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해도 좋다, 맨해튼 거리라면...

[자전거 세계일주③] 미국 뉴욕에서

등록 2007.05.10 09:56수정 2007.05.11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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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언 스퀘어(union square)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뉴욕 시민들.
유니언 스퀘어(union square)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뉴욕 시민들.문종성
지난 7일 오전 9시. 한국 시간이면 이미 출근과 등교를 끝마쳐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여전히 거리는 인파로 북적댄다. 센트럴 파크 주변에는 자전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거나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저런 개들을 데리고 나와 산책하는 모습은 더 이상 생경스럽지가 않다. 가끔 센트럴 파크를 지나쳐 미드타운 한복판까지 자신의 대담한 자유를 노출시키며 운동하는 사람들이나 그로테스크한 헤어스타일을 연출하는 사람들만이 나의 눈길을 끌 수 있을 뿐이다.


뉴욕. 세상에서 제일 부자들만 사는 동네인 줄 알았던, 그리고 만화 속 영웅같은 캐릭터들이 실제로 야구의 역사를 창조해나가는 양키즈만이 뉴욕의 상징이라고 여겼던 코흘리개 시절 나에게 뉴욕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동경의 땅이었다.

그리고 1607년 버지니아 제임스 타운에 영국인이 첫 영구 이주민으로 유입된 이래 정확히 40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메리카의 심장부 뉴욕 땅을 당당히 밟고 서 있다.뉴요커들과 똑같은 하늘 아래서 똑같은 공기를 마시며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자, 재미있는 NBC 스튜디오를 구경하세요. 안에 들어가면 볼 것이 많아요."
"이봐요, 괜찮은 쇼가 있거든요. 싼 값에 드릴테니 티켓 한 장 구입해요."
"여기 관광 버스 티켓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뉴욕 시내를 단 한 번에 편안하게 구경하세요."
"홈리스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여기에 당신의 관심을 보여주세요."

맨해튼 한복판은 온통 자신의 목소리를 외치는 함성들로 가득하다. 남대문의 '골라골라' 같은 감칠맛은 떨어지지만 좁은 인도를 따라 생존을 위한 치열한 입담들이 전개되다 보니 귀가 트일 만한 미끼성 홍보를 듣지 않고 한 블록 옮기기가 수월찮다.

청각을 자극하는 치열한 호객행위를 떨쳐 냈더라도 무심히 지나쳐야 할 산이 하나 더 버티고 있다. 바로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 주변의 화려한 전광판 광고를 통한 도발적 세뇌이다. 세계의 교통로라고 불리는 이름만큼이나 정신없이 돌아가는 광고판에 마음을 뺏기는 순간 절약을 기저로 삼은 여행의 본질은 심각하게 훼손된다.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문종성
그 화려함으로 소문이 자자한 홍콩의 야경도 보고 왔건만, 그럼에도 신세계에 온 것마냥 들뜬 20대 청년에게 맨해튼 거리는 신기함 그 자체이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는 날 '나 맨해튼에 갔다왔거든' 유치하지도 않은 증거자료를 제출하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그 때 별안간 다가온 두 숙녀로부터 사진을 찍어달라는 제안.

"저희는 워싱턴 D.C에서 왔어요. 라이언 킹이 50불인데 보려 갈려구요. 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안 가실래요?"


사진을 찍어주다가 만난 한인 유학생 두 명, 그것도 한 쪽이 미모가 되는 여대생의 제의라면 청춘의 집념은 엿가락처럼 흐물거리게 마련. 순간 시험 문제에서 마지막 두 개의 답안을 놓고 저울질했던 학창 시절의 심난한 고뇌만큼이나 이 순간의 제의는 나의 선택을 마치 햄릿의 고뇌처럼 만들었다.

하지만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만을 생각하며 한 푼 두 푼 아껴온 나에게 50불짜리 브로드 웨이의 뮤지컬은 천하의 미인이라 일컫는 초선과 양귀비가 합작해서 유혹하더라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로맨스야 내 인생에 언젠가 반드시 오리라 아니 꼭 와야 한다는 절박하고도 불안한 마음으로 기대해 보겠지만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은 언제 다시 기약할지 모를 불확실한 미래였기 때문에, 난 비용편익분석의 가치를 파악한 후 아무런 의심없이 양키스 스타디움 행을 결정했다.

결국 짧고 애써 덤덤한 미소로 그들을 보낸 후 다시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더 편하다고 위안을 해 보지만 적어도 이 순간 왜 그리 구차한 변명으로 치부되는지.

"치사하고 야비한 인간들 같으니! 얼간이들은 썩 꺼져버려!"

