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어린 시절 등굣길을 걸어보았습니다

선친의 87회 생신을 맞아

등록 2007.06.20 14:38수정 2007.06.21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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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19일(음력 5월 5일·단오)은 21년 전에 별세하신 내 선친의 생신이었다. 1920년생이시니 올해 생신은 87회가 된다. 해마다 선친 생신에는 가족 모두 성당에 가서 '위령미사'를 지내고, 꽃과 간단한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성묘를 하고, 저녁에는 외식을 했다.

선친께서 별세하신 후에도 생전과 똑같이 선친의 생신을 잘 지내는 것은 누님 덕이기도 하다. 누님은 해마다 선친의 생신 때만 되면 내게 전화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를 하고, 돈을 보내주시곤 했다.

올해도 해마다 하는 똑같은 부탁을 반복하고, 미사예물로, 성묘 비용으로, 가족 외식 비용으로 쓰라며 20만원을 보내주셨다. 그런데 올해는 신부님이 서산지구 사제연수 관계로 며칠 동안 부재하시게 되어 위령미사는 다음 주중에 지내기로 했고, 또 내가 어제 출타를 한 관계로 성묘와 가족 외식도 생신 하루 뒤인 오늘로 미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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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조상 250년의 뿌리가 내려진 곳이며, 내 선친께서 나고 자란 태안군 근흥면 두야1리 추동.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은 이미 옛날에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좀 멀리 보이는 해경(海警) 아파트 자리에는 내 조상들의 묘소가 있었는데... ⓒ 지요하

아내와 동생이 저녁에 퇴근을 해오고, 조카 아이들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길어진 해를 이용하여 가까이에 있는 성당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하고 이어서 가족 외식을 할 예정이다. 이 행사를 위해 중학생 조카 녀석은 학원에 한 시간 지각을 하기로 했다.

선친 생신에 위령미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고, 또 가족 외식을 하는 고정적인 연례행사 외로 올해는 내가 특별한 일 한 가지를 했다. 갑작스러운 대전 출타 관계로 그 행사를 선친 생신 당일에 하지 못하고 하루 앞당겨 엊그제 실행한 것이 다소 아쉽게 하지만, 그런대로 선친의 올해 생신을 잘 기념한 일로 여긴다.

그 일은 선친께서 나고 자란 마을(태안군 근흥면 두야1리 '추동')에서부터 근흥면사무소 소재지인 용신3리 '근흥초등학교'까지, 선친께서 소년 시절에 보통학교에 다니셨던 그 길을 내 두 발로 걸어보는 일이었다.

나는 그 일을 지난해 생각했다. 많은 애환을 만들며 20년 동안 살았던 태안읍 동문1리 백화산 기슭의 '샘골연립'을 떠나 지금 살고 있는 남문4리 밤골의 '진흥아파트'로 이사를 한 지난해 1월부터는 백화산 등산 대신 고장의 수많은 길(들길·산길·해변길)들을 하나하나 걸어보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직선거리로 45분 정도 소요되는 근흥면 두야1리 '추동'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내 집안 250년 이상의 뿌리가 내려져 있는 곳이었다. 내 조상이 대대로 삶을 이어온 곳이고, 내 선친께서 나고 자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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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흥면 안기리의 ‘용오천’은 풀이 덮여 물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내 선친이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니며 이곳에서 더러 쉬기도 했을 것 같은데... ⓒ 지요하

내 선친께서 나고 자란 집은 이미 먼 옛날에 없어졌고, 이제는 그 집터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지만, 그곳에는 내 8대조부모님의 '효(孝)'와 '열(烈)'을 현창(顯彰)하는 '정려문(旌閭門)'이 지금도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나는 그날 내 조상님들의 효열정문 앞에서 큰절을 올린 다음 땀을 식히며 그 마을에 내 조상님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 즉 선친께서 나고 자란 집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사실을 새삼스럽게 아쉬워하다가 불현듯 한가지 생각을 얻게 되었다. 그 정문에서부터 용신리 근흥초등학교까지, 내 선친께서 소년 시절 3년 동안 학교 다녔던 길을 언제 한번 내 두 발로 걸어보자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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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은 내가 자동차로는 옛날부터 수없이 다닌 길이었다. 안흥을 가거나 연포해수욕장을 가려면 그 길을 밟아야 했다. 아내가 1999∼2000년, 안흥초등학교와 신진도분교에 근무할 때는 운전기사 노릇을 하느라 매일같이 그 길을 가고 오고 했다.

