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굽이에 흐른 게 어찌 시심(詩心)뿐이랴

소백산 죽계구곡(竹溪九曲) 주변

등록 2007.06.17 14:12수정 2007.06.19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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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구곡. 죽계는 대부분 나무와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 장호철

소백산은 충북 단양군 가곡면과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걸친, 태백산에서 남서쪽으로 벋은 소백산맥에 속한 산으로 주봉은 1439m의 비로봉이다. 북서쪽은 경사가 완만하나 동남쪽은 가파른데, 낙동강 상류로 들어가는 죽계(竹溪)가 여기서 비롯한다.

소백산은 한반도 온대 중부의 대표적인 식생을 갖는 지역으로 낙엽활엽수가 주종이다. 비로봉엔 희귀식물인 외솜다리(에델바이스)가 자생하고 비로봉·국망봉 일대는 천연기념물인 주목의 최대 군락지다. 이처럼 산과 골이 깊으니 품은 절집도 여럿이다. 동남쪽으로는 초암사, 북동쪽으로는 성혈사, 남서쪽 제2 연화봉 동남 기슭에는 천년고찰 희방사가 자리잡고 있다.

초암사(草庵寺)는 국망봉 남쪽 계곡 아래,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적에 묵었다는 초막 자리에 세운 절이다. 의상은 부석사를 지은 후 여기 다시 절을 세웠는데, 우람한 돌축대와 주춧돌 등으로 미루어 상당한 규모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 6일, 초암사에 올랐을 때, 전쟁으로 부서진 후 다시 지은 법당만 남아 있었던 이 절집은 거듭되는 불사로 옛 모습을 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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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사. 전쟁 뒤 지었다는 대웅전의 지붕이 보인다. 2005년 가을.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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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사 대적광전. 새로 지은 이 전각 덕분에 한 단 아래의 오래된 대웅전은 초라해졌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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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사 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 석탑이다. ⓒ 장호철

거듭되는 불사로 옛 모습은 잃어가고

다섯 칸짜리 소박한 맞배지붕의 옛 대웅전은 지붕 기와를 새로 얹었고 도리를 가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대웅전 위 언덕에 위풍당당하게 들어선 날렵한 팔작지붕의 대적광전 등으로 하여 이 풀의 암자는 오랜 '풀[草]과의 인연'에서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

대적광전을 지나 국망봉에 오르는 등산로 곁에 소백에서 발원한 죽계의 첫 굽이, 죽계구곡(竹溪九曲)의 제1곡 '금당반석'이 시작된다. 죽계구곡은 고려 후기 명현이자, 문장가인 안축이 읊은 경기체가 "죽계별곡"의 배경으로 순흥에서 벼슬을 살았던 퇴계와 주세붕 등 선현들이 시와 풍류를 즐기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죽계구곡은 <순흥지(順興誌)>에 영조 4년(1728)에 순흥부사로 부임한 신필하가 지은 이름이라 전한다. 제1곡 금당반석에서 제9곡 이화동까지 거리는 약 5리(2Km). 현재는 1·2·4·5·9곡의 이름만이 전한다. 울창한 숲, 맑은 물, 물길과 어울린 크고 작은 바위로 빚어지는 경치는 빼어나지만, 기실 죽계는 그리 큰 시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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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의 제1곡 금당반석. 해발 500m 초암사 앞인데 현재 출입을 막고 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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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 풍경. 숲과 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이런 시내가 5리에 걸쳐 흐른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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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8곡. 아홉굽이 중 1·2·4·5·9곡만 이름이 전한다. ⓒ 장호철

그러나 계곡을 끼고 오르는 산길로 문경 새재와 주왕산을 치는데 죽계구곡도 거기 견주어 처지지 않는다. 비록 수량도 보잘 것 없고 계곡이라기보다는 그냥 '큰 도랑'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무성하게 자란 숲에 가린 계곡의 진면목은 만만치 않다. 한때 여기는 버들치와 가재가 서식하고 반딧불이가 지천으로 날던 아름다운 시내와 오솔길이었다.

