라졌다. 한 때 부동의 세계1위를 고수했던 '자동차로 인한 사망률'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건이다. 자살의 근본 원인이 사회에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2005년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에 24.7명 꼴이라 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자살 사망자가 가장 많은 헝가리의 22.6명을 능가하는 수치다. 하루 평균 34명, 1년에 1만 2000명 정도가 자살한다는 이야기다. 1982년만 해도 우리나라의 인구 10만명 기준 자살사망자 수는 6.8명에 불과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희망이 있는 사회의 구성원은 쉽게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언젠가 다가올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이 있는데 왜 죽음을 선택하겠는가. 그토록 악랄하고 무도했던 광주학살 주범 전두환의 제5공화국 쇠발톱 아래서도 꿋꿋하게 삶을 지탱했던 민초들이 오늘날 자살로써 앞다투어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를 곰곰 생각해야 한다.


희망이 있다면, 쉽게 죽지 못한다

자살은 '고의적으로 자신을 죽이는 행위'를 뜻한다. 모든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기 보존본능은 매우 보편적이고 강력하며 근본적인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그런 본능을 포기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생을 마감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세계적으로 100개 정도 언어로 된 5000여 권에 이르는 책에서 자살이 다루어졌다고 한다.

자살에 대한 상세한 고찰로 한국의 자살률 문제를 어지럽히지는 말자. 사람들이 왜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리는지 생각해보자.

자신의 삶에 대한 배려를 완전히 상실할 때 인간은 절망에 빠지고, 자살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이 세상 어느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자기를 배려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자살을 선택한다는 말이다.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사회라고 하지만 자살자들의 행렬이 길수록 사회의 건강 척도가 취약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 사회는 인간이 건강하게 생을 유지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끈을 놓지 않도록 하는 사회가 아니란 이야기다. 끝없이 다가서는 죽음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도록 인도하는 사회에서 자살자들의 숫자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을 부추기는 병적인 현상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서울시내 초·중·고교 재학생의 4분의 1 정도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 서강대학교 조사 결과 절반이 넘는 신입생이 자살충동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대학입시로 표현되는 무한경쟁의 시간과 공간을 질주해야 하는 어린것들이 오늘도 자살의 유혹과 만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소득 전국하위 20% 가구는 월평균 35만 7100원씩의 적자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빚에 의지하는 인생이 전체의 5분의 1인 셈이다. 반면 전국상위 20% 가구는 월평균 191만 8500원의 흑자를 거두며, 그만큼을 저축 등으로 남겼다. 나날이 심화되는 사회양극화로 인한 소득불평등은 불안과 절망의 상황으로 민초를 몰아가고 있다.

a 지난 2005년, '쌀협상 국회비준저지 비상대책위원회' 집회에서, 쌀개방에 반대하며 음독자살한 고 오추옥씨의 남편이 울먹이며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5년, '쌀협상 국회비준저지 비상대책위원회' 집회에서, 쌀개방에 반대하며 음독자살한 고 오추옥씨의 남편이 울먹이며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는 죽었다, 그러나 아무도 미안해 하지 않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가져올 사회양극화는 두말할 나위 없다. 소와 돼지를 비롯한 농축산물 가격은 바닥모를 정도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감귤농사를 짓는 제주도 농민들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이미 양산된 비정규직에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이 추가될지 모른다. 사회안전망은 턱없이 부족하고, 민초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가는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한 노동자 허세욱씨가 분신으로 생을 마감했을 때, 정부의 어느 누구도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가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몰고간 자들은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 국익의 이름으로 그들이 관철한 것은 국민 한 사람을 개인적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국가적 타살로 인도하였다.

그 자들이 말하는 국익에 노동자, 도시빈민, 농어민을 위한 자리는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며 스무날 넘게 단식한 정치인에게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대선용 생쇼'라고 쏘아붙였다. 최소한도의 의사소통과 인간적인 배려가 완전하게 실종된 요즘 한국사회는 분명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상자나 고물을 주우러 거리를 헤매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라.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우리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가슴 아픈 장면이다. 노숙자들과 더불어 그들이 죽음의 유혹을 느끼도록 정부가 법적-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라. 인간적인 가치의 실종이 불러온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이다.

미국표준이 세계표준이란 등식에 사로잡힌 '시장만능주의' 신봉자들인 경제 관료들에게 포위되어 표류하는 정부를 질타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을 버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높아만 가는 자살률을 낮추는 문제에 보건복지부도 청와대도 관심이 없다고 해서 우리마저 마지막 끈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고, 끝내 사람만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관심없다, 그래도 우린 포기할 수 없다

자살자들의 묘비에 쓰이는 아랍속담이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서있는 것보다 앉아 있는 것이 낫고, 앉아있는 것보다는 눕는 것이 낫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서있는 것이 앉아있는 것보다 낫고,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자살>, 도서출판 새움, 14쪽.)

아무리 손쉽다 해도 자살이라는 수단을 강구하도록 민초들을 방기하는 정부 당국자나 최고위정자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무한경쟁으로 치달리는 한국사회의 광적인 질주는 엄청난 폭발과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1920년대의 '인텔리' 술주정꾼이 아니라, 21세기 풍요의 시대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가난한' 자살자를 줄이도록 진력할 시점이다.

a 지난 4월 18일 한미FTA 협상을 반대하며 분신사망한 택시노동자 고 허세욱씨의 노제와 추모제가 서울시내에서 열린 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하관식이 열렸다.

지난 4월 18일 한미FTA 협상을 반대하며 분신사망한 택시노동자 고 허세욱씨의 노제와 추모제가 서울시내에서 열린 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하관식이 열렸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자살 #허세욱 #양극화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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