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18회

등록 2007.06.20 08:13수정 2007.06.20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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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곡 일행은 아직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인물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는데 우슬과 무화, 그리고 귀산노인이 그녀들 뒤로 엉거주춤 따라서 다가오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슬은 무화의 손을 잡고 걸어왔는데 함곡 일행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곧 바로 설중행 앞에 다가섰다.


“당신은 참으로 말을 안 듣는 사람이로군요.”

설중행은 그녀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는 마치 홀린 듯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할 생각도 없고 특별히 다른 생각도 하지 않는 듯 싶었지만 그의 눈에는 과연 저렇듯 맑은 눈을 가진 여자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인지 호기심을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허나 그녀를 찾아오라는 것은 그녀의 일방적인 요구였고, 자신이 굳이 그것에 따를 이유는 없었다. 물론 귀산노인을 만나고 나서 자신의 출생에 대해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고,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정혼자라는 말도 사실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허나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알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렇다고 애써 피한 것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아직까지 자신이 그리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은 스스로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중으로 찾아갈 생각이었소.”

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왠지 우슬을 보면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그녀의 입에서 어떤 부탁이 나오면 반드시 들어주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꺼려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마음을 가진 것만으로도 다행이군요.”

우슬이 함곡 일행, 특히 설중행과 아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이 보이자 나가려고 걸음을 옮기던 수많은 사람들이 힐끔힐끔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녀는 함곡선생과 풍대협… 그리고 여러분들께 오늘 저녁 식사를 초대할까 해요. 모두 괜찮으신가요?”

우슬이 모두를 바라보며 말을 했는데 그 목소리는 매우 또렷하고 청아한 것이라서 되도록 조용히 움직이는 좌중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이곳을 힐끔거리던 다른 인물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특히 젊은 층들의 반응은 매우 묘했다. 상교교와 상민민마저도 복잡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고, 추교학은 얼굴색이 홱 변할 정도였다. 더구나 옥기룡까지 눈에 띄게 표정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백부를 시해한 자를 우슬이 어찌 알고 있는 것일까?

낯선 사내와는 말을 섞지 않는 성격인 우슬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러할 터였다. 외출마저도 극히 꺼려하는 우슬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뜻밖이었지만 타인을 운무소축으로 식사를 초대하는 일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특히 추교학의 눈에는 질투로 보이는 기색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고, 당장이라도 뛰어올 태세였는데 추산관 태감이 어깨를 툭 치며 어서 나가자는 의미로 고갯짓을 했다. 허나 억지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우슬에게 머물러 있었다.

“음… 소저께서… 초대하는데… 어찌….”

함곡 일행은 뜻밖의 제안에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함곡만이 헛기침과 함께 입을 떼면서 풍철한을 바라보았다. 풍철한 역시 잠시 머뭇거리다가 싱긋 웃었다.

“운무소축에도 술이 있소?”

“물론이에요. 아마 귀산어르신께서는 손수 담그신 장원홍(壯元紅)이라도 오늘 저녁에 파내시게 될 거예요.”

그녀는 아주 즐거운 듯이 하얀 이를 내보이며 살짝 미소를 지었는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찔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것은 정말 이상한 것이 그녀의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꼭 짚어 말할 수 없는 그녀만의 독특한 기품이 그렇게 만드는 것 같았다.

“쩝….”

풍철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여아홍(女兒紅)이 여아가 시집갈 때 쓰기 위해 담근 술이라면 장원홍이란 아들이 태어났을 때 술을 담가 땅에 묻어두었다가 장가갈 때 그 잔치에 쓰는 술을 흔히 일컫는 말이다. 아들도 없는 귀산노인이 왜 담가 놓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십년은 족히 되었을 터. 풍철한은 입안에 침이 고이는 듯 입맛을 다셨다.

“유시(酉時)면 되겠소?”

함곡이 웃으며 말했다. 뜻밖이었지만 사실 우슬의 초대는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다른 인물들이 어떻게 주시하고 있든 간에 말이다.

86

와장창----!

이미 실내에 있던 기물들이 거의 부서져 나간 후였다. 상만천은 자신의 거처로 들어가 문을 닫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화를 삭이지 못하고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부셔버렸던 것이다.

“……!”

밖에는 용추와 두 딸이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의 동정만 듣고 있을 뿐 말리려 하지 않았다. 상만천을 잘 아는 세 사람은 저런 상황에서 들어가는 우는 범하지 않는다. 저런 상만천의 행동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의 노화를 가라앉히는데 매우 유용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연무각에서 충동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용추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자신이 첫날밤에 당한 부상으로 하루 반나절 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

무언가 때려 부수는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상만천은 거친 숨소리가 금방 잦아들었다. 무엇 때문일까? 갑자기 자신의 분노를 못 이기고 졸도라도 한 것일까? 용추와 상만천의 두 딸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들어가야 할지 말지 서로에게 의견을 구하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상만천의 화가 완전히 풀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란 것을 이미 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헌데 뜻밖이었다.

“용추… 게 있으면 들어와 보게.”

목소리는 나직했고, 심각한 기색마저 들어 있었다.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기에 분노에 가득 찬 소리를 질러야 할 상황에서 잔뜩 굳어있는 것일까?

용추는 뛰듯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두 딸 역시 급히 용추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섰는데 예상과 다르지 않게 방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성한 물건이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탁자만큼은 제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상만천은 그 탁자 위에 화선지(畵宣紙)를 펼쳐놓고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글씨를 쓴 것인지 그림을 그린 것인지 모르지만 붉은 색이 뒤섞여 있었다.

용추와 두 딸이 들어왔는데도 상만천은 그 종이 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종이 옆에는 부서진 목갑이 있었는데 바로 함곡의 아내를 감추어 들어오려다 실패한 관 안에 있었던 그 목갑이었고, 또한 보주가 함곡에게 보낸 그 목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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