초암사까지 자동찻길이 생긴 것은 초암사가 중창되면서부터라 한다. 도로가 새로 뚫리고 자동차가 절집을 오르내리면서 태고의 정적이 머물던 계곡의 평화와 신비도 사라져 버렸다. 물속에는 더 이상 가재도 다슬기도 없다. 손바닥 만했다는 물고기 버들치는 물론 반딧불이도 사라졌다. 계곡 주변에 잇대어 있던 계단식 벼논은 사과밭으로 바뀌었다.

계곡을 따라 난 찻길은 좁아서 차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길섶으로 물러서야 한다. 주변의 숲은 묵지는 않았으나 곧게 자란 나무로 빽빽하다. 고로쇠·물푸레·졸참·보리수·복사·산뽕·귀룽·산사·신갈·산돌배·야광나무 등이 반듯한 명패를 달고 계곡을 지키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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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를 오르는 길섶의 찔레꽃. 소백산의 봄은 좀 더뎌 보인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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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섶의 산딸기. 옛 기억을 잊지 않고 있는 감각의 으뜸은 역시 미각이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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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의 시냇물은 수량은 변변찮아도 맑고 시리도록 차다. ⓒ 장호철

자동차가 오르내리면서 계곡의 평화는 사라지고

산속의 봄은 좀 더딘 셈인가. 길섶에 찔레꽃이 한창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그 새순으로 아이들 허기를 달래주었던 이 풀꽃은 하얀 꽃잎을 활짝 열고 사람들을 맞고 있었다. 길섶에는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은 산딸기도 가끔 눈에 띄었다. 마치 아낙의 성낸 젖꼭지 같은 그 빨간 열매의 맛은 여전하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감각은 옛 맛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미각일지도 모른다.

근재(謹齋) 안축은 본관이 순흥, 죽계(지금의 풍기)를 세력 기반으로 중앙에 진출한 신진 유학자였다. 그가 지은 "죽계별곡(竹溪別曲)"은 이두문으로 표기된 모두 5장의 경기체가로 고향 죽계의 경치를 읊은 노래다. 그 제2장은 순흥 경내와 근교 사찰들에서의 '유락(遊樂)'를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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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 어귀의 호수 죽계호 곁에 세운 근재 안축의 시비. 경기체가 "죽계별곡"이 새겨져 있다. ⓒ 장호철

숙수사의 누각과 복전사의 누대 그리고 승림사의 정자,
소백산 안 초암동의 초암사와 욱금계의 비로전 그리고 부석사의 취원루 들에서,
술에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깨었는데, 붉고 흰 꽃이 핀 산에는 비가 내리는 속에,
아! 절에서 노니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하략)


경내의 아름다운 누각과 정자에서 반취한 유생과 기녀들의 유락이 질펀하다. 때는 붉고 흰 꽃이 만개한 산에 촉촉이 비가 내리고 있는 봄이다. 나라는 이미 몽고의 치세 아래 있었으니 백성들의 삶은 고단할 터이나 태평성대의 구가는 흥겹기만 하다.

숙수사(宿水寺)는 순흥 백운동 소수서원 자리에 있던 통일신라 전기에 창건된 고찰, 죽계는 그 절집 주변으로 흘러간다. 그가 노래한 죽계에 흐른 것은 시심(詩心)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안축 사후 100년이 넘어 이 시내는 한바탕 피비린내에 휩싸인다. 백운동에 안향의 사당이 세워진 다섯 해 뒤(1456)에 순흥 고을 사람들은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한바탕 피비린내에 휩싸인 죽계

순흥 안씨의 세거지인 순흥에서 일어난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로 순흥부는 불타 폐부가 되었고, 숱한 백성들이 무참히 타살되었다. 피가 죽계를 적시고 흘러, 십 리 아래 '피끝마을(안정면 동촌동)'까지 이어졌다. 지역의 호족이었던 안씨들은 죽임을 당했고, 피신했던 일가들도 100여 년 가까이 순흥에 드나들지 못했다.

