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양국의 닮은꼴 '식민지로의 길'

중국 또 하나의 국치일을 되돌아보며

등록 2007.05.16 18:55수정 2007.05.16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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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이 넘게 지속된 조선왕조가 망할 때 무슨 전쟁이나 민란이 있었던가? 제대로 된 저항 한번 못해보고 나라를 일본에 넘기고 말았던 그 뼈아픈 역사를 되짚어보면 분명 국력이 미약한 탓도 있지만 위정자들의 잘못된 시대인식과 그릇된 역사의식이 망국을 자초하고 있음을 어렵사리 알 수 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은 불행히도 국방을 스스로 완비하지 못하여 자국의 평화를 확보함에 부족함이 많으니 일본이 대한제국의 방위를 맡겠다고 했을 때 어느 누가 나서서 그것을 반대하고 일본의 야욕을 국민들에게 알렸는가?

을사오적은 앞장서서 이토를 지지했고 1896년 발행되는 최초의 한글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에조차도 의병은 '비도'(匪徒·무기를 가지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람을 해치거나 재물을 빼앗는 무리)로 묘사되었으며 백성들은 의병이 숨어 있는 곳을 일본군에 신고해 의병들은 하나 둘 죽어가고 있었다.

계몽되지 않은, 무지한 국민들과 사리사욕만을 챙기는, 잘못된 역사의식을 가진 위정자들은 하나의 나라를 송두리째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헌납하고 말았던 것이 100년 전 우리의 숨길 수 없는 엄연한 역사이다. 굴욕적이고 뼈아픈 100년 전 조선의 상황은 이웃나라 중국에서도 똑같이 재연되고 있었으니 그 닮아 있는 모습이 참으로 놀랍기까지 하다.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 중국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일본은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며 중국 침략의 야욕을 키워간다. 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 국가들은 아시아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이때를 틈타 일본은 1914년 8월 2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위엔스카이(袁世凱)의 승낙을 얻어 산동(山東)성 룽커우(龍口)와 라이저우(萊州)에 상륙해 11월 7일에 지난(濟南), 칭다오(靑島) 그리고 자오저우(膠州) 일대를 점령하게 된다.

1915년 1월 18일 베이징(北京) 주재 일본공사 히오키마스(日置益)는 위엔스카이를 만나 '21개조 요구안'를 제시하고 이를 수용하도록 종용한다. 제정복귀를 꿈꾸며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위엔스카이는 일본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결국 이 요구안을 일부 조항만을 제외하고는 1915년 5월 9일 전면 수용하기에 이른다.

21개조는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정치적으로는 일본인 고문을 통해 중국정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경제적으로는 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 토지소유권 등의 각종 이권을 차지하며 문화적으로는 일본인의 포교권을 인정할 것 등으로 중국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굴욕적인 것이었다.


한마디로 산둥성에서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모든 권한을 일본이 넘겨받으며 나아가 뤼순(旅順), 다롄(大連), 남만주(南滿洲), 안펑(安奉), 우창(武昌), 지우장(九江), 난창(南昌), 항저우(杭州), 차오저우(潮州), 푸젠(福建)성 등의 철도와 광산 부설과 채굴권 등을 확보함으로써 대륙침략의 거점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중국민중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21개조 요구안'을 1919년 파리 평화회의에서 회부해 결국 서구열강으로부터 승인을 얻게 되니 이는 중국의 5·4 운동(1919년)을 촉발시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이 요구안은 1922년 워싱턴 회의로 파기되기에 이르나 이미 중국내 거점을 마련하고 침략을 본격화한 일본제국주의의 야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수구정권인 위엔스카이정권이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최종 수락함으로써 5월 9일은 일본의 중국침략이 본격화되는 날로서 9.18 만주사변과 함께 중국인에게는 또 하나의 국치일인 셈이다.

한국과 중국을 차례로 식민지화 한 일본은 1998년 5월 9일, <자존-운명의 순간>이라는 영화를 통해 그들의 침략을 미화하고 일본의 전쟁은 서양열강의 지배하에 놓인 아시아를 구원하고 해방시키기 위한 영웅적인 선택이었다고 항변한다. 그리고 현재 일본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태도는 이 영화에서 한 걸음도 진보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침략을 질책하고 그들의 반성과 배상을 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태도 또한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와 비슷한, 아픈 역사적 경험을 가진 중국에서는 최소한 친일파에 대한 철저한 단죄와 역사적 평가가 아주 명확하게 이뤄졌으며 1965년 굴욕적인 한일수교와 같은 국교정상화도 없었다.

3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난징대학살을 기억하는 박물관에는 "지난날을 잊지 않는 것을 훗날의 스승으로 삼고 역사를 거울삼아 미래를 개척해 가자(前事不忘,后事之師,以史爲鑑、開創未來)"는 말이 새겨져 있다. 100년 전 급진적 개혁파는 국익을 위해 일본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자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아무런 경계심을 갖지 못했고 결국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겼다.

지금 우리 시대의 최대 담론 또한 '국익'이다. 이라크파병도, 한미FTA도 모두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한다. <스파이더맨3>가 국내의 스크린을 점령한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그때도 과연 이것들이 국익을 위한 현명한 선택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중국 국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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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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