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19회

등록 2007.06.21 08:50수정 2007.06.2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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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것도 내던지다가 부서진 모양인데 접혀진 자국이 여실한 화선지는 그 안에서 나온 것으로 보였다. 아직 한쪽은 마저 펴지지 않은 상태였고, 그것을 펴는 상만천의 손끝이 미세하지만 떨리고 있었다.

"…!"


용추는 본능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 발견되었음을 알았다. 그 역시 급히 상만천의 곁으로 다가가 화선지의 내용을 살폈다.

쿵----!

갑자기 누군가에게 둔기로 뒷머리를 강타당하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혈서(血書)였다. 피로 이름을 쓴 것이고, 또한 피를 묻혀 그 이름 밑에 장인(掌印)을 찍어놓았다. 글씨체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각기 자신의 이름을 피로 쓰고 직접 장인을 찍은 것이 분명할 것이었다.

이것이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용추가 우려했던, 그리고 아니길 바랐던 바로 그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충격으로 인해 그의 몸이 비틀했지만 그렇다고 이미 의자는 모두 부셔져버려 앉을만한 것도 없었다.

"이것은…."


"목갑 바닥에서 나온 것이야. 이 목갑의 본래 용도가 무언지 아는가?"

부서진 목갑의 잔해를 다시 바닥에 내던지며 상만천이 물었다.


"…?"

용추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상만천을 바라보자 다시 말을 이었다.

"회의 신물이 보관되어 있는 목갑이지. 혈옥(血玉)으로 정교하게 조각해 만든 목단화 세 송이가 들어있는 것이었다네."

"보주가 함곡에게 보낸 목갑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신물(信物)은 철담이 보관하고 있었어. 그래서 철담이 죽고 나서 회의 신물을 찾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찾지 못했다네. 보주가 함곡에게 보냈다는 목갑이 이것이라 하기에 함곡에게 빼돌린 것이라 생각했지. 이것 때문에서라도 함곡의 아내를 우리의 수중에 넣으려 한 것이네."

"이 내용도 회의 신물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용추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화선지 위에 기재된 이름들을 훑었다.

"자네의 예상과 비슷하군. 자네가 만든 생사부에 대해서도 지나치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나는 그 간 자네의 말을 반신반의했다네."

모두 열명이다. 기이한 것은 이름은 아홉 명이었지만 장인은 모두 열 개다.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 자는 누구일까? 모양으로 보아 보통 사람보다 손바닥이 큰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용추가 가운데에 있는 이름을 가리켰다.

"이 자는 대인께 충성을 맹서한 자가 아닙니까?"

상만천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면서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이 자가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면 이 혈서는 이 자부터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네. 이자의 보고에는 혈서를 썼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네. 만약 다른 자들의 이름을 알았다면 보고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이 자의 이름은 중간에 적혀 있습니다. 아무래도 완전히 믿기엔…."

"물론이지. 나는 자네 말고 다른 이들을 완전히 믿은 적이 없어. 이 혈서는 순서대로 왼쪽부터 기재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네. 주의는 하되 무조건 이 자를 내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야."

상만천의 말은 옳았다. 그 자는 매우 중요한 정보원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상만천이나 자신에게 실망을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문제였다. 지금까지는 이 자의 보고를 거의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주의를 한다고 함은 이미 이 자의 말을 모두 믿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정보에 확실성이 흔들려 판단에 혼란이 오게 된다.

"일단 자네 방으로 가세. 이곳에는 앉을 데도 없군."

자신이 모두 때려 부수고 나서 하는 말이라니…. 하지만 때려 부숨으로서 둘도 없는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이래서 하늘은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 방을 치우라 하거라."

상만천은 옆에 서있는 두 딸에게 지시하고는 먼저 용추의 방을 향했다.

-------------

설중행은 일행과 떨어져 매송헌으로 향했다. 그는 동행하려는 일행들을 만류했다. 일행은 분명 설중행의 움직임에 사건과 관련이 있으리란 생각이었지만 그의 완강한 태도에 일단 지켜보자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끝났나?"

백도는 여전히 상청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왜 연무각에서 열린 숭무지례에 참석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제자들에게 모두 연락한 장문위가 그를 빼놓았을 리는 없었다.

"결과가 궁금하시오?"

묻는 백도나 대답하는 설중행이나 오랫동안 서로 만나왔던 사람들처럼 대화가 이어졌다. 서먹하게 왜 찾아왔냐고 묻지 않았고, 들어온 설중행도 거리낌 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뻔한 것 아닌가? 광나한이 자결했나?"

그 물음에 설중행은 백도가 앉아있는 탁자 곁으로 다가가다가 흠칫했다. 어떻게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분명 백도는 한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누군가 먼저 다녀가면서 가르쳐 준 것일까?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분명 숭무지례가 파하자마자 이곳에 들른 것이다.

"앉아. 놀랄 일이 아니니까."

설중행이 맞은편에 다가와 의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 백도가 턱짓을 하며 말했다. 설중행이 엉거주춤 의자에 앉았다.

"광나한은 자존심이 무척 강한 인물이지. 산문을 나서기는 했지만 소림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어. 더구나 각원선사와 지광까지 참석한 자리이고, 다른 문파의 인물들이 있는 자리에서 패했다면 살아갈 이유가 사라졌을 것이니 자결하는 것이 광나한 다운 태도였겠지."

아주 단순한 논리였다. 하지만 광나한의 자결을 그 이상 설명할 다른 요인은 없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더 지체된 것 같군. 다른 일이 있었나?"

백도는 말이 별로 없는 사내다. 하지만 본래 차가운 말투야 그리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백도는 마치 동생을 대하듯 말하고 있었다. 설중행이 약간은 감탄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 아주 흥미로운 일이 있었소."

"호오?"

백도가 호기심을 보이며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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