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노름마치를 알리는 대국민 보도자료

담양 촌놈이 쓴 기생, 무당, 광대, 한량 이야기

등록 2007.05.07 21:30수정 2007.05.07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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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서편제, 동편제는 들어봤음직하나 중고제란 말은 생소하다. 이제는 그 명맥마저 사라질 위기에 놓은 중고제 판소리의 마지막 증인 심화영 할머니가 "왜 인자 왔어"라 말하는 듯한 젊은 시절 심 명인의 사진 앞에서 손녀가 비녀를 꽂아주고 있다

서편제, 동편제는 들어봤음직하나 중고제란 말은 생소하다. 이제는 그 명맥마저 사라질 위기에 놓은 중고제 판소리의 마지막 증인 심화영 할머니가 "왜 인자 왔어"라 말하는 듯한 젊은 시절 심 명인의 사진 앞에서 손녀가 비녀를 꽂아주고 있다 ⓒ 이창수

몇 해 전, KBS 특집 다큐멘터리 한 편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적이 있다. ‘소리’라는 제목으로 진도 씻김굿 당골 채정례, 천하제일구음 진주 김수악, 중고제 판소리의 마지막 증인 심화영 등의 모습과 더불어 역사의 뼛속 깊이 배여 있는 진정한 이 땅의 소리들을 화면과 함께 담았다.

그 다큐멘터리가 뛰어난 작품성과 기록성을 인정받아 후일 큰 상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문화에 관심을 둔 많은 사람들을 TV앞으로 끌어들였다.


2003년도 당시 KBS 창사30주년기념 특집 다큐멘터리가 전파를 타면서 전통문화계는 심연의 흔들림을 경험해야 했다. 이미 알려진 얼굴들이면서도 새삼 방송이라는 매체를 통해 다섯 예인은 기존 문화재라는 틀 안에서 인식되던 전통문화에 대한 기준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문화재 중심의 전통문화계가 단박에 뒤집히진 않았지만, 전통문화를 바라보는 또 다른 건강한 시각을 낳은 것만은 분명했다.

거기엔 기생, 무당, 광대 등 지금은 다소 달라진 원래의 신분으로 삶의 대부분을 살아온 사람들이 등장한다. 기실 현재의 전통문화라는 것이 애초에 그것들로 말미암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당시의 신분이 워낙 낮았던 까닭에 이심전심으로 그 시절 얘기를 꺼렸던 시절을 겪었던 터라 알면서도 놀라웠던, 전통문화의 원형의 이야기지만 한편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a 기생.광대.무당,한량 이제는 있는 듯 없는 20세기 초기의 문화주역들. 그들을 맨가슴으로 기록한 20세기 마지막 문화기록 '노름마치'

기생.광대.무당,한량 이제는 있는 듯 없는 20세기 초기의 문화주역들. 그들을 맨가슴으로 기록한 20세기 마지막 문화기록 '노름마치' ⓒ 생명나무

보통 주류를 위협하는 파문은 커지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말없이 높은 문화계 장벽 앞에 5부작 다큐멘터리가 던진 파문은 이내 잠잠해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 다큐멘터리의 중심에 있던 한 사내는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그들을 무대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들이 선 무대는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과 기억으로 새겨졌다.

그렇게 이어지는 무대의 화룡정점은 2005년 가을 시댄스(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 이뤄졌다. 공연제목조차 ‘전무후무’였던 춤에도, 예술에도 내공이 얼마나 심오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를 세상에 여실히 증명해주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도 관람하고는 공연 후 예인들을 직접 만나기도 할 정도였다.

다큐멘터리에서, 무대에서 징검다리처럼 만나던 그 예인들. 아니 통틀어서 노름마치(고수 중 고수)라 일컫는 것이 옳은 이들을 두 권으로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5부작 다큐멘터리나 그후 전통예술계를 깜짝 놀라게 한 숨은 고수들을 무대에 올린 공연은 모두 한 사람의 발품이 발판이 되었다. 전통무용 기획과 연출을 하는 진옥섭이 그 주인공.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내가 과거 기생입네, 무당이었네 하고 드러낼 사람은 없다. 적어도 우리 사회 분위기 속에선 아직 없다. 게다가 줄곧 문화판에서 영위하고 있다면 또 혹시 모를까 과거를 숨기고 조용히 초야에 묻힌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숨가쁜 역사가 까맣게 잊고 지낸 춤과 노래의 진정한 고수들을 담양출신 촌놈이 발품, 말품 팔아서 기적처럼 다시 세상으로 유인했고,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고 또한 커다란 공헌이 되었다.

