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구장, 양키스 스타디움에 가다

[자전거 세계일주 4] 미국 뉴욕 편

등록 2007.05.11 11:28수정 2007.05.11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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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브롱스(bronx)에 위치한 양키스 스타디움. 1923년 메이저리그에서 세 번째로 개장한 구장으로 55,070명을 수용할 수 있다. ⓒ 문종성

올시즌 그들은 양키스 제국이라는 명성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동굴맨 자니 데이먼, 양키스의 윤활유 바비 어브레이유, 정신적 지주 캡틴 데릭 지터, 'A-Rod'로 불리는 괴물타자 알렉스 로드리게스, 고질라 마쓰이 히데키 등이 버티는 타선은 메이저리그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올시즌 지터와 로드리게스를 제외하고는 타선이 침묵에 빠져있고, 선발진은 노쇠기미를 드러내며 생각만큼 버텨주지 못하고 있었다. 칼 파바노, 마이크 무시나, 왕첸밍이 부상으로 한 차례씩 드러누웠으며 심리적 마지노선인 마리아노 리베라의 화끈한 불쇼(블론 세이브)는 양키스의 분위기를 더욱더 침잠시켰다.

1921년 이후 월드시리즈에 39번 진출했으며 그 가운데 26번의 시리즈 우승을 거머쥔 과거의 화려한 영화가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아닐까? 최상급 선수를 싹쓸이 영입해 리그에서 악의 축으로도 불리는 양키스는 이렇듯 화려한 선수들에도 불구하고 5할 승률에 버거워하며 리그 꼴찌를 달리고 있다.

여기에 조바심이 났는지 아니면 팬들의 비난과 원성을 무마시키려는 의도인지 지난 7일 현역 최고의 대어이자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는 올해 45세의 로저 클레멘스가 양키스에 입단해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처음 가본 미국 야구장...허둥지둥 헤매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경이 얼마나 장엄한지 모른다. 이곳 시각으로 9일 뉴욕 브롱스(bronx)에 위치한 양키스 스타디움을 찾았다. 경기 시작 2시간 전부터 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어느 새 무리의 홍수를 이룬다.

그들은 리그 최강 명문팀인 양키스의 팬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해 보인다. 구장 바깥에는 먹고 마시고 입고 보는 등에 어떻게든 양키스와 관련한 매장이 즐비하고, 길거리에서는 상인들이 팬들의 입이 심심하지 않게 주전부리들을 팔고 있다.

나는 가난한 여행객인지라 16불짜리 레드석 자리를 구입했다. 구장 맨 꼭대기에 자리잡은 좌석이다. 하지만 경기를 관전하기에는 그만큼 탁 트인 공간도 없다. 물어물어 티켓은 구입했지만 미국 야구장이 처음인지라 허둥지둥 헤맨다.

가방은 가지고 들어가면 안 된단다. 그래서 옆 볼링장에 거금 5달러를 주고 맡기고 들어가야 했다. 카메라는 되지만 비디오 카메라는 들고 갈 수 없고(사실 요즘처럼 디카가 동영상 기능도 커버하는 시대에 원칙이 애매하다), 음료도 페트병은 되지만 유리병은 안 된다.

또 불투명 백이나 비닐은 입장 불가이기에 야구장 안에 들고 가는 모든 물건은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투명 비닐에 담아 가져가야 한다. 정보의 부재로 이런저런 제약을 받다보니 내 차림은 처음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찬호의 아픔 묻어있는 텍사스와 대결

미리 구장에 도착해서 천천히 둘러보며 역사적인 메이저 리그 구장 입성을 음료와 바나나로 조용히 자축했다. 오늘의 상대팀은 아메리칸 서부지구 텍사스 레인저스. 황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팀은 잘 알다시피 박찬호 선수가 FA(자유계약선수)가 되고 5년간 6500만 달러라는 특급대우를 받고 입단했다가 '먹튀'로 전락해 버린 아픈 경험이 있는 팀이다.

사실 오늘은 빅매치가 아니다. 양팀 다 리그에서 최하위를 달리고 있는 팀인데다가 텍사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양키스는 같은 리그 보스턴이나 같은 연고 메츠의 라이벌전으로도 숨이 가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일 야간 경기에 관중들이 묵직하게 들어찬 것은 정말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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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작 전 구장을 찾은 아버지와 딸이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다. ⓒ 문종성

경기 시작 전 미국 국가가 울려 퍼지자 관중들은 일제히 기립해 전장을 나가는 장수처럼 장엄한 풍경을 연출한다. 곧이어 양팀 선수 명단이 발표된다. 텍사스 선수가 발표될 때는 시큰둥하던 양키스 팬들은 자기 팀 선수들이 호명될 때마다 열렬한 환호를 보낸다.

