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칭찬 한 마디, 평생을 간다

'동창 이경훈 선생님'의 유작전에서 25년 전 선생님이 떠오르다

등록 2007.06.18 15:48수정 2007.06.1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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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동창회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이경훈 미술선생님 유작전 소식을 들었다. 지금도 눈에 선한 선생님을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나 된 선생님을 직접 만나기라도 하듯 마음이 설레었다. 25년이 지나도 남아 있는 건 선생님의 칭찬이었다. 선생님께서 하신 칭찬이 나를 움직였다.

25년 전, 날 칭찬해주셨던 미술 선생님

운동장 한가운데서 미술선생님과 마주쳤다. 난 친구와 같이 있었다. 선생님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시더니, 내 눈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씀하셨다.

"너는 미술을 그려야 해."

정색을 하고 하시는 말씀에 조금은 얼떨떨했지만 난 그냥 웃기만 했다.

미술시간이었다. 파레트에 그림물감을 짜고 붓에 물을 묻혀 그림물감을 쓰기 좋게 갠 다음 스케치북에 색을 칠했다. 그림이 완성될 즈음 교실을 둘러보던 선생님이 내 자리로 오셨다. 내 그림을 번쩍 들어 다시 보신 선생님은 아주 좋다고 칭찬을 해 주셨다. 꽃무늬를 여러 개 그려 넣은 그림이었는데, "천이나 종이에 도안으로 쓰면 좋겠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계속되는 칭찬이 좋기는 했지만, 난 미술시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림물감이 손에 묻는 게 싫었고, 한참 그리다 보면 지루해져 갑자기 그리기가 싫어지는 것이 문제였다.

미술대회를 앞두고 참가할 사람을 뽑는 시간. 난 가만히 움츠리고 있었다. 그런데 운동장에서 선생님을 같이 만났던 친구가 나를 쳐다보았다. 난 손을 내저으며 싫다고 했지만 친구가 막무가내로 추천.


난 결국 미술대회에 나갔다. 전과 같은 그림을 조금 변형해서 그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중간쯤 또 싫증이 났다. 억지로 남아있는 흰 부분을 물감으로 메우고 그림을 냈다. 결과는 2등. 중학교 때니까, 25년 전 일이다.

선생님의 그림에는 1970년대 풍경이 그대로...

그런데도 선생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하다. 선생님은 학교 근처에 사셨고, 가끔 폭음을 하셨다. 아마도 이상과 현실사이의 괴리감 때문이었으리라. 그때는 그저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지나쳤지만 지금은 선생님 마음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분야는 다르지만 나도 역시 그 예술이라는 한 분야를 억지로라도 거머쥐고 있으니 저절로 공감이 되는 것이다.

그때 그림물감을 손에 묻히기 싫어하고, 그리다가 쉽게 싫증이 나 선생님 권유를 따르지는 않은 아이가, '지금은 그림물감을 쓰지 않아도 되고 중간에 싫증이 나도 나중에 이어 쓰면 되는 글을 쓰고 있다'고, '아직도 선생님을 잊지 않고 있어 선생님 그림을 보러 왔다'고, 계단을 오르며 선생님께 인사하는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선생님의 자화상이 정면에서 아주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선생님의 자화상이 정면에서 아주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이현숙
입구에는 많은 화환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 주었고, 안내실은 비어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유화와 드로잉과 수채화. 그림 하나하나를 천천히 감상하며 지나갔다. 다 보고 갈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했지만, 안내실에는 이미 사람이 와 있었고 모녀인 듯한 여자 둘이 들어왔다. 나처럼 기대를 잔뜩 안은 표정으로.

복사골의 대표 격인 복사꽃이 너울거리고, 학교 뒷동산 풍경도 있었다. 그림을 보고 있자니, 25년 전이 어제인 듯 떠올랐다. 복숭아 과수원이 있고 마을이 있고 멀리 교회가 보이는 그림도 친근하게 다가왔다. 선생님은 언제 이 그림을 다 그리셨을까?

우리 학교 뒷동산 모습과 같은데... 제목은 미상.
우리 학교 뒷동산 모습과 같은데... 제목은 미상.동창 이경훈
복사꽃이 만발한 복숭아 과수원이 있는 동네. 제목은 미상.
복사꽃이 만발한 복숭아 과수원이 있는 동네. 제목은 미상.동창 이경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림에는 1970년대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0년이 지나도 아니 백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이래서 표현이라는 건 참 중요 하구나' 새삼 깨닫고 '선생님이 본 풍경이나 내가 본 풍경이나 똑 같네' 라는 생각으로 슬며시 웃으며 그림을 감상했다.

그림을 다 보고 나오는데, 안내에서 어떻게 오셨느냐고 묻는다. 난 방명록에 이름을 쓰면서 제자라고 말했다. 곧 푸짐한 선물이 내게 안겨졌다. 그런데 받으면서도 영 편치 않았다. 이 가난한 제자는 빈손으로 온 것이다. 그렇다고 안 받을 수도 없고….

한 손에는 선생님 그림 복사본(큰 통에 들어 있다) 한 손에는 유작전 기념작품집을 들고 힘겹게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나는 '선생님 가난하고 엉성한 제자 다녀갑니다. 빈손으로라도 꼭 와 보고 싶었던 건 선생님의 그림이 궁금했고 또 선생님의 칭찬이 지금도 힘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선생님의 칭찬은 참 큰 위력을 지녔다. 25년이 지나도, 또 선생님은 곧 잊어버렸을지라도 여전히 내 안에서는 유효하니 말이다. 이쯤에서 이 땅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신 선생님들께 슬며시 당부 한마디가 하고 싶어진다.

"못난 아이, 잘 난 아이 구분 하지 말고 칭찬 한 마디 좀 해주세요. 당신은 잊어도 아이들은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덧붙이는 글 | * 동창 이경훈 선생님은 중동고등학교에서도 재직하셨고, 제 모교인 소명여자고등학교에서도 재직하셨습니다.

* 유작전은 6월 8일-6월 19일까지이며
  전시 장소는 광화문에 있는 신한갤러리입니다.

덧붙이는 글 * 동창 이경훈 선생님은 중동고등학교에서도 재직하셨고, 제 모교인 소명여자고등학교에서도 재직하셨습니다.

* 유작전은 6월 8일-6월 19일까지이며
  전시 장소는 광화문에 있는 신한갤러리입니다.
#이경훈 #미술 #칭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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