촌놈다운 우직함과 밀어붙이는 근성으로 찾아 나선 노름마치 36명은 진옥섭이 청춘과 맞바꾼 것이다. 그중 우선 18명의 기록을 2권 책으로 엮었다. 진옥섭의 예인명인 노름마치(생각나무 출간)는 정말 저자 진옥섭이 그들의 삶과 예술을 제 눈물 쏟아내듯 글로 옮겼고, 제 살을 깎아내듯 절제하여 쓴 책이다.


a '걷기는 두려워도 춤사위는 학같이 나비랠라.' 마지막 동래한량 문장원 옹은 지팡이에 의지해서 겨우 걸음을 떼면서도 춤을 유혹하는 음악에는 학인듯, 나비인듯 변신한다.

'걷기는 두려워도 춤사위는 학같이 나비랠라.' 마지막 동래한량 문장원 옹은 지팡이에 의지해서 겨우 걸음을 떼면서도 춤을 유혹하는 음악에는 학인듯, 나비인듯 변신한다. ⓒ 김기

이 두 권의 책은 20세기 민중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저자 자신이 워낙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이 깊은지라 문장 하나하나가 눈에 꼭꼭 씹힐 정도로 달콤하고 고소하다. 저자는 서문에 해당하는 프롤로그 제목을 ‘이 책은 보도자료입니다’로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 내용의 대부분은 저자가 해당 예인들의 공연을 위해 쓴 보도자료들을 갈고닦아 정리한 것이다. 다만 당시는 기자에게 보낸 보도자료라면, 이번 출판한 두 권은 대국민 보도자료인 셈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문화는 대게 조선시대 그것도 후기의 것이 대부분이다. 앞서 말한 무용공연 ‘전무후무’ 출연자 평균연령이 80을 넘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듯이 이 책에 등장하는 18명의 노름마치들은 딱 그 조선후기의 문화를 그대로 전할 수 있는 마지막 생존자들이다.

노름마치란 놀다의 노름과 마치다의 마치가 결합된 말로, 최고의 명인을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조용필이 무대에 선 후 또 다시 누군가 무대에 서는 일이 없어서 누군가 늦거나 하면 우스갯소리로 ‘저가 무슨 조용필이라고...’ 지청구를 준다. 이때 조용필의 의미가 바로 노름마치이다. 더 이상은 없는 최고경지의 명인. 그것이 바로 노름마치이다.

a 노름마치의 저자 진옥섭.

노름마치의 저자 진옥섭. ⓒ 진옥섭

이 책에는 19명의 노름마치가 등장한다. 색인에는 18명의 예인이 나오지만 그들을 알아보고 막걸리 잔에 코박을 각오로 먼지 나는 시골길을 제 마당 드나들 듯 오간 진옥섭 또한 안목의 노름마치이고, 또한 읽어보면 알겠으나 말의 노름마치임이 분명하다. 사람마다 문화예술에 대한 취향과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진옥섭이 고른 36명만이 노름마치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의 마지막 물을 먹은 노름마치라는 점에는 이견을 달지 않아도 좋다.

진옥섭은 이들 노름마치들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예술을 드러낸다. 당연하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껏 보아왔던 어떤 책의 내용보다 절실하다. 책에서 보고 다시 쓴 책이 아니라, 몸으로 겪고 가슴으로 부대낀 감동과 갈망으로 찾아다닌 것들임을 굳이 누구의 소개가 없더라도 읽기만 하면 눈치 챌 수 있기 때문이다.

무용에 눈을 떴던 93년에는 월간 <객석>에서 무용평론상을 받기도 했으니 말솜씨는 있을 법하다. 거기에 울며불며 매달린 숱한 세월이 더해져 저자 스스로 ‘촌부회담체’라며 짐짓 겸양도 보였지만 추리소설이나 연애소설도 아니고도 어휘 하나, 문장 한 줄이 이토록 눈에 꼭꼭 씹히는 책도 드물 것이다. 아마도 두 권의 책을 다 읽은 독자라면 다시 서문을 읽게 될지 모르겠다. 이 책을 다 읽을 때쯤이면 저자가 서문 끝머리에 남긴 여운이 가슴에 와닿게 된다.

‘책을 쓰면서 길을 다시 걸었다. 포플러 흔들리던 신작로길이 검은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그 길에 손 흔들어주시던 분들. 지금은 돌아가신 분이 많다. 바람결에 금세라도 다가올 듯, 불시에 추억이 엄습했다. 그 나이 그 때의 걸음을 생각해보니,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을 마중가는 길이었다“라고 대국민 보도자료에 점을 찍은 저자의 심정과 함께 눈시울 붉히게 된다.

걷기는 두려워도 춤은 두렵지 않다는 마지막 한량 문장원, 춤추는 슬픈 어미 장금도. 이 책을 통해 만나는 노름마치 모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20세기의 마지막 기록이다. 슬프거나 혹 모르고 산 가책이 후폭풍으로 밀어닥칠지라도.

노름마치 - 진옥섭의 사무치다

진옥섭 지음,
문학동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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