종교적인 메시지도 그렇다고 정치집회도 아닌 메아리가 유니언 스퀘어(Union Square) 한복판에서 힘차게 울려퍼진다. 'Food for Life'라는 단체에서 나온 그는 노숙자(Homeless people)를 위한 음식을 제공하는데 필요한 도네이션을 받고 있는 중이다.

'Food for Life'가 힌두이즘에 기초한 단체와 같은 곳인지 아니면 그냥 이름만 같은 곳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받은 성금은 부르클린 지역의 홈리스들을 돕는데 쓰인다고 한다.

그는 정책을 상정하고 실행하는 기득권층이나 홈리스들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을 향해 가감 없는 거부감을 드러내며 홈리스 홀대에 관한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치사하고 야비한 녀석'이 되지 않기 위해 기부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치사하고 야비한 녀석'이 되지 않기 위해 기부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문종성
광장 한 쪽에서 기타연주에 빠져있는 펑크(punk) 족.
광장 한 쪽에서 기타연주에 빠져있는 펑크(punk) 족.문종성
광장 한쪽에선 그런 분위기에는 아랑곳 않고 기타를 연주하는 펑크(punk) 스타일의 남자가 자신만의 세계에 심취해 있고, '난 그저 평화로운 일상을 위해 온 것 뿐이야' 망중한을 즐기는 무리들과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튀는 무리들도 보인다.

애완동물의 천국 미국에서는 사람이 있는 곳에 동물들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곳에 나온 애완동물의 사정은 처량하기만 하다.

"여기 좀 보실래요? 이 개를 입양하세요. 개를 구입하는데 드는 비용은 없어요. 조그만 액수만 기부하면 되거든요."

어깨 넘어로 설명을 듣기에는 그들은 'no-kill animal shelter'에서 나온 자원봉사자들로, 적은 액수의 도네이션을 받고 강아지나 고양이를 입양시켜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animal shelter'란 버려진 동물들을 다른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보호하는 곳으로 국가나, 지역단체나, 순수 자원봉사 단체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보통의 쉘터에선 오래동안 입양되지 않거나 병이 있는 동물들은 안락사를 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no-kill shelter'란 안락사를 시키는 일이 없는 쉘터를 말한다.

유니언 스퀘어에 산책을 나온 스타의식에 젖은 개. 이 곳에선 제법 유명하다고 한다.
유니언 스퀘어에 산책을 나온 스타의식에 젖은 개. 이 곳에선 제법 유명하다고 한다.문종성
이 작은 유니언 스퀘어의 풍경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매주 월, 수, 금, 토요일에는 유니언 스퀘어에서 Farmers' market이 펼쳐진다. 말 그대로 농장을 운영하는 뉴욕주의 농부들이 직접 재배한 농작물과 화훼작물, 그리고 유기농 식품들을 가져와 파는 것이다. 시민들은 신선한 물품들을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하기 때문에 장이 서는 날엔 제법 사람들이 모여든다.

장터분위기가 익숙한 이 곳은 사실 정치적으로 더 민감한 곳이다. 정치적인 이슈가 있을 때마다 늘 격양된 분위기로 시위를 주도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지난 9·11 테러 당시 음모론에 휩싸였던 부시 대통령 정권에 항의하며 시위를 하던 곳이고, 역사적으로는 1930년 대공황 때나 베트남전 참전 때마다 약자의 편에서 군중집회를 열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오늘 밤 유기농으로 재배한 값싼 농작물을 식탁에 올려보고 싶다면 Farmers' market로 가 보자.
오늘 밤 유기농으로 재배한 값싼 농작물을 식탁에 올려보고 싶다면 Farmers' market로 가 보자.문종성
문득 '젊음이란, 옳지 않은 일에 주먹을 불끈 쥘 줄 아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군대 시절 목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지금 나는 어떤 일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가? 또 때론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그 두 손을 다시 따뜻이 모아 쥐고 있는가?

시류에 대해 분연히 일어날 줄 알았던 뉴욕 시민들의 용감어린 투쟁을 보며,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로 물든 기성세대를 통렬히 비판하면서도 정작 내 안의 갑오개혁을 통한 의식의 변화가 없는 모순된 자아를 보며 자괴감에 빠진 나를 본다.

복잡한 심경을 털어 내기엔 분위기 전환이 최고다. 자, 맨해튼에 대해서는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나마 어느 정도 갈증을 해소시켰다. 더 이상 이곳에 얽매이지 말자. 원하는 곳이 있다면 당장 그 곳으로 달려가 보자. 꿈의 구장, 브롱스(Bronx)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이 나를 부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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