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그럴 줄 알았어?

드라마 <쩐의 전쟁>에 거는 기대 혹은 걱정

등록 2007.05.21 11:52수정 2007.05.21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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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역시!",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제 2회를 방영한 SBS 드라마 스페셜 <쩐의 전쟁>의 주인공 박신양의 연기를 본 느낌이다. 같은 방송사의 드라마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바 있는 <파리의 연인> 이후로 브라운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박신양이 3년 만에 <쩐의 전쟁>으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과연, 박신양이야."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그의 연기는 압권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쩐의 전쟁>은 돈에 관한 이야기다. 박신양이 연기하는 극 중 금나라는 한 때 잘나가는 증권사의 애널리스트였다. 일류대학 출신의 엘리트답게 조금은 까칠하고 잘난 척도 몸에 밴 왕자였다. 그런 그가 아버지가 얻어 쓴 사채빚 때문에 하루아침에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여 쓰레기통을 뒤지며 목숨을 연명해야 한다.

그 잘난 자존심이며 화려한 간판도 돈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아버지는 카드를 갈아 동맥을 끊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남편과 함께 이승을 떠난다. 여동생은 빚진 아비의 시신 대신 자신의 신체를 사채업자에게 맡겨야 한다. 사랑하는 여자도 돈 때문에 떠나보내야 했건만 그 수고는 말짱 헛수고가 되었다. 분노한 그의 쇠망치에 어미가 불공을 드리던 절탑은 산산이 부서진다.

이쯤 되면 전개될 드라마 내용이야 뻔하다. 돈에 한이 맺힌 금나라의 복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돈에 대한 분노, 돈에 대한 복수, 아니 돈 때문에 현대판 노예가 되어야 하는 세상에 대한 복수가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고리대금으로 민생의 피를 빨아먹는 사채업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금나라가 택한 복수의 양식은 그 또한 사채업자가 되는 것이다.

역시!

박신양의 연기를 보고 난 후 연발한 감탄사임은 이미 말했다. 다시 "역시!" 하는 것은, 우리 드라마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듯 돈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 금나라의 인생역정에 멜로가 슬쩍 끼어든다. 박진희의 등장이다. 극 중 서주희를 연기하는 박진희 역시 오랜만의 드라마 외출이다. 도회적 이미지의 그녀가 금나라 못지않게 돈 때문에 절망하는 서민적 이미지로 등장한 것이 의외라면 의외다.

다니는 직장(저축은행인 듯한)의 스마일 상을 독차지 하는 미소 속에는 상금으로 주는 10만원에 대한 집착이 숨어 있다.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그녀 역시 궁색하다. 사는 집도 언제 남의 손에 넘어갈지 전전긍긍이다. 선생이 천직인 홀아버지는 넘어갈 집보다는 보증 서준 친구의 실종이 더욱 걱정이다. 돈 많은 이혼남 고객의 치근거림에 벌레가 기어가듯 소름이 돋지만 돈 많다는 이유로 참을 만하다.


그 서주희 앞에 금나라가 아버지의 제자로 나타난다. 냄새 지독한 그의 입성과 몰골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정이 간다. 자신이 떨어뜨린 500원 동전을 신발 밑에 감추고 시치미를 떼는 금나라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서주희는 자신과 닮은 모습을 발견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멜로는 시작되었다.

금나라가 돈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를 버렸듯 서주희는 돈 때문에 결혼을 작정한다. 아뿔싸, 그 결혼식을 깽판 치는 장본인이 이제 막 사채업자로 나선 금나라라는 설정은 우리 드라마의 공식이자 불변의 멜로라인이다. 그 애증의 부대낌에서 사랑은 위태롭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다. 미움의 대상이 분명한데 미워할 수 없고 사랑이 아니라며 부정할수록 그 사랑은 깊어만 간다.


서주희보다 먼저 사랑하고 먼저 그의 여자였던 이차연(김정화 분)은 억울하다. 자신과 금나라가 헤어질 아무 이유도 없었다. 비록 그녀의 할머니가 사채업계의 큰 손일지라도 금나라 가족을 풍비박산 낸 사채업자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아니 오히려 그 재력으로 금나라의 사채 빚까지 갚아주려 했지 않은가.

