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숙적이었는가

패권자에게 라이벌이 주는 의미 -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등록 2007.06.25 10:58수정 2007.06.25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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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행 특급 열차

나의 시선은 빠르게 주위를 돌아본다. 기차가 지나가는 순간 창 밖 풍경은 매우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집중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시대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유럽의 가장 강대했던 제국 로마를 잠시 맴돈다. 이윽고 시선은 로마가 아닌 로마의 혼돈을 초래한 사나이에게로 강하한다.


최소한 한니발에게 애국심은 정당하게 전쟁을 치를 수 있게 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1차 포에니 전쟁 당시 카르타고의 패배 앞에서 그의 아버지 또는 그 아버지 세대가 겪었을 굴욕을 그는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자아실현이란 단계의 목표는 언제나 마지막에 찾아오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성공을 통해 타고난 지위와 부를 누리며 부러움 없이 살아왔다. 그러나 재능 있는 자는 기회가 있는 한 그 재능을 썩히지 못하는 법이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인생의 마지막 단계는 비교적 빨리 찾아왔다.

그러나 한니발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에게 인생 목표는 오직 하나였으며 그가 아직 젊다는 것은 주어진 시간이 많음을 의미했다.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었다. 목표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만이 일을 서두르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탈리아 반도의 강국이자 조국 카르타고를 굴복시켰던 나라, 바로 로마를 정복하는 것이다. 훗날 이 나라가 지나치게 위대한 제국이 될 것임을 한니발은 내다 본 것일까? 최소한 그의 인생에 더 이상의 상대는 없었다.

완전 범죄를 꿈꾸다

한니발은 로마에게 완전한 패배를 주기로 결심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로마는 그 힘을 과시하여 싸움의 원인을 제공해야 하고 그로 인한 싸움에서 철저한 패배를 맛보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알 리 없는 로마는 한니발의 도발에 넘어가 선전 포고를 하게 되고 한니발로 하여금 전쟁의 정당성을 가지게 했다.


누구든지 로마를 상대로 싸우려면 그 동맹국들을 상대로 싸울 각오를 해야 했다. 고대의 방식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로마는 발전된 대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유명한 '팍스 로마나(로마 주도하의 평화)'의 기본이 될 이 대외 정책은 속주의 경제 협력 및 동맹국의 군사 협력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속주와 동맹국은 로마 아래에서 군사적인 안전을 보장 받고 로마의 사회 간접 자본 지원을 받게 된다. 훗날 로마가 커지면서 속주 시민이 오히려 동맹국 시민보다 더 이득을 받게 되지만 그로 인한 분쟁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한니발은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 동맹국들의 끊임없는 후원 아래 카르타고가 어떻게 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토록 튼튼한 관계를 지닌 동맹국들이 로마에게서 등을 돌리게 할 계획이었다.


지나친 고요함은 폭풍우를 부른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한니발은 잠적해 버린다. 물론 잠적이란 것은 한니발의 관점에서 본 것도 아니요 제3자인 우리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 것도 아니다. 그는 로마들인의 눈에서 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한니발은 그의 본거지인 에스파냐를 방어할 병력만을 남겨둔 채 나머지 군대를 모두 이끌고 로마인의 눈을 피해 이탈리아 북쪽 갈리아 땅으로 진격했다.

전통적으로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투 방식인 바다에서의 싸움을 그는 피한 것이다. 한니발은 로마인들이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싸울 것을 결심한다. 그는 큰 도박을 할 생각이었고 좋던 싫던 간에 로마는 한니발이 던진 주사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는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니발이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이야기는 너무 유명해서 크게 새로울 것도 없다. 이탈리아는 아래쪽으로 3면이 바다이며 위쪽으로는 프랑스와 알프스 산맥을 사이에 두고 있어 따로 국경선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당시 로마의 허는 알프스라는 천연의 방벽을 너무 믿고 있었던 것인 듯하다. 이 사건이 알프스의 높은 콧대를 꺾었던 것일까? 이 후로부터 알프스는 여러 시대에 걸쳐 도담(渡痰)을 허용하게 된다.

산채로 로마의 뱃속에 들어가다

로마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한니발의 활약을 보면 마치 강철 같은 피부를 가진 괴물의 뱃속으로 들어가 내부 기관을 마구 공격해 쓰러뜨리는 만화 같은 설정이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는 말했던가? 그것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변치 않는 이론인 것 같다. 그리고 한니발은 이 속담을 몸소 실천해 보인다.

로마연합을 해체하라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오면서 힘으로 굴복시킨 갈리아의 여러 부족들은 한니발군에 가담한다. 그들은 한니발에게서 지배자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겠지… 한니발은 이후 지형과 날씨 등 이용할 수 있는 것은 가리지 않고 이용하며 상대인 로마군의 심리를 역이용한다. 길을 통해 가지 않고 갖가지 기형적인 이동과 급습으로 적을 궤멸시켰다.

이탈리아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처음 전투에서 로마의 최고 지도자인 집정관 코르넬리우스와 셈프로니우스가 이끄는 군대를 상대로 완벽에 가까운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는 마치 로마를 휘젓는 것과 같이 계속 이동하며 속주 및 로마의 동맹국들을 침략했다. 그리고 수도 로마에는 진군도 하지 않은 채 비웃듯이 그들을 조롱했다.

"보아라 너희들이 믿는 로마는 너희들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자유와 독립과 안정을 주겠다."

힘이 약한 나라를 패권국으로 인정해 주는 경우는 없다. 그 동안의 우호적인 관계에 기대하려 해도 전투에서 진 로마군이 한니발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는 없었다. 생각보다 그 속도는 느렸지만 로마 동맹국들의 결속은 한니발의 생각처럼 조금씩 느슨해져 갔다.