그렇지만 한 번도 내 두 발로 그 길을 걸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 선친께서 소년 시절에 3년 동안 학교를 다니신 길이라는 사실은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두야리 추동에서 용신리 근흥초등학교까지 시오리도 넘을 그 먼 길을 어린 시절에 어떻게 매일같이 다닐 수 있었을까? 신기한 마음과 안쓰러운 느낌을 가져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을 내가 걸어볼 생각은 정말이지 한 번도 해보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생각을 떠올렸을 때 나는 야릇한 흥분마저 느꼈다. 뒤늦게나마 그런 생각이 내게 와준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했다. 처음에는 그 일을 곧바로 실행할 생각이었는데, 더러 과속도 하는 수많은 차량 통행에 은근히 겁을 먹으며 덥지 않은 계절로 미루다 보니, 그 일을 내년 선친 생신 때 생신 기념으로 실행하면 더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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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야리와 용신리의 중간 지점인 안기리에서는 장명수 간사지 들판 너머로 태안읍 백화산과 내가 사는 진흥아파트도 보인다. ⓒ 지요하

그 생각을 아내에게 말하니 아내는 찬동을 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느냐고 하면서 자신도 함께 그 길을 걸어보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 부부는 2007년 6월 19일(음 5월 5일), 선친의 87회 생신에 선친의 소년 시절 등굣길을 함께 걸어보기로 굳게 약속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 일에 함께 하지 못했다. 오른쪽 무릎에 생긴 문제 때문이다. 선친의 생신 안에 그 문제를 해소시키기 위해 우리 부부는 애를 많이 썼다. 한 달 보름 동안 양방 치료를 하다가 다시 한 달 보름 동안 한방 치료에 매달렸다.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고, 내일(21일) 서울의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기로 특진 예약을 했다.

아내와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고, 나는 두야리 추동 내 8대조부모님의 효열정문 옆에 차를 놓고, 18일 오후 2시 20분부터 드디어 용신리 근흥초등학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거의 인도가 없는 길이었다. 차량 통행이 참으로 빈번한 길이었고, 커브도 많은 길이었다.

1998년 가을 동학혁명 관련 글을 하나 쓰기 위해, 북접(北接) 동학군 최초 기포지인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에서부터 태안읍 남문리 백화산까지 100여 년 전 동학군의 발자취를 따라 60리 길을 걸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후로 위험한 아스팔트 찻길 옆을 오래 걸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찻길을 걸을 때는 차의 진행 방향으로 걷는 것보다 반대 방향으로 걷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 차량을 등지는 형태보다 마주보는 형태로 걷는 것이 유리하다. 일찍이 생각했던 그 '원칙'을 고수하며 걸었고, 묵주를 줄곧 찻길 쪽의 손에 쥐고 걸었다. 한여름처럼 햇볕이 뜨겁고 무더웠지만, 아직 7월 염천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며 쉬지 않고 걸었다.

중간에 '용오천'이라는 풀 덮인 내를 보며 '용신교'라는 이름의 다리를 지날 때는 잠시 멈춰 서서 사진도 찍었다. 옛날 내 아버지가 학교에 가며 오며 이곳을 지날 때는 더위를 식히기 위해 세수도 하고, 멱도 감고, 때로는 가재나 새우나 송사리를 잡기도 했을 터였다.