우리 드라마의 상투성으로 너도나도 꼬집듯이 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리듯 이차연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 할머니는 돈으로 금나라를 시험하고 하필이면 그 때 병원에서는 어머니를 내쫓겠다고 엄포다. 설득력 없는 우리 드라마의 설정은 한 편의 코미디다. 그 전화 한 통에 금나라는 정인(情人)의 할머니가 쥐어주는 돈 봉투를 다시 집어 든다.

정직하게 말해서 금나라에 닥친 불행 때문에 차연과의 관계가 불편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오랜 시간 서로 사랑했던 그들 사이를 갈라놓을 만큼은 아니다. 그런데 "난 사랑보다 돈이 더 좋아", 혹은 "사랑 따윈 필요 없어, 난 돈이 필요해!"하며 차연에게 증오인 척 적의를 드러내는 것은 그야말로 오버 액션에 스토리 오버다. 돈 봉투로 사람의 됨됨이를 시험하는 할머니의 제스처는 구태의연의 본보기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러니 "내 그럴 줄 알았어"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좀 참신하고 냉정하면, 그리고 운명이나 우연이 아니라 정말이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만나고 헤어지면 안 되나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양보하여 우연처럼 찾아온 사랑은 그렇다 해도 헤어질 때는 헤어질 이유가 있으면 왜 안 되는 거냐고 항변하고 싶다.

우리의 드라마는 그동안 암 등 기타의 불치병이나 교통사고로 너무 많은 주인공들을 떠나보냈다. 기억상실증은 어떻고? 아무리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이 우리 작가들의 장기라지만, 살아남은 사람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죽어간 망령에게 온통 삶을 저당 잡히며 살아야하는지 마구 화가 날 지경이다. 기억상실은 아름답고 망각은 업보여서 남은 주인공들만 기억이 또렷하다. 살아도 산목숨이 아닌 것이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이제는 이 말 좀 안하며 드라마를 보면 좋겠다. 걱정거리는 이것만이 아니다. 실장님은 왜 그렇게 많아서 좀 괜찮다 싶으면 모두가 실장님이다. 그 실장님들은 두 종류다. 하나는 재벌 2세답게 반듯하고 유학 경험에 핸섬한, 소위 킹카 중에 단연 으뜸이다. 다른 하나는 망가진 영혼에 삐뚤어진 심성으로 반항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럼에도 양자 모두 카리스마는 있어서 둘 다 모두 폼은 난다. 박신양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그 구태의연한 캐릭터처럼 하루하루 삶을 연명하기도 힘든 서민들에게 너무나 어렵고 요원한 일들이 드라마 속에서는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 돈 벌기가 로또 당첨되는 것만큼 어려운 현실에서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은 숱한 대박을 터트리며 입신양명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아무리 꿈을 주고 꿈을 쫓는 드라마라지만 너무 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견실한 사채업자(이 설정도 황당하지만)의 문하로 들어간 금나라의 인생역전이, 돈에 복수하는 그의 행로가 아무런 구체성도 없이 너무나 쉽게 풀려버리는 황당한 시추에이션이 될까 자못 걱정이다.

그가 돈을 벌어 한 맺힌 복수를 하거나, 애초 품은 뜻과는 상관없이 돈의 노예가 되어버려 우리를 아프게 한다해도 제발이지 돈을 버는 과정이 이번에는 좀 설득력 있는 것이었으면 정말이지 좋겠다. 아무런 설명 없이 타고난 재능이 힘을 발해 하루아침에 거부가 되는 그런 설득력 떨어지는 드라마를 보지 않았으면 한다.

드라마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그런 핑계는 작가로서 너무 졸렬한 것 아닌가. 바로 그런 구성과 공감을 주기위해 펜을 들었고 시작화면에 이름 석 자를 드러낸 것이 아닌가. 바라건대 "내 그럴 줄 알았어?" 이런 한탄과 실망을 또 다시하며 드라마를 보고 싶지 않다. 돈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듯 드라마가 공상 속의 세계에만 머물러서도 안 되는 것 아닌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쩐의 전쟁 #박신양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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