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조상보다 산 사람이 더 우선이지

몰아서 한 번에 지내는 제사, 그렇지만 정성만은 가득입니다

등록 2007.07.02 13:58수정 2007.07.02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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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한번에 몰아서 제사를 지내다보니 제기가 모자랍니다. 하지만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냅니다.

한번에 몰아서 제사를 지내다보니 제기가 모자랍니다. 하지만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냅니다. ⓒ 이승숙

주부가 없는 집에 제사는 많고...


제삿날은 아시다시피 후손들이 모여서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날입니다.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지내는 종방간 형제들이 그날은 모여서 한가족임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삼월초파일은 제 친정 증조부님의 제삿날입니다. 결혼한 후로 친정 일에는 별로 참여를 하지 않았던 저는 친정의 제사 역시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해 봄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멀고 먼 경북 청도의 제 친정에 다녀왔습니다.

우리 친정은 일 년에 제사가 다섯 번 있습니다. 증조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돌아가신 우리 엄마까지 해서 다섯 번의 제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사는 일 년에 한 번밖에 안 지냅니다. 증조 할아버지의 기일에 다른 분들의 제사를 함께 지내는 겁니다.

우리 엄마는 환갑도 안 돼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제 위의 언니와 저는 출가를 해서 가정을 이루고 있었지만 제 밑으로 둘 있는 남동생들은 결혼 전이었습니다. 큰동생은 군대에 가 있었고 막내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그 해에 주변 분들의 주선으로 새엄마가 들어왔지만 몇 년을 못 살고 나갔습니다. 그 후로 우리 아버지는 혼자 지내고 계십니다.


언젠가 제가 아버지에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부지요, 혼자 우에 지내겠십니꺼? 괜찮십니꺼?"
"몸이 좀 괴롭은 거는 아무것도 아이다. 마음이 편한 기 제일이다."



그 한마디 말씀 속에 아버지의 고충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새사람과 맞춰서 산다는 게 그리 쉬웠겠습니까?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참고 살았을 아버지의 고충이 그 한마디 말 속에 다 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혼자 되시고부터 우리 집은 제사를 일 년에 한 번만 지냅니다. 증조부 기일에 제사를 한꺼번에 다 같이 지냅니다. 전통 예법에는 안 맞지만 우리 집에서는 그리 정했답니다.

다섯 번인 제사를 한 번만 지내

아버지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길이 없더랍니다. 주부가 없는 집에서 제사를 다 챙긴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왕고모님을 비롯하여 증조 할아버지 밑에서 난 자손들을 다 불러 모아서 의논을 했답니다.

집안 어른들끼리 의논 끝에 아버지가 며느리를 볼 때까지 제사를 일 년에 한 번만 지내기로 의견을 모았답니다. 그리고 조상님들께 머리 숙여 용서를 빌면서 고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우리 집은 제사를 일 년에 한 번, 증조부 기일에 다 몰아서 지냅니다. 예법에는 어긋나지만 죽은 조상보다는 산 사람이 더 중하다는 결론 끝에 내린 용단이었지요.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말씀을 듣고 저는 솔직히 서운했습니다. 증조부모님과 조부모님은 몰라도 우리 엄마 제사는 따로 지냈으면 싶었거든요. 하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저한테는 우리 엄마가 제일 소중하지만 제 고모님들은 그분들의 부모님이 되시는 조부모님 제사를 따로 지내고 싶으실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서운한 마음을 달래며 오죽하면 그리했을까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습니다. 우리보다는 아버지가 더 많이 힘들어하셨을 테고 가슴 아파하셨을 테니까요.

몇 년 전(2004년)에 저는 증조부님의 기일에 맞춰서 친정에 다니러 갔습니다. 시집을 가는 것과 동시에 저는 친정집 사람이 아니라 시댁의 사람이라 생각하며 친정 일보다는 시댁 일을 항상 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증조부 제삿날은 학기 중에 있어서 가볼 엄두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해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제사에 참여하기로 하고 강화도를 출발해서 멀고 먼 청도 제 친정까지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집에서 낮에 출발했건만 친정에 도착하니 밤이었습니다. 아버지 혼자 계시기 때문에 늘 적적했던 우리 집은 오랜만에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사방에 불을 환히 밝혀두었고 방에서는 이야기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났습니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니 작은 엄마가 반색을 하면서 반겨줍니다.

"아이고, 김실이 왔나? 먼 길을 우에 왔디노? 저녁은 묵었나?"

그러자 방문이 열리면서 방 안에 있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그리고 고모와 당숙까지 다 한꺼번에 반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가방을 옆에 놓고 방 안을 향해 절을 하였습니다. 아버지 쪽을 보면서 한 번 절을 올리고 또 작은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오촌 아재 쪽으로 향해서 절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큰절을 올리니까 제가 어른임이 실감이 났습니다. 그리고 한가족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요.

결혼 전에는 아버지한테 큰절을 올리지 않았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친정에 가면 꼭 큰절을 올립니다. 아버지가 계시는 방의 문을 열어놓고 방 밖에서 큰절을 올립니다.

