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사 전시관의 한국 여성운동 100년사김홍주선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역사 교과서에서 만난 여성 인물은 모두 몇 명이나 될까? 기억을 되살려 보기 위해 거리로 나가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14살에서 24살까지의 남녀 50명에게 물어보니 신사임당, 유관순부터 꼽기 시작한 이들은 대부분 3~4명에서 숫자 세기를 멈췄다(아래 상자기사 참조).
"어, 생각보다 없는데요."
역사 교과서에 '여성 인물'이 드문 이유는 도대체 뭘까?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성이 드물어서? '교육기회와 사회참여 등 공적 영역에서 차별이 심하여 여성의 활동 기회가 드물었다'는 응답이 27명으로 가장 많았지만, "그렇다(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이 드물었다)"는 대답도 5명 있었다.
돈을 쓰는 인구의 반이 여성인데도 새 지폐 한 장에 여성 인물 넣기가 힘이 드는 세상에서, 여성 인물을 많이 안다는 게 어쩌면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1999년 서울대 서양사학과에서 학부생을 대상으로 '여성사'를 개설, 강의했던 이남희(현재 여성가족부 장하진 장관 보좌관)씨는 같은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자리에 여성들이 많이 진출하지 못했던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드물게나마 진출했던 여성들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폄하되고, 잊혀진 경우가 많습니다. 성리학자 임윤지당이나 빙허각 이씨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시인인 고정희도 꼽을 수 있겠네요."
사람들은 여성사 학습을 통해 적절한 역할 모델이 될 만한 여성 인물을 찾을 수도 있고, 현재의 여성들의 모습을 돌아볼 수도 있다. 과거의 여성들이 했던 활동들을 통해서 현재의 여성운동이나 앞으로의 활동에 참고할 만한 교훈을 얻기도 한다. 어떤 집단이든 간에 '역사'가 필요하다는 건 아주 상식적인 문제다.
다행히도 20세기 후반 진행된 역사의 민주화는, 여성사를 잊지 않게 했다. 역사 자체에 대한 반성은 민중의 역사, 여성의 역사, 다양한 역사 주체들을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시키는 흐름을 만들었다.
'전쟁'과 '정복'이 다가 아니라, 결혼과 출산 등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역사의 중요한 주제로 들어섰다.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 학계에 꾸준히 개설되기 시작한 여성사 강의는 한국사, 서양사, 국문학사 등 다양한 범주를 넘나들고 있다.
학계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최근 3~4년 사이 여성인물을 발굴해 지역 여성사를 쓰는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김해의 수로왕비를 기리는 축제에서는 여성들이 상호 유대감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여성 비율이 높은 지역 문화해설사는 지역에 살았던 여성의 삶을 생동감 있게 전하고 있다.
한 예로 이남희씨는 강릉에서 만난 한 작품해설사를 꼽는다. 그 작품해설사는 허난설헌을 설명하면서도, '남편에게 버림받고 요절한 슬픈 존재'라는 고정관념을 넘어서 '도교에 심취했으며 활달하고 욕망이 잘 드러나는 시를 썼다'고 새롭게 해석해 냈던 것.
80년대 중반부터 여성사가 활발하게 논의됐던 미국에서는 매년 3월을 '여성사의 달'(Women's history month. '흑인사의 달'인 Black's history month도 있다)로 지정해 교육자료를 만들어 배포한다. 중등 교과 과정의 역사 연대기에 여성인물을 발굴해 명시하기도 하였다.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를 아시나요
▲서울 대방역 근처 여성사 전시관. 베틀과 손수건. 여성인물들김홍주선
6월 25일부터 12월 13일까지 열리는 서울 대방동 여성사 전시관의 기획전 '선-녀 전(傳)' 역시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승으로서는 고려 최초로 대사 칭호를 받은 진혜대사, 문인 허난설헌, 굶주린 백성에게 베풀며 살았던 제주 거상 김만덕, 가사노동에 필요한 설비들을 새롭게 발명해냈던 실학자 빙허각 이씨와,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까지 낯선 이름의 '여성 위인'들이 전시를 통해 친근하게 다가온다.