죽계 제9곡을 빠져 나오면 퇴계의 평민 제자였던 배순을 기리는 마을, 배점(裵店)이 있다. 대장장이 배순은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삼년복을 입고, 그가 다루던 쇠로 스승의 상을 만들어 기리는 등 제자의 예를 다하여, 광해군 7년(1615) 충신으로 표창된 이다. 배점이라는 이름은 그가 죽은 후 주민들이 정려각을 세우면서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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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사 나한전. 정면 3칸, 측면 1칸의 조그만 전각이지만 400년이 가까운 오래된 건물이다. ⓒ 장호철

배점리에서 죽계와 반대 방향의 가파른 산기슭을 오르면 성혈사(聖穴寺)에 닿는다. 역시 의상이 세운 절이라는데 인근 절집마다 창건주로 의상을 꼽으니 소백산 자락은 그의 그늘이 수십 리다. 의상이 초암사를 짓고 있을 때, 매일 지붕의 서까래가 없어졌다. 찾아보니 서까래가 인근 숲속에 쌓여 있었다. 이에 주위의 풀을 뜯어 초막을 지으니, 글쎄, 이것이 곧 성혈사라 한다. 성혈은 성승(聖僧)이 나왔다는 근처의 바위굴을 이른다.

성혈사는 높다란 돌 축대 위의 대웅전과 나한전·요사채 등으로 이루어진 조그만 절집이다. 보물 제832호로 지정된 나한전은 아담한 맞배지붕 건물로 배흘림기둥과 꽃창호문이 매우 아름다운 전각이다. 보수 때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이 전각은 1553(명종 8)년에 세워졌고 1634년(인조 12)에 중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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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 가운데 칸의 창호문. 연꽃 가득한 연못에 사람과 물고기와 새가 어우러졌다. ⓒ 장호철

'아무 걸림 없는' 무애의 경지 보여줘

정면 세 칸 나한전의 여섯 쪽 창호문에 꽃이 빽빽하게 피어 있다. 채색은 바랬지만 정교하고 사실적인 문살 조각은 370여 년 세월을 성큼 뛰어넘는다. 특히 가운데 칸은 연꽃과 잎으로 가득 찬 연못인데, 물고기를 쪼고 있는 새, 연잎 위에 올라앉은 개구리, 헤엄치는 물고기, 연꽃 줄기에 매달린 동자상 등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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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 앞 석등. 거북 등을 올라탄 용의 얼굴은 호랑이나 사자에 가깝다. ⓒ 장호철

좌우의 창호문에 새겨진 꽃문살에 비기면 가운데 칸의 연못 풍경 등 민화풍의 조각들이 보여주는 것은 일종의 익살과 여유다. 특히 맑은 연못 속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는 물고기의 모습은 '아무 걸림이 없는 상태', 무애(無碍)의 경지를 소박하게 보여준다.

나한전 앞에 거북등에 올라탄 용이 화사석(火舍石, 석등에 등불을 밝히도록 된 부분)을 받치고 있는 석등 두 기가 보여주는 것도 비슷한 정경이다. 용의 머리를 단순화시켜 호랑이나 사자의 얼굴인 듯, 해학적으로 새긴 것이다.

부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이라 나한전은 주불전에서 떨어진 자리에 두고, 건물의 외양도 주불전보다 격이 낮다. 그러나 나한전의 문살과 석등이 연출하는 익살과 여유는, 나한전을 부러 장엄하게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창호문에 연화 세상과 거기 어우러져 사는 뭇 중생을 한뜸 한뜸 새긴 각수(刻手)와 석공의 소박한 불심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산에서는 산을 볼 수 없다. 좁고 가파른 비탈길을 나서자말자, 이미 성혈사는 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나날이 짙어지는 신록의 물결로 소백산은 천천히 옷섶을 여미고 있었다.

아홉 굽이[구곡(九曲)]는 끝났지만 죽계의 흐름은 그치지 않는다. 옛 순흥부와 소수서원으로 이어지는 이 대[竹]의 시내[溪]에서 풍겼을 피비린내를 상상하면서 우리는 순흥을 향해 소백산 기슭을 떠났다.
#소백산 #죽계구곡 #초암사 #성혈사 나한전 #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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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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