특히 데릭 지터가 소개되자 양키스 스타디움의 소음은 가청 주파수를 넘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실력이 월등히 좋은 A-Rod보다도 관중들이 더 사랑하는 걸 보면 역시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예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양키스의 마이크 무시나와 텍사스의 랍 테헤다가 오늘의 경기를 책임질 선발투수로 나왔다. 양키스 선수들이 1회 수비를 위해 힘차게 그라운드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관중들은 연신 박수와 휘파람으로 선수들을 독려했다.

저녁 7시 8분. 드디어 마이크 무시나의 첫 투구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텍사스 타자들 역시 마크 테세이라, 행크 블레이락, 마이크 영, 맷 케이타, 새미 소사 등 만만치 않은 타자들이 포진해 있어 한 번 터지면 해 볼만한 타선이었다.

1회에만 대거 4득점...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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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양키스와 텍사스 레인저스의 경기 장면. ⓒ 문종성

초반 구위가 불안했던 무시나는 노련한 투구로 1회를 무사히 마쳤다. 이제 양키스의 공격. 1번 자니 데이먼이 경기 시작과 함께 유격수 내야 안타를 치고 나가자 스타디움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어브레이유의 2루타와 데릭 지터의 적시타가 터지자 구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빠졌다. 양키스의 집중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4번 중심타자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마쓰이 히데키의 연속안타로 1회에만 대거 4득점, 선발 무시나의 어깨를 가볍게 해 주었다. 그들은 경기 초반부터 과거 강력한 위력을 내뿜던 양키스의 본래 기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경기가 잘 풀리니 관중들도 즐겁다. 관중이 즐겁다면? 관중의 기분에 의해 하루 매상이 좌지우지 되는 상인들도 덩달아 즐겁다. 미국의 야구장은 구장 내에서도 가벼운 음주가 가능하다. 여기저기에서 이동 상인에게 맥주를 주문하는 모습이 보인다. 굳이 자리를 뜨지 않더라도 곳곳에서 먹을거리와 응원도구를 직접 공수해주는 상인들이 있기 때문에 관람을 더욱 편하게 할 수 있다. 물론 비만의 원인에 어느 정도 일조는 하겠지만 말이다.

2회가 끝나고 전광판에 퀴즈가 나왔다. '뉴욕 양키스로 컴백하는 선수는 다음 중 누구일까요?' 하는 문제다. 정답은 로저 클레멘스. 전광판 화면에 로캣맨(로저 클레맨스의 별명)의 인터뷰 영상이 뜨자 관중들은 곧 복귀할 영웅 로켓맨을 향한 뜨거운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양키스 스타디움은 협소한 파울존으로 인해 타자 친화적인 구장이다. 이 때문에 리그 정상의 구위를 뽐내다가도 양키스로 이적해 와서 망가져 버린 투수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로캣맨은 오히려 양키스에서 최전성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개인뿐만 아니라 팀의 우승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것이 최고의 타자임에도 팬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다른 점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도 수많은 야구천재, 야구도사들 사이에서도 베스트 오브 베스트 실력을 꾸준히 유지하기 때문이다. 철저한 자기 관리 덕에 아직도 20대의 체력과 40대의 노련함을 겸비한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다.

난 뉴욕 양키스 팬은 아니다. 취향은 늘 마음에 긍휼함을 가져다 주는 하위권 팀을 응원한다. 하지만 로저 클레멘스가 양키스의 유니폼을 입는다면 기꺼이 양키스의 팬으로 마음을 열 생각이다.

전광판은 이닝이 끝날 때마다 보는 즐거움이 가득한 영상과 문구로 관중들의 호응을 유도한다. 텍사스가 윌커슨의 홈런과 마이크 영의 땅볼로 2득점을 만회했지만, 양키스는 다시 데릭 지터의 적시타 등으로 2점을 더 달아나 스코어는 6-2로 벌어져 있었다.

