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봄 누렸으니, 잠들듯 가는 게 소원"

한달 전 반포 자택에서 만난 고 피천득 선생

등록 2007.05.28 15:55수정 2007.05.2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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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선생님이 살아계실 적 모습
피천득 선생님이 살아계실 적 모습송춘희
지난 5월 25일 수필계의 대부이신 피천득 선생께서 하늘나라로 가셨다. 평소 늘 욕심 없는 삶과 맑고 아름다운 시와 글을 많이 발표하셨던 피천득 선생을 봄이 한창이던 4월 19일 반포 자택에서 만났다.

1910년생, 올해 나이 98세. 한 세기를 살아온 우리나라 최고령 문인일 뿐 아니라 최고의 수필가이다. 그의 수필은 교과서에 소개되었기에 더욱더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 편 한편의 글이 모두 진주와 같이 아름다운 글들이다.


'신춘' '조춘' '봄' 등 이렇게 유난히 봄을 많이 노래한 수필가 피천득을 찾아가서 그의 근황과 요즘 생활에 대해 들어 보았다.

...봄이 오면 무겁고 둔한 옷을 벗어 버리는 것만 해도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주름살 잡힌 얼굴이 따스한 햇볕 속에 미소를 띠고 하늘을 바라다보면 곧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봄이 올 때면 젊음이 다시 오는 것 같다.

녹슨 심장도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건을 못 사는 사람에게도 찬란한 쇼윈도는 기쁨을 주나니, 나는 비록 청춘을 잃어버렸다 하여도 비잔틴 왕궁에 유폐되어 있는 금으로 만든 새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아 봄이 오고 있다. 순간마다 가까워 오는 봄...(피천득 수필 '봄' 중에서)


-선생님께서는 유난히 봄을 많이 노래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난 거의 1세기를 살아온 사람입니다. 일제 시대의 고통도 겪었고 6.25전쟁도 겪었기 때문에 유난히 봄이 좋아요. 희망적이잖소?"

-선생님의 작품 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으신지요?
"물론 춘원 이광수 선생입니다. 내 지식의 70%는 춘원선생에게 배운 것들입니다. 영어든 일반 상식이든 뭐든지요. 그분의 덕을 많이 받았죠. 다음으로는 주요한과 주요섭인데 상해 유학시절에 그분들 덕에 난 유학에 대한 스트레스나 어려움이 없었어요. 요즘 말로 든든한 백들이 있었으니까요."

-선생님의 수필 '인연'에 나오는 '아사코'를 얼마 전 모 방송사에서 수소문하여 찾았는데 선생님께서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던데 첫사랑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나도 궁금한데, 지금 그 아사코가 나보다 10살 아래인데 남의 부인이 되어 있을 텐데 내 욕심으로 그 사람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그런 욕심이 화를 부르기도 하니까요."

-요즘 웰빙 시대라 해서 잘 먹고 잘 살자, 라는 주의가 많은데요. 선생님께서는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난 이제 이렇게 많은 봄을 누리고 살았으니 어느 날 자다가 그냥 가는 것이 나의 큰 소원입니다. 어디 아픈 곳도 없이 그냥 잠들었는데 아침에 하늘나라에 가 있는 거요. 뭐든지 욕심안내고 남들 맘 편하게 해주는 것이 좋지요."


제자들과 지인이 선물한 조개의 모습
제자들과 지인이 선물한 조개의 모습송춘희
선생님의 서재. 잉글리드 버그만의 사진도 보인다.
선생님의 서재. 잉글리드 버그만의 사진도 보인다.송춘희
...봄이 되면 고목에도 찬란한 꽃이 핀다. '슬픈 일을 많이 보고 큰 고생을 하여도 나는 젊었을 때 보다 오히려 센티멘탈하지 않다. 바이올린 소리보다 피아노 소리를 더 좋아하게 되었고, 병든 방미보다는 싱싱한 야생 백합을, 신비스러운 모나리자보다는 맨발로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시골 처녀를 대견하게 여기게 되었다....('신춘' 중에서)

인터뷰 도중에도 그의 거실에서는 내내 조용하고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소리가 들렸다. 거실의자에 앉아 그의 인연 이야기를 하자 아름다운 봄을 맞고 있는 피천득 선생의 얼굴에는 어느새 어린아이처럼 봄처럼 밝은 미소가 비쳤다. 1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아파트를 나왔다.


아파트 앞에는 아파트 키보다 더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나무들 사이로 예쁜 벚꽃들은 어느새 꽃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이제 그는 벚꽃들처럼 거리를 활보하지는 못하지만 세상의 아름다운 인연과 만든 좋은 글들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떠났다. 마치 아낌없이 베풀고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저 나무들처럼.

아파트보다 키가 더 커 버린 반포 자택 앞의 나무들
아파트보다 키가 더 커 버린 반포 자택 앞의 나무들송춘희
인형 '난영'을 안고 있는 생전의 피천득 선생님.(2003년 1월 촬영)
인형 '난영'을 안고 있는 생전의 피천득 선생님.(2003년 1월 촬영)송춘희

덧붙이는 글 | SBS 유포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덧붙이는 글 SBS 유포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피천득 #수필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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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입니다.세상에는 가슴훈훈한 일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힘들고 고통스러울때 등불같은, 때로는 소금같은 기사를 많이 쓰는 것이 제 바람이랍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앵그르에서 칸딘스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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