두야리와 용신리 사이 안기리를 지날 때는, 옛날에는 장명수 바다 끄트머리였던 간사지 논들을 바라보자니 그 늘펀한 들판 너머로 백화산이 훤히 보이고, 내 사는 진흥아파트의 윗머리도 멀리 또렷이 보였다. 차를 타고 지날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신기하기도 한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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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흥면소재지 초입에서 보게 되는 바다는 찻길에서 지척이라, 내 선친이 소년 시절에 더러 달려가서 멱을 감기도 했을 법하다. ⓒ 지요하

고개는 모두 네 개가 있었다. 지금이야 고개 같지도 않지만(1980년대 도로 포장공사를 할 때 많이 깎아서 거의 평지처럼 되었지만) 옛날 자갈길 시절에는 뜀박질로는 넘기가 어려운 고개였을 터였다.

마지막 고개를 오를 때는 남쪽으로 바로 눈앞에 그림 같은 바다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차를 타고 지날 때는 역시 잘 보이지 않던 풍경이었다. 옛날 내 아버지가 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더러 한달음으로 달려가서 멱을 감기도 했을 지척의 바다였다.

나는 오후 3시 40분에 드디어 근흥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중간에 사진을 찍느라 잠시 지체했던 시간을 5분 정도로 잡으면 1시간 15분이 걸린 셈이었다. 묵주 기도는 다섯 꿰미, 즉 25단을 했다. 시오리도 넘는 길이었다. 나는 비교적 빨리 걷는 편이다. 내 걸음으로 1시간 15분을 걸었다는 사실에 나는 혀를 찼다.

<3>

내 초등학교 동기들 중에는 근흥면 두야리에서 사는 친구들이 여럿이다. 그 친구들은 옛날에 마라송(마라톤)으로 학교를 다녔다. 지금 내가 참여하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 친목회인 '신우회'의 멤버 중에 두야리 친구가 3명이나 된다. 매월 11일 저녁 모임을 가진 후에는 내 차로 그 친구들을 태워다주곤 한다. 그 얘기를 가지고 지난 1월 <초교 동창 친구들로부터 '공로패'를 받다>라는 글을 써서 많은 분들께 재미와 감동을 드린 바 있다.

그렇게 내 초등학생 시절에는 근흥면 두야리 친구들도 태안초교에 다녔다. 두야리에서는 용신리의 근흥초교보다 태안읍 남문리의 태안초교가 훨씬 가깝다. 그렇게 가까운 태안초교를 놓아두고 내 아버지가 두야리에서 근흥초교에 다닌 것을 보면 일본강점기에는 '속지주의' 원칙이 무척 엄격했던 것 같다.

한때 두야리와 안기리 사이에 '방두초등학교'가 있어서 인근 학동들의 발걸음을 어렵지 않게 해주었는데, 농촌 인구 감소로 말미암아 폐교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두야리 일대 학동들은 더욱 편하게, 이제는 학교 버스로 근흥초교를 다닌다. 태안읍과 근흥면의 접경에 위치한 해경(海警)아파트 아이들은 태안초교로 다닌다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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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친이 소년 시절에 3년 동안 다녔던 근흥초등학교 전경. 시오리 길을 달려와서, 대개는 2교시 수업이 끝난 시간에 교문을 들어서곤 하던 순간의 심정도 상상해 보고... ⓒ 지요하

아무튼 근흥면 두야리 추동에서 면소재지 용신리에 있는 근흥보통학교까지, 시오리도 넘는 그 먼 길을 내 아버지는 거의 매일같이 달음박질로 다녔다. 울퉁불퉁한 자갈밭 길에 다가 고개가 네 개나 있는 길을 짚새기 신은 발로 거의 달음박질을 해야 했다.

제 나이에 학교를 들어간 어린 소년이 거의 매일같이 달음박질로 학교에 가야 했던 것은 학교가 멀어서만이 아니었다.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이미 지각은 정해진 일이었고, 단골 지각생 신세였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수업 손실을 줄이기 위해 어린 소년은 매일같이 달음박질을 한 것이었다.

내 아버지는 조실부모했다.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아홉 살에 어머니마저 잃었다. 집에는 앳된 두 형수가 있었다. 엄한 시어머니가 없는 집에서 두 앳된 형수들은 바쁜 농촌 생활에도 매일같이 누가 더 늦게 일어나나 경쟁을 했다.

