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면 어때 아트하겠다는데....

예술가 꿈꾸는 직장인들, 낮엔 일터 밤엔 작품생활

등록 2007.05.09 11:29수정 2007.05.0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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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이재은 기자] 직장인 K씨는 이른 아침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을 타고 출근할 때마다 생각한다. '눈꺼풀이 늘어질 정도로 늦잠을 자고, 늦은 점심을 먹고,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K씨의 본래 꿈은 아티스트였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취미 삼아 미술을 배웠고 대학시절에도 미술을 전공한 건 아니지만 틈틈이 유화, 수채화 등을 그리며 아마추어 작가 활동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어디 그리 많은가. 그 역시 그림 대신 토익점수 따는 데 열을 올린 끝에 간신히 취업했고 내년 대리 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렇게 아티스트의 꿈은 현실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K씨는 요즘 새로운 꿈을 꾼다. 그 꿈이란 그동안 자신이 작업한 그림과 조각들을 모아 전시회를 여는 것.

K씨처럼 가슴 한쪽에 묻어둔 아티스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늦깎이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이른바 '아마추어지만 괜찮아' 족이다. '프로'의 타이틀을 달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작품 활동에 몰입한다. 어찌 보면 투잡이다. 이들을 '시민작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최근 서울의 경우 홍대 앞, 인사동 일대에 작품을 전시, 판매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고 시민작가들의 활동을 독려하는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아마추어지만 괜찮아'를 외치며 행복한 꿈을 꾸는 시민작가들. 이들은 왜 작가를 희망하는 걸까?

"제 작품에 대한 애착과 '내 것'을 알아봐주는 사람들의 기대에 대한 보답이죠."

1년 전부터 홍대 앞 희망시장에서 수공예 스타킹을 판매하고 있는 최모(31·CG디자이너)씨의 말이다. 그저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 나온다는 설렘, 그리고 그 자식 같은 작품들에 관심을 쏟고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기쁘고 행복한 것이다.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 것도 그가 주말을 다 털어 투잡족으로 활동하는 이유다.

물론 작품을 팔아 부수입을 올리지만, 돈은 큰 관심 사항은 아니다. 많이 버는 날은 많이 벌어서 좋고 적게 버는 날은 또 그대로 하루를 즐긴 것에 만족한다. 실제로 하루 판매액도 5만원에서 30만원까지 들쭉날쭉하다.

젊을 때는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자신의 꿈이 뭔지, 자신이 뭘 잘할 수 있는지조차 잊고 지낸 가정주부들 중에서도 시민작가 활동을 펼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민자(51)씨는 지난해 10년간 틈틈이 만든 퀼트 공예품들을 모아 인사동에서 퀼트 수공예 전시회를 열었다. 세 딸과 남편을 비롯해 친구, 아파트 이웃, 딸의 남자친구 등 많은 이들이 꽃다발을 안고 전시장을 찾았다.

이씨는 자신을 '이 작가'라고 부르며 축하해주는 사람들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고 고백한다. 이제야 내 이름을 찾은 것 같은 기분, 가족들을 위해 헌신한 시간들에 대해 보상 받은 느낌이 혼재된 눈물이었다.
이들에게 시민작가라는 타이틀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것은 주부와 엄마로서만 보낸 세월과의 이별을 뜻하는 동시에 잃어버린 나를 찾는 선언이기도 하다. 잊고 있던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는 수많은 시민작가들. 그들의 야무진 도전은 계속된다.

시민작가들 "일요일 홍대 앞서 희망을 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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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희망시장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개성을 담은 작품을 판매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며 시민작가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 우먼타임스

매주 일요일 홍대 앞은 분주해진다. 지난 2002년부터 6년째 홍익대 정문 앞 놀이터에서 오후 2∼6시 희망시장이 열리기 때문. 희망시장은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데뷔의 장으로, 각종 수공예품, 드로잉, 패션 액세서리, 의류, 모자 등이 판매된다. 작가의 독창적인 개성과 느낌이 담긴 작품인지 아닌지 심사한 뒤 희망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기 때문에 '아무나'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시장에 참가하는 작가들은 20~30명 선. 대부분 투잡족이다. 평일에는 생계를 위한 일을 하고 일요일이면 틈틈이 만든 작품들을 희망시장에 가지고 나온다.

