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억원과 안 바꾼 자존심, 나의 바보투쟁"

[단독인터뷰] '거액 CF 거부' 백지연 앵커

등록 2007.05.28 08:58수정 2007.06.0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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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거짓말 같은 뉴스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저도 이 상품을 구입했다"는 광고 멘트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백지연 앵커가 거액의 CF를 거부한 사실이 뒤늦게 보도된 것이다.

'수억원도 필요 없다는 대쪽같은 백지연 앵커', '거짓말로 수억원 돈 벌기 싫다는 백지연' 등 제목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각 언론은 '공인 백지연'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어떤 신문은 "거짓말을 술술 잘도 하는 사람들이 경상도 사투리 마따나 '천지삐까리'인 세상에서 한 치의 거짓마저 허용하지 않으려는 엄격한 잣대가 놀랍고도 신선하다"고 표현했다.

그 말마따나 거짓이 '천지삐까리'인 세상이다. 설마란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또 다른 이유가 숨어 있겠지'라는 삐딱한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정말 사실이라면, 있는 그대로가 통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사건'이란 생각이 들었다.

몇 억원 광고를 거절한 사연

a 23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인 방송인 백지연씨

23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인 방송인 백지연씨 ⓒ 오마이뉴스 안홍기

지난 23일 오후 '백지연 아카데미' 사무실에서 백지연(43) 앵커와 마주 앉은 이유였다. 그런데 10여분이 지났을까.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난 뉴스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뜻밖의 말' 때문이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어요. 이번만 알려졌을 뿐이죠. 가장 최근? 아마 재작년이었을 거예요. 굉장히 바보 같죠? 저라고 왜 수억원이 아깝지 않겠어요? 큰 돈이잖아요. 그 돈이면 좋은 일 많이 할 수 있고, 가족을 위해 투자할 수도 있죠. 하지만 '이건 거짓말이지? 그럼 거짓말하면 안 되지' 이게 저한테는 간단한 결론이예요."

언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 어떻게 간단한가? 우선 설마에 대한 의구심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일부 누리꾼의 주장처럼, 물증은 '계약서'다. 이에 백지연 앵커는 "거짓말하지 않겠다는 나의 선택이었을 뿐,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제공하고 싶지 않다"며 계약서 공개에 난색을 표시했다.


계속된 요청에 백 앵커는 "광고주를 절대 공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거듭 확인한 후에야, "계약서 3부 중 1부가 아직 회수되지 않아 파기하지 않고 보관 중"이라는 계약서 원본을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갑 : (주)○○○○, 을 : 백지연, 병 : (주)○○○○○.'


계약 당사자들의 도장 자국이 선명했다. 문제의 상품은 보험이었다.

"가입하지 않았는데, '저도 0000에 가입했다'고 얘기해야 하는 구성이었어요. 그 카피 한 줄이 저의 마음에 단단히 걸린 것이었죠. 그래서 제작사 측에 '이거 거짓말이잖아요. 저, 가입 안 했잖아요'라고 했더니, 저한테 유명인들 몇분의 이름을 대면서 '그 사람들도 다 이렇게 한다'하시더라구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한다는 건 저한테 말씀하실 필요 없구요. 저는 못하겠어요. 고쳐주세요' 그랬죠.

처음만 해도 그분들이 '정말 거절하는 거냐, 튕기는 것 아냐'정도로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웃는 분들도 있더라구요. 녹음기 틀듯, '거짓말'이라고, '가입하지 않았는데 가입했다고 하는 것은 할 수 없다'고 얘기했어요. 그 때 그 사람들의 침묵. 어떤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황당함? 저만 바보가 된 느낌이 들었죠.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면서) 3시간을 끌었어요. 제 결정만을 기다리는 스탭들 생각에 시간이 오래 걸린 면이 있죠. 물론 좋은 상품일 수 있어요. 광고주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가요. 꼭 필요한 부분이었겠죠.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거짓말로 돈벌 수 없잖아요. '가입했다'는 나의 선택을 믿고 구입하실 분도 많을 텐데. 혹시 피해라도 생기면, 그건 안되죠. 보험이면 액수도 큰데, 제가 확인하지 못한 이상, 다른 사람들한테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면 안 되잖아요. 결국 그 분들이 저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셨죠."

시사프로 진행자가 아니면 거절했을까

a 방송인 백지연씨

방송인 백지연씨 ⓒ 오마이뉴스 안홍기

- 어느 정도 거짓말은 광고의 생리 아닌가요?
"물론 이전에 저도 광고를 찍었죠. 그러나 '거짓말을 해야하는 카피가 없는 경우였죠. 제가 했던 대우 자동차 광고를 예로 들어볼께요. 그 때 '저도 대우자동차를 탑니다'라는 말을 광고에서 하지 않았지요. 그 때는 광고주측에서 광고 내용이나 카피와 관련해서 제 의견을 반영해주셨죠. 사실, 저로서는 이런 거절이 간단했어요. 거짓말로 광고를 찍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키겠다는 것뿐이죠. 굉장히 제가 고지식해요(웃음). 광고 찍고 대우 자동차를 정말 타고 다녔죠. 재계약 기간이 다 끝난 다음에 바꿨죠. 한국화장품 광고도 했었죠? 그 때도 전부 한국 화장품 제품만 썼었죠. 나름대로 예우와 의무를 다하려 하죠."