관중들 신나게 춤추는 시간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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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난 양키스 팬들이 구장 방송을 통해 흐르는 YMCA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 문종성

6회가 끝나자 'Bud boy'타임으로 관중들이 신나게 춤을 춘다. 중간중간 카메라 앵글로 전광판에 자기 모습이 찍히면 어린 아이들처럼 손을 흔들며 즐거워한다. 또한 퀴즈타임에는 양키스와 관련한 문제를 내 놓고 맞힌 관중들에게 즉석에서 선물을 주기도 한다. 관중들은 마치 호두까기 인형처럼 전광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노래하고 박수를 친다.

미국 야구팬들이 대체로 점잖은 편이라지만 양키스 팬들은 특히 열성적이고 다혈질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나 되어 즐거워하며 축제의 현장처럼 느껴지는 분위기가 편안한 것은 자유로움 속에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문화가 경기장 질서와 관람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2층에는 장애인들이 편히 관람할 수 있도록 곳곳에 장애인 관람석이 배정되어 있다. 경기장 안에도 수많은 상점들이 포진해 있어 어디를 가더라도 야구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손쉽게 구입할 수 있었고, 처음 온 사람들도 화장실이나 안내 시설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여기저기 눈에 띄게 표지판을 설치해 놓았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구장과 확연히 대비되는 양키스 스타디움은 그 규모뿐만 아니라 팬 서비스도 최고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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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이 편하게 관람할 수 있게 경기장 2층 입구마다 장애인 전용 관람석이 배정되어 있다. ⓒ 문종성

한국에서는 KIA 타이거즈(역시 최하위를 달리고 있다)를 애타게 응원하는 나. 하지만 비가 오면 물방개가 나오던 구장의 천연 잔디를 인조잔디로 바꿔 '당구 다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으로 선수들의 부상을 유발시키는 광주 구장을 보면 더 애가 탄다.

양키스 스타디움을 방문하면서 느낀 점은 비싸게 입장료 내고 들어가더라도 시설과 서비스가 좋다면 대만족이라는 것과 아낌없이 돈을 들여가며 또 가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구장이 깨끗하고 시설이 좋아지면 양질의 여가시설로 지역 발전에 기여하게 돼 기업 이미지 재고에 도움이 된다.

이밖에 연인과 함께 데이트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 나들이를 오는 장소로, 또 스포츠를 통해 건전한 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변모할 수 있으니 구장 하나가 바뀌면서 파생되는 유무형의 나비 효과는 실로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환상적인 구장에서 펼쳐진 경기가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8회 텍사스의 공격이 끝나자 승리를 예감한 팬들이 조금씩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드디어 경기 시작 3시간 30분여 만에 양키스의 마무리 리베라가 플라이 타구를 유도해 경기를 매조지했다. 오늘 경기의 수훈은 단연 3타수 2안타 3타점을 올린 데릭 지터. 거대한 용광로 같은 구장에서 뜨거운 함성에 젖어들다 보니 내 가슴도 소년처럼 흥분됐다.

구장 하나가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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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키스의 전설적인 선수들의 얼굴이 그려진 벽화. ⓒ 문종성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구장 밖. 하지만 여전히 승리에 도취된 팬들은 비보이(B-boy) 공연을 관람하거나 바(bar)나 호프집에 들어가 왁자지껄 여흥을 즐긴다. 양키스 옷이나 사진 등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도 마지막 호객 행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고, 늦은 밤 한 무리의 택시 운전수들은 노란 피켓을 들고 비싸지만 편안하게 갈 수 있는 택시탑승을 권유하고 있다.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데릭 지터의 활약으로 홈경기를 승리해서인지 분위기는 한결 가볍고 무수한 웃음소리들이 여기저기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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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 주변에는 각종 기념품을 파는 상점과 노점이 즐비하다. ⓒ 문종성

경기장 입장 시 거절당했던 물품들을 찾은 후 지하철을 타고 서서히 양키스 스타디움역을 빠져나간다.

어렸을 적 메이저리그라는 영화를 보면서 미국 야구장은 나에겐 꿈으로 남겨진 미답지였다. 하지만 오늘 그 구장에 내가 있으므로 내 인생에 또 하나의 꿈이 이루어졌다.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이봐 내 얘기 잘 들어보라구. 내가 말이야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에 다녀왔는데 말이야…'라고 친구들 앞에서 과장을 섞어가며 살짝 어깨에 힘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여행기에는 뉴욕 양키스 경기에 대한 이야기가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테고. 하지만 그보다 오늘 양키스 스타디움 방문은 꿈을 이뤄가는 하나의 척도가 된다는 점에서 내 젊은 날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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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행 #양키스 #뉴욕 #문종성 #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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