기존 역사에서 여성 인물을 발굴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서양식 근대 교육을 받기 이전의 여성들은 공식적인 사료에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다. 찾아낸다 해도 왜곡 해석된 경우가 많다. 자아를 찾으려 했던 신여성들은 "사치스럽고, 서구의 더러운 문화를 흡수한 여성들"이라는 비난에 직면했던 경우도 있다. '여성사'를 발굴하고 새롭게 써나가는 작업은 때로 기존의 '역사방법론'을 뒤집지 않으면 안 된다. 전은정 여성사 전시관 학예실장이 이렇게 설명한다.
"빙허각 이씨의 경우 실학자 집안 형제들이 이씨의 글을 묶어 책으로 내준 경우입니다. 남성 실학자들이 문집을 만드는데 반해 여성 실학자들에게는 그러한 권력이 주어지지 않았어요. 이씨의 책은 실생활에 관련된 정보라 다른 여성들이 베껴 적어서 다행히도 필사본 형태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밖에 여성사 전시관 상설전에서는 그간 폄하되어온 여성의 가사노동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오랜 세월 가정의 경제생활에 주요한 역할을 해왔던 베틀, 6·25전쟁 당시 여성들이 미군에게 만들어 팔았던 손수건이 그 예다. 물론 성별분업의 벽을 깨뜨리려는 노력도 함께 담았다. 여성운동 100년사와 여성 최초 직업인들의 사진을 직종별로 모아놓은 초상화 모음, 여성위인상들도 있다.
"뭐가 좋은 역사의식이냐. 대의를 위한 역사나, 전쟁영웅만이 가치가 있느냐. 밥하고 빨래하는 일상사는 가치가 없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는 거죠. '역사'가 아니라 '역사들'이 있습니다. 역사 자체도 언어적 구성물이며 누구의 입장이 반영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여성사 전시관에서는 초중등과정 학생과 성인 대상 교육 프로그램,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직무연수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특강 형식으로 진행되었던 기존 여성사 기획강좌에는 중등 교육과정 교사들이 학생들과 특별활동 형태로 참가했다. 한 할머니의 "이름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아무도 나를 찾아 주지 않는다. 나를 찾아달라"는 가상 요청에 학생들이 탐정이 되어 여성사 전시관 내에서 역사를 발굴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현재진행형 여성운동사
▲액션 박람회 전시물들김홍주선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다. 여성사도 마찬가지다. 가장 최근 내가 참여한 작은 행사가 여성의 역사가 된다면 어떨까. 6월 21일부터 25일까지 홍대 갤러리 헛에서 열린 여성주의 액션 박람회는 1995년부터 현재까지의 여성운동사를 모아 전시했다. '여성운동'하면 떠올리는 호주제 폐지나 성폭력 특별법 제정 등 굵직굵직한 법제 이슈와는 거리를 뒀다. 액션 박람회가 집중한 것은 대학가와 작은 단체 위주로 펼쳐진 일상의 여성운동이었다.
10명 남짓 기획단이 모은 1300여개의 팸플릿, 배지, 포스터, 사진, 티셔츠 등의 자료가 전시됐다. 제주대학 총여학생회부터 여성영화제의 탄생, 교수 성폭력 사건 투쟁 자료부터 대학가 최초의 페미니즘 문화제에 이르기까지 1995년 이후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움직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995년은 여성 운동 내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난 시기다. 성정치 문화제 등 이전과 달리 문화적으로 여성 이슈를 풀어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다양성, 소수자, 성정치 등 성을 중요시하는 흐름이 전면에 대두되었다.
그런 점에서 액션박람회 기획위원장 나비야(별칭· 24)가 설명은 경청할만 하다.
"여성주의가 언제나 내 옆에 있다는 것. 즐거울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여성사'라는 (연대기적) 역사가 '나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겁니다. 내가 지나가다 한번 시위 행렬에서 소리 한 번 질렀고, 배지 한 번 달아봤고 했던 것들이 여성운동의 역사로 남는다는 거죠."
이성애 중심사회, 운동 사회 성폭력 등에도 문제 제기한 여성주의 액션은 때로 벽에 부딪혀 흐름이 끊기다가도 '느슨한 네트워크'를 타고 이어지고 있다.
