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서라벌이구나. 사비와 다를 것 없이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화안공주는 서라벌의 풍경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신라의 영토에 들어서면서부터 신라에서 마중 나온 이들에게 앞자리를 내어주고 뒤에 쳐진 고도는 자신의 귓가에 잔잔히 흐르듯이 내려오는 화안공주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신라의 왕은 그들을 직접 접견하며 노고를 치하했다.
“귀한 몸을 이끌고 먼 길 잘 오시었네. 못난 내 아들의 천생배필이 될 몸을 너무 고생시킨 거 같네.”
“그저 양국의 우호가 계속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화안공주의 말은 마치 외교사신처럼 상투적이었다. 신라왕의 시선은 조금 뒤에 서 있는 고도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결코 평범한 자가 아닌 듯한데 남부여에서 어떤 위치에 있던 자인고?”
고도가 내신좌평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고 스스로도 밝힌 바가 없었다. 다만 고도가 왕을 만나서 예를 갖추기 위해 걸친 비단 옷만이 그의 신분을 대변해 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저 공주님을 수행하기 위해 따라온 자일 뿐 그리 귀한 신분은 아니옵니다. 게다가 저는 남부여로 다시 돌아가려고 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
고도가 말없이 서있자 신라의 문무백관은 그의 무례함을 속으로 욕했다.
“여봐라 이찬.”
“예.”
“저 자에게 공주를 수행하는 일을 계속 맡기기 보다는 적합한 소임을 주는 것이 어떠한가?”
그래서 고도가 맡은 일은 궁중의 말을 돌보는 일이었다. 물론 고도가 직접 말의 여물을 주고 닦아주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러한 일을 하는 아랫사람들을 다스리는 낮은 관직이었다. 신라왕은 고도가 신라의 사정을 염탐하기 위해 보내진 자로 보고 그를 두고 볼 참이었다.
“알고 보니 그 자는 남부여 내신좌평의 아들이라 합니다.”
남부여의 사정을 염탐하러 간 첩자의 보고를 받은 대신이 신라왕에게 고하자 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좌평의 아들까지 첩자로 보낼 정도로 남부여의 사정이 다급하단 말인가.”
“굳이 그런 건 아니고 화안공주님을 흠모하다가 따라오게 된 이유가 있다 합니다.”
“그래? 이 일은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 우리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도 있는 일이다.”
말은 그러했지만 신라왕은 그 이후로 고도에 대한 일을 잊어버렸다. 신라왕의 넷째아들과 혼인한 화안공주의 결혼생활도 그저 무던했고 말먹이들을 다스리는 고도의 생활도 똑같은 일상의 반복일 뿐이었다. 하지만 고도는 화안공주를 결코 잊지 않았으며 공주의 향수를 달랜다는 핑계로 공주를 만나 남부여의 노래를 불러주고는 했다.
-높이 돋은 달이여 / 이를 얼어셔 우러러 보매 / 아으 더려렁셩 / 어기야 이내 몸 둘 데 없어라….
“좋구나.”
화안공주는 고도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한 낮에 고도를 불러 가끔씩 이러한 연회를 치르는 것을 사람들은 구태여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고도의 사정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은 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노래를 들려주겠느냐?.”
고도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자신에게 노래를 요청하고 환하게 웃는 화안공주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한편으로 고도는 화안공주가 자신을 비웃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자신의 감정을 담아 절실하게 울부짖었다.
-가지 가지 너울대는 아름다운 매화는 죽죽 뻗어 휘어졌구나./ 그 매화 꺾어 담으면 이 병하나 가득 되겠구나. / 그 잎 펴서 가지 가지 죽죽 벌려 / 하늘하늘 담아 이 꽃병 가득 그대에게 드리오나. / 꺾어 꼽은 매화가지 시들어 가는구나. 너르렁셩 아롱디리.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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