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노인의 운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늘어나는 '고령 운전자' 교통 사고로 고민하는 미국

등록 2007.05.12 17:16수정 2007.05.12 17:23
0
원고료로 응원
a

ⓒ 일러스트레이션 이인규

2006년 5월 30일, 맑은 아침.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에 사는 엘리자베스 그림스는 자신의 승용차인 94년식 그랜드 마퀴스에 올랐다. 집에서 여섯 블록 떨어진 상점을 목표로 차를 몰던 그는 교차로에서 브레이크 대신 가속기를 밟았다. 실수였다.

차는 빨간색 정지등을 지나쳐 달렸고 결국 가로지르던 차의 운전석을 들이받고서야 멈췄다. 받친 차에는 열일곱살의 케이티 볼카가 타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생인 케이티는 수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학교로 향하던 중이었다.

케이티는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보내졌고 의료진은 그를 살리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닷새 후, 시인을 꿈꾸었던 소녀는 병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미처 인생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차에 치여 숨진 여고생... 운전자는 아흔살 할머니

언뜻 보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발생하는, 안타까우면서도 의례적인 교통사고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지난 1년 동안 텍사스 주 정부에 큰 고민을 안겨주었다. 교통사고의 가해자라 할 수 있는 엘리자베스 그림스가 아흔살의 할머니였던 탓이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사고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비록 남편을 먼저 떠나 보냈지만, 같은 집에서 50년 동안 산 이 지역 토박이였다. 사고가 나던 날도 여느 때처럼 장을 보기 위해 운전을 하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것이었다.

이웃들에 의하면, 혼자 사는 엘리자베스는 고령임에도 요리와 청소를 직접 하고 심지어는 정원의 잔디도 스스로 깎을 정도로 체력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먹고 늙어가면서 신체의 기능들이 저하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1톤이 넘는 무쇠 덩어리인 자동차를 언제까지나 제어할 수 있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다.

텍사스의 노인 운전자 가운데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단 한 번의 주행 시험도 치르지 않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면허를 갱신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텍사스 주법에 따르면, 연령에 상관없이 운전면허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12년에 한 번 시력 검사만 받으면 된다. 그 외에는 그저 갱신일에 맞춰 우편이나 전화 또는 인터넷으로 신청만 하면 된다.

그러나 고령의 운전자에게도 아무런 측정이나 검사 없이 운전면허를 무한히 갱신해 주는 현재의 방식에 대해 노인 전문가들은 우려를 보내고 있다. 노인들이 가지고 있는 만성질환이나 느린 반사작용이 운전 능력을 현저하게 저하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노인 운전자 증가, 피할 수 없는 추세

a

ⓒ 그래픽 이인규

이러한 우려는 통계자료로도 입증이 된다. 카네기 멜본 대학과 미 자동차협회가 1999년부터 2004년까지의 자료를 토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교통사고의 사망률이 65세 이상부터 급증하고 있다.

75세부터 84세 사이의 사망률은 1억 마일당 3명으로 10대 운전자와 거의 같다. 그리고 85세 이상 운전자의 사망률은 수직 상승해 10대의 4배나 된다.

더욱 큰 문제는 미국의 노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고령 운전자도 계속 늘고 있는 점이다. 미국적인 생활에서 스스로 자동차를 몰 수 있어야 노년의 독립적인 생활이 보장되지만, 나이가 들수록 운전 능력은 감소하고 그 결과 더 많은 사고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미 인구조사국의 자료에 따르면, 베이비 붐 세대가 최소 65세 이상이 되는 2030년에는 85세 이상의 인구가 960만 명에 달할 전망이다. 현재와 비교해 73%나 증가한 수치다.

이와 더불어 도로안전국 전문가들은 2030년에 이르면 교통사고 사망률 가운데 25% 책임이 고령 운전자에게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2005년 현재 11%인 것과 비교해보면 인구증가와 더불어 급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고령 운전자 시대를 대비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이러한 현실은 비단 엘리자베스가 살던 텍사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지만 대부분의 주 정부들은 이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책을 마련해 놓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운전면허 최고 연령 제한 필요한가... 곤혹스런 정부

a

ⓒ 그래픽 이인규

1995년 미 의학협회의 저널에 게재된 연구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고령 운전자의 교통사고율을 낮출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고령의 운전자들로 하여금 교통국을 직접 방문해 운전면허를 갱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대부분의 주들은 고령의 운전자가 운전면허증을 갱신하기 위해 직접 교통국을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 더군다나 고령을 이유로 운전 시험을 다시 보게 하는 주는 일리노이와 뉴햄프셔, 단 두개 주 밖에 없다.