제사상 진설하며 어른 공경하고 아래 사람 챙겨

절을 올린 뒤에 방으로 들어가서 물어봤습니다.

"아부지예, 와 절을 방 밖에서 합니꺼? 안에서 하마 안 됩니꺼?"
"안 된다. 방 밖에서 해야제 안에서 하마 안 된다."


맨 끝에 작은아버지가 그리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작은 아부지예, 와 그래 해야 하는데요?"
"그기 법도인 기라. 옛날부터 내려오는 풍습 아이가."


그러자 옆에 있던 고모들도 한마디씩 하십니다.

"조부모님과 아버지 형제간한테는 그래 하는기라."
"외조부 외조모한테도 그래 해야지요. 그라고 외삼촌한테도 그래 하고."


작은아버지들도 한마디씩 하고 그러면서 절을 방 밖에서 왜 하는지 한참 동안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본관이 '고성'인 우리 성은 청도에서는 알아주는 성씨입니다. 예전 우리 고모 세대 때만 해도 고성 이가 딸네를 며느리로 얻기를 소망할 정도로 근동에서는 이름난 성씨입니다. 집안 아지매들도 우스갯소리로 그럽니다. 성이 좋아서 성 하나 보고 시집왔다고 그럽니다.

절 하나 하는 거에도 전통과 예법을 중시하는 어른들이지만 형편에 따라 결단을 내리신 겁니다. 산 사람이 살아야 조상도 있는 거다 그러시며 제사를 일 년에 한 번만 지냅니다.

몇 년 뒤에 동생이 장가를 가서 주부가 들어왔지만 제사를 원래대로 돌리지는 않았습니다. 동생댁은 어렸고 그래서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큰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그대로 지낸 게 오늘까지 그대로 굳어버렸습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은 그 다음이라고 생각하시면서요.

그 사이에 동생과 동생댁이 제사상을 다 진설해 놓았습니다.

"작은 어무이요, 이라마 됩니꺼? 한 번 봐 주이소."

동생댁이 작은 엄마한테 물어봅니다. 작은 엄마가 나와서 이리저리 살펴보며 고쳐놓습니다. 그 다음에 작은 아부지가 나오시더니 또 고쳐놓습니다. 그래 봤자 방향을 약간 돌리는 정도지만 그래도 꼭 살펴봅니다.

작은 엄마가 작은아버지한테 그러십니다.

"형님은 이거 더 좋아했구메. 이쪽으로 놓으소."

우리 엄마가 뭐 좋아했는지 나는 기억도 없는데 작은 엄마는 잘 챙깁니다.

"마 정성이 최곤기라. 정성들인 음식이마 된다."

작은아버지가 옆으로 물러서며 그러십니다.

"하이고, 우리 질부 봐라. 저래 밥을 이뿌게 담았네."

진설해 놓은 제상을 둘러보며 고모가 그러십니다. 제사 음식 준비하느라 힘들었을 우리 동생댁을 챙겨줍니다.

이제 11살이 되는 하나뿐인 내 조카가 이 모든 것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그냥 하는 말들도 그 애에게는 다 교육이 되겠지요.

시엄니 손맛과 정성이 며느리에게 내려가다

아부지가 향불을 피우시고 절을 올립니다. 모두들 엄숙하게 바라봅니다. 그리고 다 같이 엎드려 절을 합니다. 살아생전의 엄마 모습이 잠깐 동안 떠올랐습니다.

술잔 가득가득 술을 채워서 올렸습니다. 아부지가 올리고 내 동생이 올리고 그 다음에 우리 고모가 올렸습니다.

작은 엄마가 그러십니다.

"김실이도 잔 올리라 카이소. 멀리서 왔는데 한 잔 올려야제요."
"삼잔을 다 올맀는데 우야노. 이번에는 안 되고 다음번에 올리거라."


이렇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상을 거두고 제삿밥을 먹었습니다. 음복 술을 한 잔씩 마시고 그 다음에 밥을 비벼서 먹습니다. 탕국물도 떠먹고 돔배기(상어고기)도 먹어봅니다.

무를 납닥하게 썰어 넣고 돔배기(상어) 고기 좀 넣고 황태를 좀 넣은 탕국맛이 옛날 우리 엄마가 끓였던 그 탕국이랑 맛이 똑같았습니다. 시어머니 얼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 동생댁이 우리 엄마랑 똑같은 맛을 만들어 낸다는 게 참 고맙고 신기했습니다.

한밤중에 모두 둘러앉아서 제삿밥을 먹었습니다. 제사 음식 준비하느라 고생한 동생댁의 노고를 치하하고 또 돌아가신 분들을 기렸습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증조부모님과 조부모님이 우리 곁에 와 계실 것 같았습니다. 그 곁에서 다소곳하게 서 있을 우리 엄마 모습도 보였습니다.

문밖은 밤의 적막이 흘렀지만 문 안은 밝고 환했습니다.
#제사 #어머니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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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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