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와 한국의 내전,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랐나

[로마인 이야기] 로마 '내란기'와 한국전쟁 시기 지도자 비교

등록 2007.07.01 10:33수정 2007.07.02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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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적 전환기는 기원전 1세기 전후,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다. 당시 대다수의 정치인들은 로마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었다. 그때 로마의 미래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방향을 지시해준 지도자, 카이사르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실천하는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국가의 방향을 확립한다.

한국의 중요한 전환기는 1950년을 전후한 해방 후 시기이다. 일제의 통치로 정치세력이 부재했던 한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단일 정부를 수립할지, 외세의 뜻에 따른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될지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정치인과 국가 지도자들이었다. 당시 한국의 지도자들은 로마의 지도자들처럼 역사적 전환기임을 인식하고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인식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전쟁 시기의 로마 지도자와 한국 지도자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의 패권국가가 된 로마는 이후 혼란을 거듭한다. 이탈리아 반도 내의 국가일 때 유용했던 공화정은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시아까지 이르는 대제국이 된 로마는 다수의사결정 기구인 원로원으로는 국가위기상황을 대처하는 것에 한계를 드러낸다. 오래된 제도가 피할 수 없는 '동맥경화증' 또한 공화정의 위기를 더하게 된다.

원로원과 민회가 권력 균형을 이루며 나아가던 로마라는 배는 크기가 커지면서 스스로 좌초될 위기에 놓인다. 유일한 해결책은 현재 국가상황에 맞는 정치체제로의 개혁이었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인 원로원파의 반대로 번번이 개혁은 실패하고 로마는 혼란으로 치닫는다. 공화정파와 개혁파의 갈등은 동족간의 피를 부르는 학살로 이어지고 내전의 양상을 띠기도 하며 로마의 혼미는 가중된다.

1945년 해방이 된 한반도도 2000여년 전 이탈리아 반도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제가 패망하고 한반도에서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것은 바로 봉건 잔재와 일제 잔재의 청산을 통해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추진하려는 일종의 민족혁명의 시기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 일인독재체제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한 기간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지지를 업은 두 세력은 한치의 양보와 타협을 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을 계속한다. 결국 자유주의 세력은 38선 이남에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공산주의 세력은 38선 이북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두 세력은 크고 작은 반란과 충돌을 반복하고, 결국 내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로마의 내전과 한국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으로의 전쟁이다. 소련 지도자 레닌이 말했듯이 '전쟁은 정치를 다른 수단으로 연장한 것'이다. 전쟁은 후세에게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지만 동시대인들에게는 정치의 연속으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전쟁은 정치의 목적인 사회 구성원의 이해 조정이 실패하였을 때 행하는 최후의 실력행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클라우제비츠가 얘기했듯이 "전쟁은 우리의 적대자로 하여금 우리의 뜻을 완벽하게 이행하도록 하는 폭력행위이다".

따라서 전쟁은 갈등의 종식이자 개혁의 시작이 된다. 로마와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갈등은 달랐지만 목표는 같았다. 적대자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것. 그리고 상대를 제압하여 하나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지도자는 두 가지 목표 모두 달성하는 것에 실패하였다. 우리는 결국 두 개의 뜻을 가진 두 개의 정부로 남았다. 이것은 한 국가의 문제 해결에 있어 다른 국가의 힘을 빌리려는 한국 지도자들의 방식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지도자들은 정치로서의 전쟁도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수행 과정에서 책임감과 신뢰 면에서도 실패했다.


이기적이고 비겁한 피난

전쟁 초기에 공세로 나온 것은 북한의 김일성과 로마의 카이사르이다. 군사력의 우위를 살려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습작전으로 초반 주도권을 잡았다. 수세에 몰린 남한의 이승만 정부와 로마의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원로원 일파는 당황하여 수도를 포기하고 후방으로 후퇴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후퇴하는 것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한 국가가 정복당할 때는 그 지배집단과 국가기관 종사자가 가장 먼저 처벌 대상이 되므로, 이들은 '국가의 존립'을 위해 일차적으로 피난을 가야 할 존재이다. 문제는 그 방식에 있다. 그들이 피난 갔던 시기와 그 과정에서 국가기관의 책임자로서 보여 준 행동, 그들의 존립기반인 국민에 대한 자세 등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로마의 경우, 1월 12일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후 엿새 뒤인 1월 18일에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원로원파 의원들은 수도를 포기한다.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은 6월 25일 전쟁 발발한 후 이틀 뒤인 6월 27일 서울을 떠난다. 엿새와 이틀이라는 시간의 차이는 정보의 전달 속도와 적의 행군 속도 및 행군 거리의 차이에 있을 뿐이다. 로마와 남한의 고위층 인사들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피난을 떠난 것이다.