그러나 실패하다

이후 로마의 대 제국이 증명하듯 한니발은 실패했다. 무엇이 로마를 살아남게 했는가? 또는 무엇이 위대한 한니발을 패하게 했을까?

한니발은 로마를 그리고 로마인을 얕보았던 것 같다. 시민 의식이 발달한 나라는 힘의 정치에 쉽게 좌우되지 않는다. 그 동안의 로마와 그 동맹국들 간의 관계는 단기적인 힘의 우위 만으로는 끊어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창조하고 한니발 자신이 부활시킨 기병의 기동성과 보병의 방어력을 유기적으로 조합시킨 용병술을 로마도 답습할 것임을 예상했어야 했다. 이러한 용병술은 이후 로마군의 일반적인 전술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니발은 우수한 부하를 두지 못했다. 아니 우수한 부하를 기르지 못했음을 탓해야 할까? 이 전쟁에서 한니발은 이미 일개 장군의 위치는 아니었다. 그는 적진을 교란 시키고 혼란을 주는 데는 성공했지만 점령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특히 본국에서 군수품을 제공받을 수 없는 입장이라면 점령지 없이 많은 군대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넓은 지역의 점령지를 방어하기 위해선 그를 대신할 수 있는 믿을 만한 부하 장군이 필요했다.

이 모든 것들이 전쟁을 교착 상태로 빠뜨려 20년간의 긴 대치 상태를 가져왔고 결국 원정군인 한니발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칸나이에서의 기적같은 대 승리도, 후에 아프리카를 지배한 자라는 존칭을 받게 되는 숙적 스키피오의 출현도, 또 그에게 참패한 자마에서의 회전도 모두 승부를 결정하는 요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숙적이었는가?

승부가 있는 곳엔 항상 숙적 또는 라이벌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존재한다. 대개의 경우 숙적은 쌍으로 생겨나는 것이 신기할 정도인데 이는 당대 또는 후대의 호사가들이 그런 식의 대립 구도로 이야기를 꾸미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훗날 로마의 제정 시대를 열고 가장 유명한 사나이가 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의 라이벌이자 마그누스의 칭호를 받은 위대한 폼페이우스 또한 그런 대립 구도의 이야기를 만들게 된다.

그렇다면 한니발의 숙적은 스키피오였는가? 확실히 훗날 대 스키피오 아프라카누스라고 불리게 될 사나이는 뛰어난 장군이었다. 후일 로마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스키피오를 보내는 식의 웃기는 이야기가 벌어지는 건 그의 능력이 대단함을 보여준다. 비록 상승세의 로마군에 대항해서 하락세의 카르타고군을 이끌긴 했지만 북아프리카의 자마에서 한니발은 스키피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된다.

그러나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의 말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투 방식을 답습한 제자라고 하는 것이 옳은 듯하다. 후일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개인적인 사담에서조차 한니발은 자신의 숙적 자리에 스키피오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따라서 자마에서의 전투는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은 일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그 시대의 로마인들에겐 악몽과도 같았던 카르타고의 한니발… 그의 숙적은 그를 그토록 무서워했던 로마인들에게 뿌리내려 있는 사회성이라고 생각된다. 로마인들이 흉폭한 야만인이라고 부르던 갈리아인, 그리고 그 갈리아인들조차 야만인이라고 생각하며 무서워했던 게르만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당시의 가장 사회적 인간이었던 로마인의 적수는 아니었다.

시간을 이동하다

이제 한니발에게서 눈을 떼고 다시 로마의 전체를 바라본다. 위에서 내려다 본 로마는 하나씩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들어진 느낌이다. 그만큼 튼튼하며 시간이 많이 걸리어 완성된 나라이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았다> 이것은 로마인 이야기 1권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니발이라는 외부인이 침략한 곳에 벽 한곳이 크게 뚫리어 있지만 로마의 벽은 워낙 두껍고 튼튼해서인지 구멍 한 두개로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구멍을 보강하기 위해 다른 벽을 만들고 기둥을 더 넣었을 지도 모른다.

한니발 전쟁 이후 로마에선 평민을 위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원로원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하게 되고, 술라의 독재정치와 원로원 주도의 과두정 정치가 주도하던 시대를 지나,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벌과 폼페이우스와의 대결 후 승리자 카이사르에 의한 로마의 제정 시대로의 전환 후 암살된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로 등극하게 된다.

시간을 거칠수록 로마는 강대해 지고 그들의 영토는 넓어져 갔다. 그러나 한니발이 침략한지 600년 후에 로마는 너무 강해져서 단련하기를 포기해 버린 자신의 나약함으로 인해 침몰하게 된다. 자신의 손이 아닌 게르만 족에게 자신의 방어를 맡겨버린 로마는 476년에 게르만족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당했다. 라이벌이 없어진 로마가 자신을 단련하기란 무리였던 것 일까? 그러나 로마는 멸망한 후에도, 라틴계 뿐만 아니라 켈트(갈리아), 게르만, 슬라브 등 유럽의 거의 모든 인종에 걸쳐 로마의 문화는 계속 이어져 오늘날 유럽 문화의 기반이 된다.

한니발이 무너뜨리지 못한 로마의 뛰어난 사회와 문화… 그리고 로마인들이 이 후로는 갖지 못했던 그들의 위대한 숙적에 관한 이야기는 근대 문명의 주류를 이루는 서구 유럽 역사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5


#로마 #시오노 나나미 #한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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