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보름 넘게 정치권에서 논란이 됐던 이른바 '경부운하보고서 파문'의 진상이 경찰 수사를 통해 대략 그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갈수록 의문이 커지는 대목이 있다. 청와대나 이용섭 건설교통부 장관은 어떻게 해서 6월 18일 국회 답변 때까지도 논란이 된 '37쪽 보고서'에 대해 "알 수 없는 문건"이라고 부인했던 것일까?
물론 그는 이틀 뒤인 20일 "'37쪽 보고서' 또한 '청와대에 보고된 9쪽 짜리 보고서'와 조금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테스크 포스 팀에서 논의된 것과 같은 것"이라면서 사실상 이 보고서가 수자원공사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용섭 장관은 "정부의 공식 보고서와 글씨 모양, 용어 등이 다르다"며 누가 작성했고 어떻게 유출됐는지에 대해서는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그 결과 이 37쪽 짜리 보고서는 바로 청와대에 보고한 '9쪽 짜리 보고서'를 만든 그 수자원공사 테스크포스팀에서 만든 것임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청와대나 이용섭 장관은 왜 이런 사실을 여태껏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청와대나 이장관은 왜 '중간보고서' 다음에 '최종(결과)보고서'가 나왔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청와대나 이용섭 장관의 '판단력'에 큰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37쪽 짜리 '결과보고' 내용이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를 통해 보도된 것은 이미 한참 전인 6월 4일경이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의 박미숙 기자는 6월 4일 발매된 <이코노미스트> '이명박 경부운하 정부 조사보고서 단독입수'(정부 3개 기관 TF팀이 조사/'경제·환경 측면에서 타당성 없다' 결론…의도와 결과 놓고 논란 클 듯) 기사에서 논란이 된 이른바 '37쪽 보고서'의 내용과 그 구성, 포맷을 자세히 소개했다. 또 이 보고서의 존재를 통해 정부기관이 "야당 대선주자의 공약을 자세히 조사한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그 의도와 결과를 놓고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이코노미스트>가 '37쪽 짜리 보고서'를 보도했을 때에는 이 보고서의 존재가 벌써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을 때다. 5월 31일 한나라당 박근혜 전대표의 핵심 측근인 이혜훈·유승민 의원은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기관의 경부조사 타당성 조사설과 고의 은폐설을 제기했다. 이틀 전 광주에서 열린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정부기관의 타당성 조사설이 제기된 뒤였다.
청와대와 이용섭 건설교통부 장관이 9쪽 짜리 '중간보고서'를 제출 받은 것은 지난 5월 초. 당연히 이 시점에서는 수자원공사의 경부운하 타당성 조사 사실은 물론 37쪽 짜리 보고서 내용이 9쪽 짜리 '중간보고서'와 흡사하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언론에 보도된 '37쪽 짜리 보고서'가 '최종보고서'일 수 있다는 가정도 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 주자 위에 국민이 있다. 정부가 대선 주자들의 주요 공약사항에 대해 검증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관련 자료를 국회에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이용섭 건설교통부 장관은 대통령의 지침에 따라 지난 18일 국회 본회의에서 경부운하 타당성 검토 보고서의 존재를 밝히면서 "내가 본 것은 9쪽 짜리 보고서"라면서 "37쪽 짜리는 본 적도 없다"고 답변했다. 그런 다음에 위변조 의혹이 커지자 이틀 뒤인 20일 "누가 유출했는지 모르겠다"며 경찰에 조사를 의뢰했다.
돌이켜보면 5월말 한나라당에서 '경부운하 타당성 조사설'이 나왔을 때는 물론, <이코노미스트>가 '37쪽 짜리 보고서'를 보도했을 때라도 청와대나 이용섭 장관이 그 사실 여부를 정확하게 조사해 발표했더라면 적어도 지난 보름동안의 소모적인 논란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두워서였을까, 아니면 불감청 고소원이라고 정치권의 논란을 즐겼던 것일까?
그 어느 쪽이든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하다. 야당 대선후보의 공약에 대한 정부 기관의 타당성 조사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자. 다만 산하기관에서 작성한 보고서의 존재와 그 유출 사실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한 달여 가까이를 정치권과 국민을 소모적인 정쟁의 회오리에 휩쓸리게 한 그 '정치적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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