- 몇 억의 돈보다 '백지연'이란 이름이 훨씬 중요하다는 말씀이죠?
"그럼요."

눈으로 계약서까지 확인했지만, 백지연 앵커의 '간단한 결론'이란 말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애초 요구사항을 바꿨던 터라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지만 수 억원을 포기하는 것이 어떻게 그에게는 간단할까. 다른 무엇이 있겠지. 그래, 그럴 거야. 보도 제목들이 떠올랐다.

- 이번 사건을 놓고 여러 표현이 있더군요. 그 중 실제와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표현은 무엇입니까?
"기자들 정말 제목 잘 뽑는다고 생각했어요(웃음)."

웃음으로 넘기는가 싶더니 "어떤 표현이 제일 눈에 띄더냐"고 '역질문'이 들어온다. '돈 대신 이미지'란 제목이라고 말해 버렸다.

"좀 얄팍해 보이죠? (기자를 바라보며) 얄팍한데?(웃음) 이미지? 이미지 포장용?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그 때 수억을 포기하면서 이렇게 화제가 되리라 예측했겠어요? 그런 건 아니구요. 사실 저 바보 같은 면이 있어요. 고지식해요. '이건 아니잖아?'하면 손해가 크더라도 안 해요. 뒤돌아보고 후회한 적 있어요, 저도. 이번 일을 사람들이 이렇게 알 줄 알았겠어요? 몰랐어요. 계산 잘 못해요, 제가. 그냥 그렇게 타고 난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선생님이 '책을 30㎝ 떼놓고 봐'하시면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30㎝ 자로 쟀어요(웃음). 새벽에 출근하잖아요? 신호등 파란 불일 때, 아무도 없으면 그냥 지나갈 만 하죠. 그런데 '안 된다'고 스스로 자제해요. 거짓말로 돈 벌고 어떻게 제가 다른 사람을 인터뷰하겠어요? 떳떳하지 못하면 제대로 일을 못하고…. 그럼 오히려 그게 더 피곤해지겠죠. 그게 싫어요."

- 시사프로를 진행하지 않는 상태라도 거절했을까요?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지금 상황이 더 영향을 준 측면도 있겠죠. 지금 프로가 저 스스로에게 더 강력하게 제재했겠죠. 하지만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보면, 별로 상관없이 비슷한 결과가 나왔을 것 같기도 해요. 제 커리어는 앵커라고 생각하거든요. 20년 됐잖아요. 그 이미지에 책임을 져야죠."

백지연 앵커에게는 평소와 다름없는 결정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평소와 달랐다.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계약 단계 혹은 콘티 점검 과정에서 이뤄진 '비공개적인 불발'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백 앵커도 "참 난감했었다"고 한다.

"하루 종일 현장 세팅하고, 카메라 조명 다 맞춰놓은 스탭들. 나만 쳐다보고 있는데 그 분들께는 정말 죄송했죠. 만약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더 빨리 거절하고 나왔을 거예요. 마음이 안 좋았어요. 저를 따라갔던 스탭들에게 점심을 사고 현장을 떠났죠. 뒤에 남으신 분들께 죄송했지만, 만약 그대로 광고 촬영이 됐다면 광고 방영되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지더라구요."

그 때만 해도 '가볍게' 넘어갈 줄 알았다. 하지만 변수가 있었다. "CF 촬영으로 밤을 새고 바로 방송국에 오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르니, 방송 준비에 좀 더 신경 써달라"는 요청에 긴장하고 있던 '백지연의 SBS 전망대' 제작진이 변수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쌩쌩한'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한 제작진의 'CF 촬영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그리고 '백지연의 선택'은 언론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주변에서부터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백 앵커는 약간의 혼란을 겪었다고 했다.

"열이면 열, '정말 그 이유가 다냐, 그래서 수억을 포기했냐'고 해요. 단지 거짓말이 싫어서 CF를 안 찍었다고 믿지 않는 거예요. '나중에 가입하면 되잖아. 바보 아니냐'고 해요. '뭐야, 나만 바보였던 거야? 바보처럼 살았던 거야?'라는 생각도 잠깐 들더라구요. 그런데 큰 사건이 됐잖아요. 네티즌들이 '바보가 아니다'고 판결해 주셨잖아요. 내가 선택을 잘 했구나. 손해를 많이 봤지만, 사람들에게 다시 생각해 볼 만한 기회를 감히 드렸다면. '참 잘 했다'고 생각하게 됐죠."