'귀신'이라는 별칭을 쓰는 석지영씨는 오리엔탈 액세서리를 만드는 시민작가다. 희망시장에서 활동한 지는 올해로 3년이 됐다. 오리엔탈 느낌이 묻어나는 반지, 목걸이, 귀고리, 브로치 등 수공예품을 만든다. 똑같은 작품은 하나도 없다. 동양적인 색채가 강한 비즈, 이미테이션 보석들을 일일이 낚싯줄로 엮어서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킨다. 가격은 보통 5000~7000원. 많이 파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하는 것이 석씨가 매주 희망시장에 나오는 진짜 이유다. 중국풍 옷을 입고 오리엔탈 액세서리로 온 몸을 치장한 그의 본업은 공무원. 일주일 내내 쉬는 날이 하루도 없다 보니 감기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몸은 힘들어요. 그래도 마음이 즐거우니까 힘든 줄 모르겠어요. 처음엔 취미 삼아 시작했는데 차츰 눈에 띄게 실력이 향상되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부턴 정말 작품을 만드는 일이 재미있는 거예요. 시장에 참가한 손님들이 이것저것 살펴보다 제 작품 앞에 서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을 할 때면 짜릿한 흥분이 느껴져요."

'쿠키병정'이라는 이름으로 아기자기한 쿠키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 이모씨 역시 투잡족 시민작가다. 평일에는 미술학원 교사로 일하고 일요일에는 쿠키 아티스트로 변신한다. 알록달록한 천연 색소로 다양한 모양의 쿠키를 만든다. 이씨가 만드는 쿠키 작품의 컨셉트는 '선물하고 싶은 쿠키'다.

시민 아티스트로 활동하면서 뒤늦게 꿈을 찾은 중년 여성도 있다. 패션 페인팅을 하고 있는 홍계숙씨는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한 미술학도였다. 졸업 후 전공을 살려 한복에 수놓는 일을 했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일감이 들어오지 않아 빚만 잔뜩 졌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한때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붓을 들었다. 그리고 옷에 자신을 닮은 여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패션 페인팅 작가로 거듭난 것. 희망시장에서 수년째 옷을 판매하면서 이제는 그를 작가로 인정해주는 마니아들도 제법 생겨났다. 명함을 건네며 같이 일을 하자는 사람도 있고, 홍씨에게 패션 페인팅을 배우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쉰이 넘어서야 비로소 오랫동안 염원했던 작가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아직 아마추어예요. 그래도 만족해요. 좋아하는 일을 하고, 많진 않지만 이 활동으로 수입도 얻고 있으니까요."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늦게나마 시작했다는 것. 경제적인 수입보다는 일 자체를 즐기고, 생계를 위한 일과 즐거움을 얻는 일이 분리돼 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더욱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는 점이다. 매주 일요일, 홍대 앞 희망시장으로 달려오는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과 함께 희망을 판매하고 있다.

희망시장에 참여하려면...
작가 등록·운영진 회의 거쳐 엄선... 통과돼도 2개월간 안나오면 퇴출

매주 일요일 서울 홍대 앞 놀이터에서 열리는 희망시장은 시민작가들이 자신의 창작물을 직접 갖고 나와서 선보이는 자리다. 시민작가가 되고 싶어도 희망시장에 당일 찾아가 자신의 물건을 바로 판매할 수는 없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카페에 작가로 등록을 마치면 시장 운영진들의 회의를 거쳐 등록 여부가 결정된다.

희망시장의 작가 등록은 온라인으로만 할 수 있다. 등록하려면 먼저 희망시장 카페(http://cafe.daum.net/hopemarket)에 있는 '작가등록서' 양식을 다운받아 작성한 다음 상세한 작업 과정과 본인 얼굴 등을 찍은 사진과 함께 이메일(rainbowmarket@hanmail.net)로 보내면 된다.

희망시장에서는 작가의 창의성이 없는 작품은 판매할 수 없다. 기존의 재료와 제작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미 존재하는 도안과 패턴을 이용한 작업물, 직접 디자인하지 않은 인쇄물, 재료의 변형 없이 반 이상을 그대로 사용한 작업물 등은 희망시장에 등록할 수 없다.

작가등록서가 통과되었다고 해서 바로 작가 등록이 되는 것은 아니다. 확인 메일을 받고, 예비작가 자격으로 희망시장에 나와 등록한 작업물과 실제 작업을 확인하고 인터뷰하는 2차 심사가 있다. 2차 심사에서는 주로 창작성에 무게를 두고 평가하고, 본인의 작품이 맞는지, 희망시장에 어떠한 마음으로 참가하는지 등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한다. 2차 심사를 통과하면 당일 자리를 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어렵게 시민작가의 관문을 통과해도 작가가 된 후 2개월 이내에 희망시장에 나오지 않은 사람, 1년에 2회 이하로 활동이 저조한 사람, 등록 사진과 다른 작업 스타일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 등은 작가 등록이 취소될 수 있다.

한편,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서울 마포구 대흥동 마포문화센터 앞에서 열리는 마포희망시장은 재활용의 생활화를 위해 마포구청과 희망시장이 함께 준비해 만들었다. 이 시장은 벼룩시장의 성격이 더 강하며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참가 신청은 인터넷 홈페이지(http://mapomarket.com)를 통한 사전 신청과 당일 현장 신청 둘 다 가능하다. / 김병민 기자
#우먼 #여성 #아트 #홍대 #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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