일주일도 채 안 되는 기간 로마와 한국의 국가 지도부는 무엇을 하였을까? 그들은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챙기기에 바빴다. 적에게 남겨질 국민의 안위와 국가 재산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로마 집정관과 원로원들은 개인재산을 가져가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국고 재산을 가져가야 할 필요성을 잊었다. 나중에 국고 재산을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에는 운반할 짐수레를 찾을 수 없었다. 누구도 국고 운반을 위해 자신의 수레를 희생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 국고는 로마에 고스란히 남게 된다. 서울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위층들은 자녀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기 바빴고, 가재도구뿐만 아니라 개까지 싣고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재무부장관은 서울을 떠나면서 화폐를 중앙은행에 그대로 두고 내려갔다. 전쟁은 국가 고위층을 이기적이고 비겁하게 만들었다.

관용과 복수

전쟁 시기에 로마와 대한민국에서 지배층이 보여 준 전쟁에 대한 반응과 대처에서 뚜렷이 구별되는 두 유형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국민에 대해 어떠한 책임감과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가 위기에 처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위기에 처한 것에 대해 걱정하고 고뇌하면서 책임감을 느끼는 유형이다.

전쟁 상황의 행동을 살펴보면 이승만과 그가 임명한 각료들이 주로 전자에 속했다면, 상당수의 의원들과 하급관리들은 후자에 속했다. 원로원파 의원들이 전자에 속했다면 카이사르는 후자에 속했다. 전쟁 수행중의 남북한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즘의 전형을 보여줬다. 자신의 지배 구역의 안전을 위해 적군, 심지어 양민에 대한 학살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반면, 카이사르는 마지막까지도 동포에 칼을 겨누는 내전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또한 전투 중에도 적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승리를 얻은 후에는 전쟁 포로에 대한 처벌을 금지하여 내전을 수행과정에서 불가분한 국가의 상처를 최소화하였다.

지도자의 행동이 달라지는 원인은 전쟁 목적의 차이에 있다. 권력을 추구하는 지도자는 그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국민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남·북한의 전쟁의 대의명분은 통일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권력의 유지였다. 특히 내부의 기반이 약한 이승만은 반공과 북진통일을 기치로 내세워 권력 기반을 다졌다. 로마에서의 전쟁을 살펴보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은 '정치체제를 위한 싸움'이었고, 그에 이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내전은 '권력을 위한 싸움'이었다. 카이사르는 국가를 존속시키기 위한 새로운 정치 체제를 수립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전쟁에 임했다. 카이사르에게는 전쟁은 수단이었고 그 이후의 국가의 통합과 개혁이 중요한 과제였다. 따라서 전쟁 수행 중에도 복수심에 이끌린 처벌 대신에 적에 대한 관용의 자세로 일관했다.

전쟁 중에 적에 대한 처벌은 전쟁 이후의 사회의 분위기를 좌우한다. 카이사르는 내전 기간에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면서 포로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거취의 자유를 주었다. 파르살로스 회전에서 승리하여 최고권력자가 된 후에도 모든 정적들을 용서했다. 그들에 대한 증거서류도 태워버리고 공직 복귀까지 허용하게 된다. 이러한 '관용'의 정신은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까지 이어진다. 관용의 정신으로 내전 이후의 로마는 전쟁의 상처를 빠르게 회복하고 국가 개혁에 온 힘을 기울일 수 있게 된다.

반면, 한국전쟁 당시 국가지도자들은 '관용'이라는 단어를 잊어버린 듯하다. 그들은 전쟁에 승리하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전쟁 발발 직후 남한은 후방의 안전을 목적으로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한다. 그 이후 북한이 점령하자 피살자의 가족들이 우익인사와 경찰의 가족들을 살해한다. 또한 남한은 서울 수복 이후 북에 동조한 부역자를 찾아 처벌한다. 그것은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늘어나는 학살 피해에 국민은 전쟁의 목적을 상실하고 복수심과 허탈감만 남게 된다. 남·북한 국가 지도자들에 의해 자행된 학살로 두 국가간 골은 깊어지고 민족 통합의 길은 멀어지게 되었다.

통일 한국을 위한 지도자의 모습

로마의 역사는 서기 476년으로 끝났지만 한반도의 역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 로마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 이후에 '화합'을 기치로 300년간의 평화를 이룩하였지만 남·북한은 내전 이후에 분단을 더욱 고착화하였다. 우리에게는 화합과 평화라는 과제가 아직 주어져 있다. 그 방법은 전쟁을 통한 것도 아니고 한쪽의 체제가 무너져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남북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정치ㆍ경제 체제가 발전하면서 상호 교류하고 협조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남북한 지도자들은 각자의 통치체제를 구축하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나 통일한국을 위한 체제를 구축하는 것에는 실패하였다.

50년 분단을 극복하는 과정은 쉽지 않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서로 다른 사상, 체제, 이념, 신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하나의 체제로 통합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까지도 포옹하는 카이사르의 관용정신과 남·북한을 어우르는 아우구스투스의 화합정신을 우리 사회에 뿌리 내려줄 지도자가 필요하다. 통일한국의 방향을 지시해줄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과 지속적인 의지를 가지는 우리의 지도자를 기다려본다.

덧붙이는 글 | *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김동춘, <전쟁과 사회>를 참고함

<로마인 이야기> 독후감 모집 응모.

덧붙이는 글 *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김동춘, <전쟁과 사회>를 참고함

<로마인 이야기> 독후감 모집 응모.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5


#로마인 이야기 #내전 #카이사르 #공화정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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