고령 운전자의 교통사고가 사회 문제로 부각되면서 많은 주들이 이러한 제도의 정비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운전을 제한하는 연령을 몇 세로 할 것인지를 비롯해 정확한 기준을 만드느라 애를 먹고 있다.

또한, 이 문제에 관한 각 주의 규정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들은 시력 검사를 의무화하고 있지만, 운전자들의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문제를 찾아 낼 수 있는 규정이나 제도는 없다. 특히 운전면허에 최저 연령 제한은 있지만, 최고 연령 제한을 둔 주는 전무하다.

곤혹스럽기는 연방 정부도 마찬가지다. 고속도로 안전청의 바바라 하샤 국장은 "이것은 매우 큰 문제지만 우리도 아직까지 어떤 해결책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면서 "우리는 최대한 빨리 좋은 방안들을 찾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고령의 운전자들이 모두 시한폭탄처럼 도로에 공포를 몰고 오는 불안한 존재로만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노인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스스로 판단해 운전을 그만두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에 미 공공보건 저널에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해마다 70세 이상의 미국 노인 가운데 60만 명이 운전을 포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엄청나게 비싼 10대 청소년의 운전자 보험료에 비해 75세 이상 노인들의 보험료가 많이 비싸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보험 정보 연구소에 따르면, 보험회사들은 고령의 운전자들을 '스스로 잘 주의하는 그룹'으로 판단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밤에는 운전을 하지 않는다든가, 또는 위험한 한 번의 좌회전 대신 안전한 세 번의 우회전을 택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엘리자베스 그림스의 교통사고는 고령의 운전자가 유발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담고있다. 미국에는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라도 운전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익숙한 길로만 다니는 노인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렇지만, 누구도 자신의 건강을 자신할 수는 없다. 고령의 운전자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계속되는 논란

a

ⓒ 그래픽 이인규

엘리자베스의 가족들은 사고가 나기 하루 전날 밤 엘리자베스에게 가벼운 뇌졸중이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발작이 안전 운전을 방해해 사고가 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당시 교통사고로 인해 양 발목이 골절된 엘리자베스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결국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사고 후 피해자인 볼카의 가족들은 엘리자베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고령의 운전자들을 힘들게 만드는 법안이 통과되도록 텍사스 주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케이티의 아버지인 릭 볼카는 "현재 운전 금지를 판단하는 첫 단계는 운전자 자신이고 두 번째 단계는 운전자의 가족들이며 세 번째 단계는 운전자의 의사인데, 주 정부가 그 첫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나서 시민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텍사스 주에서도 고령의 운전자를 제한하는 법안이 곧 발효할 것으로 보인다. 운전면허증 갱신을 원하는 79세 이상 운전자에게는 직접 방문과 시력 검사를 의무화하고, 운전 능력에 의문이 드는 사람에게 주행 시험을 통과하도록 명령하며, 85세 이상의 운전자들은 2년마다 면허증을 갱신하도록 한 법안이 릭 페리 주지사의 서명을 기다리고 있다.

볼카 가족이 엘리자베스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엘리자베스는 법정에 출두할 수 없어 요양원에서 비디오를 통해 증언을 했다. 이 비디오 증언에서 볼카 측 변호사가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이 차를 들이받아 한 소녀가 죽은 것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알고 있다"면서 "정말 미안하다. 내가 그랬다"고 인정했다.

지난해 5월 30일, 달라스에서 발생한 교통사고의 두 당사자 모두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엘리자베스마저 지난 1월 15일 심장 발작과 고령의 합병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고령의 운전자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규제라는 어려운 숙제를 남겨두고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의 한인 주간지 <코넷>의 제휴기사입니다. <코넷>의 인터넷판인 '코넷닷컴'(www.thekonet.com)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의 한인 주간지 <코넷>의 제휴기사입니다. <코넷>의 인터넷판인 '코넷닷컴'(www.thekonet.com)에도 실렸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2. 2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3. 3 "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 안 보냈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 안 보냈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4. 4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5. 5 "윤 대통령 답없다" 부산 도심 '퇴진 갈매기' 합창 "윤 대통령 답없다" 부산 도심 '퇴진 갈매기' 합창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