지금처럼 전기밥솥 꽂아놓고 밥을 해먹는 시절이 아니었다. 해가 동동해서야 방에서 나온 형수들은 우물가에 가서 보리쌀을 닦아다가 아궁이 솥에 안치고 불을 때서 밥을 지었다.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어 겨우 아침을 먹으면, 아버지는 보리밥 누릉지도 한 덩이 얻을 수 있었다. 그것도 책보에 싸서 허리에 두르고 달음박질을 하는데, 학교에 늦지 않으려고 아침을 포기하면 점심까지 거르는 판이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지각을 맡아놓고 하면서도 아버지는 학교를 다닌 3년 동안 한 번도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제 나이에 학교를 들어가서 나이배기들과 함께 공부하는데도 3년 내내 전교 일등을 맡아놓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매일같이 달음박질로 시오리 길을 다니는 것도, 대개는 2교시가 끝났을 때 학교에 도착할 정도로 매일같이 지각을 맡아놓고 하는 것도 3년으로 접어야 했다. 3학년이던 시절에 아버지는 학교 공부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연은 참으로 눈물겹다. 그 사연을 나는 중학생 시절에 처음 알았다. 어려운 살림 탓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움을 한번 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격한 부부싸움이었다. 어머니가 하도 바가지를 긁어대니까 아버지가 홧김에 어머니의 뺨을 한 대 갈겼다. 남편에게 처음 뺨을 맞은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했다.

그때 인근 남면에서 사시는 이모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다. 부부싸움 사실을 아신 이모할머니는 내 어머니를 달래고 위로하시며 이런 말을 했다.

"아무리 어렵구 힘들어두 자네가 참어. 자네 냄편이 어린 시절을 얼마나 어렵게 컸는지 아나? 제대로 공불 혔으면 크게 될 사람인디 공부두 뭇허구…. 자네 냄편 어린 시절 얘기를 들으면 자네두 냄편 불쌍헌 생각에, 어렵구 힘든 거 다 잘 참구 살 겨."

그러더니 이모할머니는 내 아버지가 보통학교 3년으로 학교 공부를 접어야 했던 사연을 코를 풀어가며 들려주었다. 그 얘기를 들은 어머니는 더욱 슬피 흐느끼며 눈물을 바가지로 흘렸고, 그 다음부터는 어렵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아버지에게 바가지를 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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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학교 모습은 물론 오늘과 전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운동장의 그 흙과 모래에는 근 80년 전 내 선친의 발자국도 묻어 있을 듯... ⓒ 지요하

처음에 이 글을 시작할 때는 내 아버지가 보통학교 3년으로 학교 공부를 접어야 했던 눈물겨운 사연 한 토막도 소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글이 너무 길어진 데다가 내 아버지의 소년 시절 사연들은 <한국소설> 금년 7월호에 발표될 예정인 <아버지의 길을 찾아서>라는 단편소설에 담겨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소개를 생략한다.

나는 올해 내 선친의 87회 생신 기념으로 생신 전날인 엊그제 18일, 선친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에서부터 근흥초등학교까지 시오리 길을 내 두 발로 걸어보았다. 1시간 15분이 걸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복 2시간 30분이었다.

단순히 선친께서 소년 시절에 학교를 다니신 길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 매일같이 지각을 하면서도 달음박질로 다닌 그 길을 그마저도 3년으로 접어야 했던 눈물겨운 사연을 내가 잘 아는 탓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선친께서 보통학교를 무난히 졸업하셨다면 내가 그 길을 걸어볼 마음을 갖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나는 그 일을 했다. 숙제 한 가지를 해결한 것 같은 흔쾌한 마음이면서도, 하고 싶었던 공부도 못하고, 한 세상을 가난 속에서 어렵게 살다 가신 선친을 생각하면 더욱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자연 못난 내 불효도 생각되니, 더욱 눈물 겨워 지는 심사다.
#아버지 #생신 #근흥보통학교 #충남 태안군 근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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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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