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울림이 만들어내는 행복한 순간

[시집 속, 이 한 편의 시2] 신대철 시집 <바이칼 키스>

등록 2007.06.28 12:12수정 2007.06.28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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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신대철 시집 <바이칼 키스>

신대철 시집 <바이칼 키스> ⓒ 문학과 지성사

시는 말의 울림을 통해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시인의 손을 통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도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말과 말들이 만나 만들어내는 새로운 형상이 바로 시의 이미지다. 그 이미지는 그래서 전혀 낯선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우리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신대철의 <바이칼 키스>(문학과 지성사)는 시인의 말이 얼마나 새로운 것이면서, 또 우리 마음속에 어떻게 울림을 불러일으키는가를 실감할 수 있는 시집이다.


어느 이른 아침 소년을 따라 물 길으러 갔다. 구름 분지에 깊은 샘이 있었다. 소년이 깡통으로 물을 푸는 사이 짐승들이 흰 구름 밑에 와 있었다. 소년은 물을 퍼 올리는 대로 돌바닥에 쏟아 붓고 쏟아 부었다. 햇빛을 쏟아 부은 것처럼 물거울이 눈부셨다. 열풍 속에 빈 물통으로 돌아왔다.

오후에 다시 물 길으러 갔다. 짐승들이 좀더 가까이 와 있었다. 소년은 또 물을 퍼 올리는 대로 쏟아 붓고 쏟아 부었다. 돌바닥이 흥건해지면서 흙바람도 잠잠해졌다. 샘 밑바닥에 맑은 물이 비치고 소년의 얼굴이 반짝였다. 소년은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물통을 찰랑찰랑 채웠다.

제 또래와 한 번도 어울려본 적이 없는 소년은 겔에 돌아오자 팔짱을 끼고 둔덕에 앉았다. 그 옆에 나란히 앉으면서 아까 누구한테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어보았다. 소년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짐승들한테요. 물이 움트면 또 온다고요.' - '황야에서 2' 모두


이 시에는 두 명의 인간이 등장한다. 소년과 그 소년을 지켜보는 '나'다. 그런데 '나'는 결코 '나'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년에게 묻는 말로 존재할 뿐이다. 그 물음에도 '나'라는 인칭은 사용되지 않는다. 어법적으로 '(나는) 그 옆에 나란히 앉으면서 아까 누구한테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어보았다'고 해야 확실하겠지만, 시인은 일부러 '나'를 생략해 버린다.


왜 시인은 시인 자신으로 보이는 '나'를 생략해 버렸을까? 그것은 소년이 곧 나임을, 굳이 그 둘을 구분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소년은 '제 또래와 한 번도 어울려본 적이 없는' 원시적 상태에 있는 존재다. 그 소년의 또 다른 모습인 '나'는 원시적 상태에 대한 지향을 지닌 존재다. 그러니 이 시는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의 만남을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존재는 짐승이다. 이 짐승들은 소년이 물을 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처음에는 '흰 구름 밑'에 있다가 점점 더 소년 가까이에 오게 된다. 가까운 것은 소년과 짐승이 동일시되는 과정이다. 그 결말은, 소년이 짐승들에게 중얼거리는 말로 마무리된다. 소년의 말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며, 동시에 '나'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의 동일시는 나와 소년과 짐승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길어 올린 물이 그렇고, 햇빛 같은 물거울이 그렇다. 소년의 주변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실은 하나로 연결된다. 그 하나는 바로 '나'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원시적인 '나'인 소년의 시절이다.

소년의 물 긷는 행위는 그 원시적 상태에 대한 상징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행위의 이유에 대한 답이 이 시에 접근하는 열쇠가 된다. 마지막 소년의 말이 그것이다.

"짐들들한테요, 물이 움트면 또 온다고요."

물이 움튼다는 말은 물이라는 무생물에 식물성 동작을 부여하면서, 독자에게 한없는 울림을 전해준다. 물이 새싹처럼 움트는 때, 그 때가 바로 시인이 지향하는 행복한 화해의 시간일 것이다.

신대철의 시에는 도처에 말과 말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화음이 담겨있다. 이 시 역시 그런 이미지들을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햇빛과 물거울의 울림, 짐승과 흰 구름의 울림,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과 '움트다'는 말의 울림이 그렇다. 시인이 만들어내는 언어의 울림이 시 전체에서 종횡으로 교직되면서, 독자는 시인이 지향하는 '행복한 순간'을 자신의 마음속에 '울림'으로 담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을 길어 붓는 일이 반복되면서, 돌바닥이 흥건해지고, 그 결과 흙바람도 잔잔해지는 행복한 순간, 그 그리운 원시적 상황을 찾아 신대철의 시를 읽는 일은 아름답다.

문학청년 시절, 나는 그의 첫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를 읽으며 말에 대한 공부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시의 언어는 울림의 언어라는 것을 그의 시는 보여주고 있었다. 오래도록 침묵하던 그가 2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를 냈을 때, 나는 첫 시집의 그리움을, 아니 내 문학청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찾아 그의 시들을 읽었다. 그의 시들은 대개 인간에게서 받은 상처와 그의 치유처로써의 자연을 보여주고 있었다.

네 번째 시집인 <바이칼 키스>에서 그는 마침내 오랜 탐색과 갈등의 자리를 넘어 자연과 행복하게 하나 되는 세계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노래한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을 벗어나 얻어낸 것이 아니다. 자신과 맞닥뜨린 현실에 대한 치열한 맞섬 속에서 그가 이룩해 낸 조화로운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시집 <바이칼 키스>를 읽는 것은 넉넉하고, 즐거우며, 그립고, 외롭다.

자꾸 곱씹어 읽어야 할 울림의 언어를 찾아, 시인이 펼쳐 보이는 몽골 사막과 바이칼, 백두산이나 곰배령을 향해 떠나는 설렘이 이 시집에는 오롯이 담겨 있다.

바이칼 키스

신대철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7


#신대철 #바이칼 키스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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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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