사회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단체 내 가부장 질서(컵 설거지는 언제나 여성 활동가의 몫이었다)에 문제 제기한 '컵깨기 행사(1999년)'를 통해 처음 여성 운동에 참여했다는 기획단 깡뚜껑(별칭)이 '100'이라는 숫자 앞에 멈춰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건 노조 간부 성폭력에 문제 제기했던 100인위를 재현한 거예요. 모두가 외면했고 100인위는 고립됐었죠. 등을 돌린 액자들은 그 상황을 재현한 겁니다. 박람회 기간동안 사진 찍은 관람객들이 자신의 사진을 끼워넣어 액자를 다시 돌려놓으면 100인위는 이제, 늦게나마 혼자가 아니게 되겠죠."
대회를 주최하는 언니네트워크는 액션 박람회가 여성주의 운동의 흐름을 모아서 보관할 수 있는 아카이브(정보창고)를 꿈꾸고 있다.
▲액션 박람회 기획단김홍주선
| | 역사 교과서에는 왜 여성이 없을까? | | | [미니설문] 대한민국 젊은 남녀 50명에게 물었다 | | | | 지난 주말(23일), 제도교육의 교과과정을 밟고 있거나 밟았던 시민 50명(14세에서 24세까지. 남 17명 여 33명, 서울시 거주자)에게 물었다. 설문조사는 서울 시내 쇼핑몰, 대형 서점, 공원, 교회 등의 장소에서 무작위로 이루어졌으며 객관식 문항이 나온 설문지를 통해 실시했다.
"역사 교과서에 등장한 여성인물이나 여성 관련 사건을 몇 명, 몇 건 꼽을 수 있으신가요?"란 질문에 '3~4명'과 '3~4건'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각각 16명(남 8, 여 8), 20명(남 6, 여 14)으로 가장 많았다. '아는 인물이 없다'는 대답은 5명(남2 여 3), '아는 사건이 없다'는 대답은 7명(남 2 여 5) 있었다. '1~2명', '1~2건'과 '5~10명', '5~10건' 응답이 비슷한 수준이었으면 '10명 이상', '10건 이상'이라고 대답한 인원은 거의 없었다.
역사에서 여성의 참여 비율이 높지 않다면 그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교육기회와 사회참여 등 공적 영역에서 차별이 심하여 여성의 활동 기회가 드물었다'는 대답이 27명(남 9, 여 18)으로 가장 많았다. '여성의 활동이 있었음에도 사가(史家)의 성 편중으로 인해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았다'는 대답이 8명(남 2, 여 6), '전쟁과 정복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여성의 전통적 역할(양육, 가사 노동 등)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대답이 7명(남 3, 여 4)으로 그 뒤를 이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여성이 드물었다'는 대답도 5명(남 2, 여 3) 있었다.
초중등 교과 과정에서 역사 수업을 받은 후 역사와 여성에 대한 인식에 어떤 영향이 미쳤느냐는 질문에는 '역사적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으며, 여성이 오랜 세월 동안 배제되어 왔음을 알았다'는 대답이 32명(남 10, 여 22)으로 가장 많았다. '여성들의 역사의식이 부족했으며, 앞으로 남성들의 비율만큼 참여하려면 여성들의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라는 대답이 10명(남 4, 여 6) 있었다. '역사 교과서의 성(性) 편중을 깨닫고 역사 교과서 저술 과정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는 대답은 5명(남 1, 여 4)에 그쳤다.
역사 교과서에 '여성사'를 포함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연대기별 여성인물(왕비, 황녀, 경제 활동을 했던 직업여성 등 중요 인물)을 발굴해 함께 기록한다'는 대답이 20명(남 9 여 11), '근대 이후 집중적으로 활성화되었던 여성인권운동사를 중요하게 소개한다'는 대답이 19명(남 6, 여 13)으로 엇비슷했다. 두 가지를 통합해야 한다는 대답이 2명(여 2) 있었다. '수업 환경에서 성평등 인식을 높일 수 있도록, 성인지, 성평등 교육을 교과 전반에 걸쳐 도입한다'는 대답이 7명(남 1 여 6), '여기에 교사 대상 성인지, 성평등 교육을 포함시킨다'는 대답이 1명(여 1) 있었다.
적은 인원이기 때문에 표본으로서 대표성을 가지긴 어렵지만, 기사 작성에 앞서 학생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김홍주선 | | | | |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기획취재기자단 기사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