"인생이란 자기 자신을 지키는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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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안홍기

-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던가요?
"'좋았다'보다 위로를 받았어요. 댓글을 통해 고마움을 느꼈죠.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더라구요. 당연한 일이 칭송 받게 될 만큼,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됐구나. 제가 무슨 아주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제 원칙을 지켰을 뿐이라는 거죠. 그렇다고 제 원칙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남이 제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손가락질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누군가에게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쉽게 손가락질하는 세상이다. 그러면서 흔히 '바보'라는 말을 입에 자주 올린다. '바보'는 '지능이 부족하여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어리석고 멍청하거나 못난 사람을 욕하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에서, 어느새 '우리와 다르게 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당신'에게 쓰는 말이 됐다. 백지연 앵커에게 물었다.

-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아요?
"아뇨. '맨날, 맨날' 그렇게 살면 별로 안 피곤해요(웃음). 돈보다는 명예라고 생각해요. 명예는 자존심이잖아요. (자존심을) 내가 지켜야지, 아니면 누가 지켜줘요. 어떻게 보면 인생이란 것, 자신의 생각을 지키는 투쟁 같아요."

"굉장히 무식하게 일하고 있다"
백지연이 경험한 'SBS전망대' 진행 한 달

5년 전과 얼추 비슷하다. 2002년 <월간중앙> '백지연의 파워 인터뷰' 첫 주자였던 당시 이회창 후보를 만난 날이 5월 15일, 최근 대권 주자로 떠오른 한명숙 전 국무총리 음성이 라디오에 나간 날은 '백지연의 SBS 전망대' 첫 방송일이었던 4월 30일이었다.

2년만의 컴백 프로그램으로 'SBS 전망대'를 택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백지연 앵커는 '누가 문제가 덜한가보다 누가 더 좋을까를 고민하는 대통령 선거를 위해, 사명감을 갖고 검증에 임해야 하는 언론인으로서의 의무감'을 강조한다. 이 말은 당시 월간중앙에 실렸던 '연재를 시작하며'에 들어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 때문인지 백 앵커는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비교하는 외부 반응에 아직까지는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다음은 'SBS에서의 한 달'을 주제로 나눈 일문일답이다.

- 'SBS 전망대'를 복귀 프로그램으로 선택한 이유는?
"2002년에 월간중앙에 대선 주자 인터뷰 연재를 시작하면서 쓴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역사에 길이 남을 대통령을 가지려면, '누가 문제가 덜 한가'보다 '누가 더 좋을까'를 고민하며 뽑게 되고, 국민을 대표하는 언론이 제대로 검증해야 하고, 그래서 인터뷰어의 사명감이 투철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번에도 그렇다. 물론 누가 나에게 따로 사명을 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앵커라는 직업으로 20년을 살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잘 듣고 제대로 물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

- SBS는 상업방송 이미지가 강한데...
"만약 '오프닝에 이런 말 쓰지 마십쇼, 좌로 가십쇼, 우로 가십쇼'한다면 일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까지 전혀 개입이 없었다. 아주 좋은 조건이다."

- 최근 진행자들이 단명한 편이다. 혹시 이와 관련한 조건 명시는 없었나.
"전혀 없었다. '10년 방송하고 골든 마우스가 되야 하지 않겠냐'는 라디오 국장님 말씀이 전부다(웃음). 체력이 관건이다. 건강은 나쁘지 않은데, 체력이 딸리는 편이다."

- 현재까지 방송에 만족하나?
"만족한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굉장히 무식하게 일하고 있다."

- 첫 방송 나가기 전에 기자 간담회를 통해 '나의 강점을 중립'이라고 밝혔다. '공격적인 인터뷰 스타일'과 '중립'의 균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공격적인 인터뷰 스타일과 중립은 별개다. 나는 공격적인 성향의 인터뷰어가 아니다. 장한나씨에게 공격적일 필요가 없지 않나. 내용에 따라 공격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자들에게 공격적일 수밖에 없다. 국회나 정부에 있는 사람 그리고 대통령 등 권력자들의 결정 하나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나. 물론 이럴 수는 있다. 만약 나의 성향에 따라 선별적으로 공격하면 중립은 깨진다. 하지만 나는 정치할 생각이 절대 없다."

- 대선 주자의 가장 중요한 검증 기준을 무엇이라고 보나.
"어떤 개인의 인터뷰를 하게 되면, 5~6년 전 자료까지 찾아본다. 거짓말이 있으면 나오게 마련이다. 사람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래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거짓이 있으면 안 된다. 정말."

- 끝으로 언론인 출신 정치인에 대한 생각은?
"노코멘트가 가장 적절한 답 아닐까."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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