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선과 나란히 달린 '손바닥 지면'의 힘

[백병규의 미디어워치] <경향> 1면의 '파격'

등록 2007.05.22 15:25수정 2007.05.2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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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페인 기사를 읽는 것처럼 따분한 일도 없다.

a 22일 <경향신문>에 실린 100회 '책읽기 365'.

22일 <경향신문>에 실린 100회 '책읽기 365'. ⓒ <경향신문> PDF

'좋은 일' 임에는 분명하지만 자화자찬하는 그 모습에 왠지 거부감부터 드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기억 속에 각인돼 있는 '동원 문화'에 대한 거부감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경향신문>의 '책읽기 365'를 보는 느낌은 조금은 달랐다. "독서문화 신선한 전파… 문화사적 사건'이라는 제목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내심 "그래" 하는 맞장구를 치고픈 마음도 든다.

<경향신문>은 올해 새해를 열면서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200자 원고지 4매 정도 될까 하는 분량으로 매일 책 한권씩을, 그것도 1면에 소개한다고 선언했다. 오늘로 그 100회째를 맞았다. 약속대로 토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한권씩 책 소개를 해왔다.

그 기획은 한 마디로 신선했다. 파격이었다. 모든 신문들이 서평 지면을 따로 할애하고 있지만, 그것을 1면으로 뽑아올린 것은 어느 모로 봐도 파격이었다.

황당, 파격, 신선

기대도 컸지만, 우려도 컸다. 4매나 될까 싶은 분량에 어떻게 한 권의 책을 소화할까 하는 걱정부터 들었다. 또 1면에 그것을 어떻게 편집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가뜩이나 넘쳐나는 기사 배치에 골머리를 앓을 1면 편집자는 이같은 '황당한 기획'에 얼마나 답답해할까 싶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책읽기 365'는 기획과 편집, 글쓰기에서 모두 실험적인 시도였다. 1단 통 세로박스 편집에 이어 2단 박스, 3단 박스도 선보였다. 급기야는 1단 통 가로박스까지 등장했다. 가로 세로 두뼘이 채 안되는 직사각형 지면 내에서 할 수 있는 시도는 다 해본 셈이다.

무엇을 더 넣기보다는, 무엇을 빼야 할 것인가를 더 고민할 수밖에 없는 1면 편집자에게 365일 고정 박스는 천형과도 같은 버거운 짐일 수 있다. 1단 통 가로박스까지 선보인 것은 그 같은 제약을 뛰어넘기 위한 편집자들의 고민과 고뇌의 산물일 것이다.


1면 편집을 맡고 있는 최진원 기자는 그 심정을 "모양이 중요한 게 아니다"는 한 마디로 대신했다. "매일 상황에, 여건에 맞게 들어가야 할 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시각적으로 편집하는 길 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숙명과 같은 답변이기도 했다.

'책읽기 365'는 서평일까? <경향신문> 문화부의 도재기 기자는 주저 없이 '칼럼'이라고 단언했다. 독서칼럼이라는 것이다.

200자 원고지 4.2매. 본격적인 서평을 쓰기에는 너무 짧은 글이다. 사실 칼럼을 쓰기에도 짧은 분량이다. 그런 만큼 누가 쓰느냐 보다, 글 짜임새와 글맛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명망가 위주로 필진을 골랐다. 하지만 명망가라고 해서 글쟁이인 것은 아니다. 여기에 편집진의 고민이 있다. 필진을 콩나물국밥집 사장님과 서점 주인, 초등학교 5학년 학생으로까지 넓히면서 편집진의 고민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무엇을 택할 것인가? '책읽기 365'는 어찌 보면 <경향신문> 편집진에게 매일 새롭게 그 답을 요구하는 '오래된 숙제'와도 같은 것일 수 있겠다.

국밥집 사장도 썼다, 초등학생도 썼다

a 경의선 철도 시범운행 기사를 밀어낸 지난 17일자 '책읽기 365'. 돈까스에 대한 내용이다.

경의선 철도 시범운행 기사를 밀어낸 지난 17일자 '책읽기 365'. 돈까스에 대한 내용이다. ⓒ <경향신문> PDF

지난 5월 17일 <경향신문> 편집진은 '독자와의 약속' 앞에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다.

반세기만에 끊어진 경의선·동해선 철도 시범 운행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던 날이다. 다음날 신문 제작을 앞두고 <경향신문> 편집진은 1면 편집을 놓고 '독자와의 약속'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잠시 이를 접고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다음날인 18일자 <경향신문> 1면에는 단 3개의 기사가 실렸다. 남북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철마를 찍은 사진기사 하나, 고은 선생의 탑승기 하나, 그리고 '책읽기 365'였다. 도재기 기자는 "이제 '책읽기 365'가 빠질 일은 없을 것 같다"며 웃었다.

아쉬운 대목도 없지 않다. 북매거진 텍스트(Text)의 김용필 대표는 "책읽기와는 멀어진 사회 풍토 속에서 매일 1면에 독서칼럼을 게재하기로 한 것은 파격이자 큰 용기를 낸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내용면에서는 미흡한 점이 적지 않다"고 아쉬움을 피력했다.

"본격적인 서평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칼럼으로서 깊이나 읽는 맛에서는 갈증이 난다"고 했다. 이왕 시작한 것 두 매 정도 분량을 더 늘여보면 어떻겠느냐는 주문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런 주문은 아마도 <경향신문> 편집진의 여러 욕심들과 함께 묵혀두어야 할 듯싶다.

하나의 책을 놓고 여러 사람의 '글'을 연재해본다거나, 주제별로 엮어서 연재해보는 것, 남대문 시장 아줌마나 아저씨의 가슴 한편에 묻혀 있을 '한 권의 책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 등등…. 욕심은 넘쳐나지만 그걸 채울 지면은 손바닥만 하다. 누구 말 거꾸로 할 일은 많은 데 지면은 너무 작은 게 문제다.

영혼을 향해 열리는 문, 당신도 탐험하라

"끝이 없을 것 같은 드넓은 서가 사이를 하염없이 걸어본 적이 있는가. 무수한 책들 중 무엇을 선택할 지 한참을 고민해 본 적은. 혹은 낯선 책에 정신과 영혼을 빼앗겨 본 경험은…."

오늘(5월 22일) 권경상 국립중앙도서관장이 쓴 '책읽기 365'는 이렇게 시작한다. 스페인 작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에 관한 칼럼이다. 4.2매의 짧은 글 그 마지막 대목으로 '책읽기 365' 100회에 대한 헌사를 대신해보자.

"작가의 탄식대로 오늘날 독서라는 예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으며, 위대한 독서가들은 더 희귀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책이라는 기억의 문을 통하여 여러 세대의 영혼이 되살아나며, 우리의 인생에 흔적과 의미를 남긴다. '자기 영혼을 향해 열리는 문을 탐험하는 즐거움'을 얻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그러고 보니 신문과 책은 활자문화의 쌍생아이자 공동운명체가 아니던가.
#백병규 #미디어워치 #책읽기365 #경향신문 #활자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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